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한 전쟁
전쟁, 고대사, 국제관계, 동아시아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5:27
- 기원전 109년 한반도와 만주를 뒤흔든 고조선과 한나라의 대전쟁. - 고조선이 중계무역 독점과 흉노 동맹으로 한나라를 자극 대규모 침공의 빌미 제공. - 1년여간의 치열한 공방과 고조선 내부 분열 끝에 우거왕 피살 고조선 멸망. - 전쟁 결과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 설치되어 역사에 큰 영향. 중국에 대항한 첫 대규모 전쟁으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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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청동기문화가 형성된 무렵을 전후하여 고조선이 건립되었다. 이 시기 고조선은 중원지역에서 요하 지역에서 남하한 동이족에 의해 건국된 상왕조와 장기간 남북으로 병립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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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조선에 와서 교화]
중국 상나라의 신하 기자가 조선에 와서 백성들을 교화하고 주나라의 제후로 봉해지며, 기자조선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 상나라의 신하 기자가 조선에 건너와 백성들을 교화시켰으며, 이후 주나라의 제후로 봉해지면서 기자조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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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건국]
중국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이 유이민을 규합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 위만조선을 건국했습니다. 준왕은 남쪽 한(韓)으로 도망갔습니다.
중국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이 유이민을 규합하고 세력을 키워 당시 기자조선의 준왕을 몰아냈다. 위만은 정권을 차지하고 위만조선을 건국하였으며, 준왕은 최측근 신하들과 함께 남쪽 한(韓)으로 도망간 뒤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
[위만조선의 철기문화 수용]
위만조선은 한나라를 통해 철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강력한 철제 무기로 군사력을 강화하며 주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위만조선은 한나라를 통해 철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철기는 청동기와 달리 농업 등 생산도구로 사용되어 피지배층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강력한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군사력까지 강화되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며 영토를 넓혀 갔다.
[우거왕, 한의 중계 무역 요구 거절]
위만조선 우거왕은 한나라와 남쪽 나라들 사이의 중계 무역을 독점하여 이익을 얻었다. 한나라가 직접 조공을 요구했으나 우거왕은 이를 거절하고 흉노와 연합하면서 한나라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위만조선은 중국의 한(漢)과 한반도 남쪽의 나라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중계 무역을 독점하여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한(漢) 나라는 이를 견제하고 동북아시아의 각 나라가 조공을 바칠 때 위만조선을 거치지 않고 한에게 직접 바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은 이 요구를 거절하였고, 유목 민족인 흉노와 함께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를 빌미로 한(漢)이 위만조선의 수륙을 모두 공격해왔고, 이후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벌어졌다.
[한나라의 화의 시도 실패]
전선 교착 후 한 무제가 고조선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시도했으나, 협상은 결렬되고 아무런 소득 없이 사신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초기 전투에서 고조선의 거센 항전에 부딪혀 전쟁이 교착화되자, 한 무제는 사신을 보내 화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협상에 소득을 얻지 못하고 사신은 돌아가게 되었으며, 한나라는 왕검성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하며 치열한 접전을 이어갔다.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 및 초기 교착]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누선장군 양복의 수군과 좌장군 순체의 육군을 파견했으나, 고조선의 거센 항전으로 한군이 큰 손실을 입으며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한(漢) 무제는 위만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흉노를 먼저 친 다음 남방의 남월과 동북방의 위만조선을 차례로 공격했다. 왕검성을 향해 한(漢)의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는 산둥반도와 요동에서 각각 진격하였다. 그러나 양군 모두 위만조선의 거센 항전으로 밀려났다. 특히 누선장군 양복은 군사를 잃고 달아나 열흘 동안 산속에서 숨어지낼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로 인해 전쟁은 교착화되었다.
[우거왕 피살 및 고조선 멸망]
1년간의 전쟁으로 위만조선 지배층이 분열되자, 한나라에 회유된 주화파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항복하면서 고조선이 멸망했습니다.
1년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위만조선의 사람들은 지쳤고,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의 태생적 한계가 있던 지배층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한나라는 지금 항복하면 높은 벼슬과 재산을 내리겠다고 회유하였고, 결국 주화파가 우거왕을 살해한 뒤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고조선은 멸망하며 전쟁의 끝이 났다.
[한사군 설치]
한나라는 고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등 4개의 군, 즉 한사군을 설치하여 통치권을 확립했습니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진번군(眞番郡)·현도군(玄菟郡) 등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이는 『사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한나라가 고조선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한 것을 의미한다.
[성기 피살 및 왕검성 최종 함락]
우거왕 사후에도 왕검성의 저항은 계속되었으나, 주전파 대신 성기마저 우거왕의 아들에게 피살되며 왕검성이 최종 함락되고 전쟁이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우거왕이 죽었으나 왕검성은 쉽사리 함락되지 않고 저항을 이어갔다. 그러나 거듭된 전투 끝에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성기(成已)마저 한나라에 매수당한 우거왕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야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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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둔군·진번군 폐지]
한사군으로 설치되었던 임둔군과 진번군이 설치 20여 년 만에 폐지되고, 그 관할 지역은 낙랑군과 현도군에 편입되었습니다.
한사군으로 설치된 임둔군과 진번군은 설치 후 20여 년 만에 폐지되었다. 이들이 관할하던 지역은 낙랑군과 현도군에 소속되어 재편되었다.
현도군은 신흥세력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만주의 흥경(興京) 방면으로 옮겨졌다. 이는 한사군의 초기 설치 지역 및 지배 구역의 변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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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에서 독립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공손씨가 대방군을 설치한 것으로, 대방군을 통해 낙랑군 남부 지역의 일부를 관할하게 하였다. 이는 후한 말 한족과 예족이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낙랑군이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시기와 맞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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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대방군 소멸]
낙랑군과 대방군이 각각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소멸되면서, 고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던 한사군 체제가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각각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소멸되면서, 고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던 한나라의 군현 체제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