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 전쟁

전쟁, 역사, 국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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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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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역사, 국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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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6월부터 1815년 2월까지 미국과 영국 및 양국 동맹국 간 벌어진 전쟁입니다. 영국의 해상봉쇄 미국 상선원 징발 아메리카 원주민 지원 미국의 캐나다 병합 욕구 등이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백악관 방화 뉴올리언스 전투 등 주요 격전이 펼쳐졌으며 미국 국가의 탄생 배경이 되는 맥헨리 요새 전투도 있었습니다. 헨트 조약으로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했으나 미국의 자립심 고취와 캐나다 민족주의 강화에 기여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은 해체되고 서부 지역에서 이주를 강요당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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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

[영국, 무역 제한 정책 발표]

영국이 프랑스와의 중립적인 무역을 막기 위해 '1807년 위원회 명령'을 통해 무역 제한 정책을 적용했습니다.

미국은 이를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하며 영국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이는 미영 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811

[영국 해군 징발 정책]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 전쟁 중 병력 확보를 위해 미국 상선에서 영국 태생 선원들을 강제로 징발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미국 국민들의 극심한 분노를 유발하며 전쟁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영국, 인디언 지원]

영국이 국경 지역에서 미국 정착민들을 공격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지원하고 무기를 제공하면서 미국의 영토 확장 욕구와 충돌했습니다.

특히 쇼니족 지도자 테쿰세가 이끄는 인디언 연합체에 대한 지원은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리틀 벨트 사건 발생]

영국 해군 11명이 사망한 '리틀 벨트 사건'이 발생하며 영국 역시 미국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이는 미영 간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812

[영국 수상 암살]

영국 수상 스펜서 퍼시벌이 암살당하고, 리버풀 경이 새롭게 권력을 잡았습니다.

리버풀 경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했으나, 소식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전달되기까지 3개월이 소요되어 전쟁 발발을 막지 못했습니다.

[美, 전쟁 선포 요구]

제임스 매디슨 미국 대통령이 의회에 대영제국에 대한 미국의 불만을 자세히 설명하며 선전포고를 요구했습니다.

[미국, 영국에 선전포고]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이 선전포고에 서명하고 공표함으로써 미합중국 역사상 최초로 타국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의회의 투표는 미국 역사상 정식 선전포고 투표 중 가장 치열했으며, 뉴잉글랜드주는 '매디슨 씨의 전쟁'이라 부르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英, 무역 제한 철회]

영국 리버풀 경이 프랑스에 대한 해상봉쇄를 종료하고 무역 제한을 철회하는 명령탄원서를 의회에 제출했으나, 소식 전달 지연으로 미국이 이미 선전포고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해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디트로이트 포위전 패배]

윌리엄 헐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캐나다 침공 후 디트로이트로 후퇴했습니다.

이곳에서 아이작 브록 소장과 테쿰세가 이끄는 훨씬 적은 수의 영국 정규군, 캐나다 민병대, 인디언들에게 항복하며 미국의 디트로이트 마을과 미시간 준주 대부분의 통제권을 상실했습니다.

[미국 내 반전 운동]

전쟁에 대한 미국 내 반발이 심화된 가운데, 특히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반전 운동이 격화되었습니다.

매사츠세츠주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고, 연방대법원장이 군중에게 발길질을 당하는 등 심각한 정치적 갈등이 표출되었습니다.

[퀸스턴 하이츠 전투 패배]

미군이 두 번째 캐나다 침략을 단행한 나이아가라반도에서 퀸스턴 하이츠 전투에서 다시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 브록 장군이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어퍼 캐나다 장악 시도는 좌절되고 영국군의 사기는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1813

[이리 호 전투 승리]

미군이 이리 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이리 호의 통제권을 확보했습니다.

이는 영국군과 인디언들을 서부 보급 기지에서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테쿰세 동맹을 격파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테임즈 전투, 테쿰세 사망]

윌리엄 헨리 해리슨 장군의 미군이 테임즈 전투에서 테쿰세 동맹을 결정적으로 격파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지도자 테쿰세가 전사하며 인디언 연합이 해체되었고, 미국의 기본적인 전쟁 목표 중 하나인 인디언 위협 제거가 달성되었습니다.

1814

[호스슈 벤드 전투 승리]

앤드루 잭슨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호스슈 벤드 전투에서 크리크족을 격파했습니다.

크리크족 전사 1,000명 중 800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잭슨군은 살아남은 크리크족을 추격해 항복시켰습니다.

많은 사학자들이 이 전투를 미영 전쟁의 일부로 간주합니다.

앤드루 잭슨은 이 전투에서 죽인 인디언들의 코를 잘라 전리품으로 삼고, 시체에서 피부를 벗겨 군마 고삐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여자가 살아남으면 인디언이 또한 늘어날 것'이라며 아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여성 인디언들을 학살했다는 잔혹한 행위도 전해집니다.

[나폴레옹 퇴위]

나폴레옹이 퇴위하면서 영국군은 기존 유럽 대륙에 배치되었던 병력을 미국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중대한 변화였으나, 미국 역시 이 시점에는 이미 전시 동원 및 전투 방식을 학습한 상태였습니다.

[평화 협상 시작]

미국과 영국 간의 평화 협상이 벨기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양측 모두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군사적 피폐함이 커지면서 전쟁을 종결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워싱턴 방화]

영국군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상륙하여 백악관, 미국 국회의사당, 해군 기지 등 주요 공공 시설을 불태웠습니다.

이 사건 이후 백악관은 불탄 자국을 가리기 위해 흰색 페인트를 칠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플래츠버그 전투 승리]

영국군 프레보스트 장군이 뉴욕을 대대적으로 침략했으나, 토머스 맥도너가 이끄는 미국 함대가 샹플레인 호수 통제권을 획득하며 영국군을 패퇴시켰습니다.

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프레보스트 장군은 소환되었습니다.

[맥헨리 요새 전투]

영국군이 메릴랜드 볼티모어의 맥헨리 요새에 25시간 동안 끊임없이 함포 사격을 가했으나, 미군은 끝까지 저항하며 성조기를 휘날렸습니다.

이를 본 미국의 변호사 프랜시스 스콧 키는 '별을 박아넣은 깃발'이라는 시를 지었고, 이는 현재 미국 국가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헨트 조약 체결]

벨기에 헨트에서 미영 양국이 평화 조약에 서명하며 미영 전쟁 종결에 합의했습니다.

이 조약은 영토 손실 없이 '전쟁 이전의 상태(status quo ante bellum)'로 복귀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습니다.

1815

[뉴올리언스 전투 승리]

헨트 조약 체결 소식이 전달되기 전, 앤드루 잭슨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뉴올리언스에서 영국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승리로 잭슨은 일약 전국적인 영웅으로 부상하며 미국인의 자존심을 회복했고, 반전 입장이었던 연방당의 붕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버이어 요새 전투]

미영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버이어 요새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000여 명의 영국군이 370명의 미군 수비대를 항복시켰습니다.

이 전투 이후 미국 본토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다른 나라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종전 공식 발효]

미국 정부가 종전을 공식적으로 발효하며 길었던 미영 전쟁이 마침내 완전히 마무리되었습니다.

1817

[러시 배것 조약 체결]

미국과 영국 사이에 오대호와 샹플레인 호수의 비무장을 법제화한 러시 배것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비무장 국경선을 토대로 한 양국 관계 개선의 상징적인 조약으로,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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