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고려-거란 전쟁

전쟁, 역사, 외교, 고려, 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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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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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고려-거란 전쟁은 거란의 대규모 침공으로 시작된 위기 속에서 고려의 탁월한 외교가 서희가 진가를 발휘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는 전쟁이 아닌 말의 힘으로 강동 6주라는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며 고려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 계승국임을 당당히 천명한 자주의 승리이자 외교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명장면으로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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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

[침략의 그림자]

요나라의 침공 소식이 압록강 부근의 여진족을 통해 고려에 두 차례 전달되며 전쟁의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이는 곧 다가올 거란의 대규모 침략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993년 5월과 8월, 압록강 인근의 여진족으로부터 거란이 고려를 침공할 것이라는 긴급 통보가 고려 조정에 전달되었다. 이 소식은 고려가 요나라의 침략에 대비할 시간을 주었으나, 동시에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거란의 압도적 침략]

요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80만 대군(과장되었을 가능성 높음)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성종은 직접 전선을 지휘했으나, 봉산군을 빼앗기고 윤서안이 사로잡히는 등 초반 열세에 몰렸습니다.

993년 10월, 요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은 약 80만 명에 달하는 대군(실제 병력은 약 6만 명으로 추정)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고려 성종은 박양유, 서희 등과 함께 안북부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했으나, 봉산군 전투에서 패하고 선봉장 윤서안이 거란군에 사로잡히는 등 위기에 처했다. 성종은 결국 서경으로 돌아왔고, 조정 내부에서는 항복론과 할지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서희, 외교의 신 한 수]

할지론이 대세이던 위기 속, 서희가 강력히 항전을 주장하며 소손녕과의 담판을 자처합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압록강 동쪽이 원래 고려 땅"임을 논리적으로 주장하며 거란군의 철수와 강동 6주 획득이라는 놀라운 외교 성과를 이끌어냅니다.

이는 전쟁 중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거란군의 침공으로 고려 조정이 혼란에 빠지고 서경 이북의 땅을 내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대세로 굳어질 때, 서희와 이지백 등은 강력히 항전을 주장했다. 특히 서희는 소손녕이 안융진 공격에 실패하고 화친을 제안하자 직접 협상에 나섰다.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 땅을 차지했고, 요나라를 섬기지 않고 송나라와 교류하기 때문에 침공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압록강 일대는 본래 고려의 땅인데 여진족이 가로막아 요나라와의 교류가 어려웠다고 반박했다. 이 담판 결과, 거란은 철수하고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 통주, 귀주, 곽주, 용주, 철주 등 압록강 유역의 전략 요충지인 강동 6주를 획득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고려의 영토 확장]

서희의 담판 성공으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압록강 동쪽에 위치한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북방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결과로 고려는 흥화진, 통주, 귀주, 곽주, 용주, 철주 등 이른바 '강동 6주'를 확보하며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북방 방어선을 강화하고 송나라와의 비공식적 교류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고려의 외교적, 군사적 승리였다. 비록 요나라와의 약조와 달리 송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았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의 전략적 가치를 인지하며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는 등 후속 분쟁의 씨앗이 남았지만, 단기적으로 고려에게는 큰 이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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