코소보 전쟁
전쟁, 분쟁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5:30
코소보 전쟁은 1998년 2월 28일부터 1999년 6월 10일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코소보와 알바니아에서 벌어진 분쟁입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로 간주되며 세르비아의 알바니아계 탄압과 코소보 해방군의 독립 운동이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NATO의 개입으로 유고슬라비아는 코소보 통제권을 상실하고 전쟁 범죄와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1989
[밀로셰비치 집권과 코소보 자치권 박탈]
대세르비아주의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에 취임하며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성지인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했습니다.
이는 코소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의 강한 반발을 샀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전체가 민족주의의 난발로 혼란에 휩싸이던 시기에, 코소보의 자치권 박탈은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에게 분리독립의 목소리를 더욱 키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5
[코소보 해방군의 무장 활동 시작]
대알바니아주의를 표방하는 분리독립 민병단체 코소보 해방군(KLA)이 코소보 지역에서 경찰 시설에 대한 사보타주 등 무력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세르비아는 KLA를 테러 단체로 규정했습니다.
이후 알바니아의 정치적 혼란으로 군대 무기가 코소보로 유입되면서 KLA의 세력이 크게 확장됩니다.
1998
[코소보 전쟁 발발]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코소보와 알바니아 지역에서 세르비아와 알바니아계 사이의 무력 충돌이 격화되며 코소보 전쟁이 공식적으로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보스니아 전쟁에 이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로 간주됩니다.
[드레니차 학살 사건 발생]
코소보 해방군과 유고슬라비아 경찰 간의 충돌이 격화되던 중, 세르비아 경찰이 드레니차 지역의 Prekaz 마을에서 코소보 해방군 지도자 아뎀 야샤리 일당을 소탕하면서 아동을 포함한 알바니아인 약 60명을 학살했습니다.
이러한 알바니아계에 대한 조직적 학살은 미국이 코소보 해방군 비판 입장을 선회하고 서방 세계가 세르비아를 본격적으로 비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NATO의 무력 사용 결의]
미국과 유럽연합의 철수 및 학살 방지 촉구를 세르비아가 무시하자,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 코소보 사태 해결을 위해 무력 사용을 결의했습니다.
이는 국제 사회의 본격적인 개입을 예고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99
[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시작]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NATO는 단기간에 세르비아 군경을 코소보 지역에서 몰아내고 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킬 계획이었으나, 예상과 달리 세르비아군의 저항은 거셌습니다.
러시아는 NATO의 공습을 침략 전쟁이라고 비난하며 국제 사회의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미군 스텔스기 F-117 격추]
NATO의 공습 중 미군의 스텔스 전투기 F-117 나이트호크가 유고슬라비아 방공망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스텔스기가 실전에서 격추된 세계 최초의 사례로 NATO에 큰 충격과 곤혹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NATO는 추가 병력을 배치하며 공습을 강화했습니다.
[중국 대사관 오폭 사건 발생]
NATO 공습 중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중국 대사관이 오폭되어 중국 국적 언론인 3명이 사망하고 논란을 빚었습니다.
이 사건은 NATO 공습의 정당성과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증폭시켰습니다.
이 외에도 코소보 난민 차량 등 다수의 민간인 오폭 사건들이 벌어져 NATO의 신뢰도를 크게 저하시켰습니다.
[UN의 밀로셰비치 대통령 기소]
유엔(UN)이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을 인종학살 등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이후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재판 도중 사망했습니다.
[UN 평화 결의안 서명 및 종전]
국제 사회의 중재 속에 세르비아가 유엔(UN)에 상정된 평화 결의안에 서명하며 코소보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전되었습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코소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상실했습니다.
전쟁 결과 코소보는 사실상 독립 상태가 되었고, 세르비아와 코소보에서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