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고려-몽골 전쟁
전쟁, 역사, 고려사, 몽골 침략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5:27
고려 무신정권 최우 집권 시기에 발생한 몽골의 세 번째 침략입니다. 1235년부터 4년간 한반도 전역에서 막대한 인명 및 물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동아시아 최대 목탑인 황룡사 9층 목탑 소실 등 국가적 문화유산이 파괴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고려는 이에 굴하지 않고 팔만대장경 재조를 시작하며 국난 극복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강화도 조정은 백성 피해를 우려 왕족을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몽골군 철수를 이끌어냈습니다. 이 전쟁은 불안정한 강화를 통해 몽골과의 복잡한 관계가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235
[몽골 3차 침략 시작]
탕구타이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남송 공격을 명분으로 고려를 세 번째로 침공했습니다.
무려 4년간 한반도 전역을 휩쓰는 대규모 침략이 시작되며 고려는 또다시 전란에 휩싸였습니다.
몽골은 개주(개천), 온수(온양), 죽주(죽산), 대흥(예산) 등 여러 지역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를 휩쓸며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고려는 강화도에 웅거하여 방위에 힘썼습니다.
1236
[황룡사 9층 목탑 소실]
몽골군의 무자비한 침략으로 신라 시대부터 존재했던 동아시아 최대 목탑,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타 사라지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물론 한반도 역사의 위대한 문화유산 하나를 잃게 되었습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의 건의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염원하며 지어진 높이 약 8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목탑이었습니다. 몽골군의 침공 과정에서 완전히 불에 타 재만 남게 되었습니다.
1237
[팔만대장경 재조 착수]
몽골군의 무자비한 침략에 맞서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난을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 재조라는 거대한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려인의 강인한 정신과 국난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이전 몽골 침입 시 소실되었던 초조대장경의 대안으로, 고려는 팔만대장경의 재조를 강화도에서 시작했습니다. 이는 외적의 침입을 불심으로 막아내고 국가 안녕을 기원하는 전 백성의 염원이 담긴 국책 사업이었습니다.
1238
[고려, 몽골에 강화 제의]
강화도에 웅거하며 방위에 힘쓰던 고려 조정은 백성들의 극심한 피해를 우려, 김보정 등을 몽골 진영에 보내 강화를 제의했습니다.
이는 전쟁의 끝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고려가 강화를 제의하자 몽골은 왕의 직접 입조를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이는 몽골이 고려의 왕권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1239
[몽골군 철수 시작]
고려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하자, 몽골군은 4년에 걸친 잔혹한 침략을 끝내고 마침내 한반도에서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불안한 평화였지만, 백성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몽골군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철수했지만, 고려는 약속을 곧바로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이후 몽골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240
[신안공 전 몽골 인질]
몽골의 왕 입조 요구를 피하고자 고려는 왕족인 신안공 전을 왕제로 속여 인질로 보냈습니다.
이는 불안한 강화 속에서 고려가 취한 고육지책이었으며, 몽골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몽골은 고려 왕의 직접 입조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강화도에 있던 고려 조정은 왕의 안전을 우려하여 왕족인 신안공 전을 왕의 아우라고 속여 대신 보냈습니다. 이는 당시 고려가 처한 복잡한 외교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1241
[영녕공 준 몽골 인질]
이전에 보낸 신안공 전에 이어, 고려는 또다시 왕족인 영녕공 준을 왕자로 위장시켜 몽골에 인질로 보냈습니다.
이는 몽골의 지속적인 압력에 시달리던 고려가 취한 또 다른 외교적 조치로,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생존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고려는 몽골의 계속된 요구와 압박에 시달리며 영녕공 준을 왕자로 위장시켜 인질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고려가 몽골의 간섭과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