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 전쟁
전쟁, 역사, 국가 간 관계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5:17
세계 최강 몽골 제국에 맞선 고려의 28년간 치열한 항전. 막대한 피해에도 끈질긴 저항과 외교로 국체 유지. 무신정권 종식 및 몽골의 간섭으로 인한 반독립 시대 개막. 국혼을 통한 외교적 성과와 왕실의 희생을 동시에 보여준 역사적 대사건.
1206
[칭기즈 칸, 몽골 제국 건설]
테무친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칭기즈 칸이라 칭하며 세계 최대의 제국을 세워 동서양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강대한 제국이 고려의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역사상 가장 광대한 육상 제국이었습니다. 칭기즈 칸의 등장은 고려뿐 아니라 전 세계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변화의 서막이었습니다.
1225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몽골 사신 저고여가 고려 국경지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단정했습니다.
이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할 명분이 되어 양국 관계가 단절되고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이 사건은 몽골이 고려를 침략할 주요 명분이 되었지만, 고려는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며 양국 간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1231
[귀주성·개경 공방전]
몽골군은 귀주성을 맹공했으나, 박서, 김경손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굳건히 저항하며 성을 지켜냈습니다.
몽골은 귀주성 함락을 포기하고 수도 개경을 포위하며 강화를 압박했습니다.
몽골군은 포차와 누차 등 당시 최첨단 대형 병기를 동원했으나 귀주성의 방어를 뚫지 못했고, 고려는 이 전투에서 뛰어난 항전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고려, 몽골에 강화 요청]
개경이 포위되자 고려 조정은 몽골에 강화를 요청하며 막대한 공물을 바쳤고, 귀주성의 박서 장군도 항복하며 1차 침공이 끝났습니다.
몽골은 고려에 대한 간섭을 위해 다루가치 72명을 배치한 후 철수했습니다.
몽골이 파견한 다루가치들은 고려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며 이후 고려를 간섭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고려에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살리타이, 1차 고려 침공]
오고타이 칸은 1225년 사신 피살 사건을 명분 삼아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는 국서를 보냈고, 장수 살리타이에게 대군을 주어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몽골군은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함락시키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몽골은 투항한 고려의 장수 홍복원과 그의 군사들을 앞세워 고려의 주요 거점들을 빠르게 함락시켜 나갔습니다.
1232
[처인성, 살리타이 사살]
강화 천도에 분노한 몽골 장수 살리타이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여 개경과 남경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해전에 약한 몽골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고, 처인성에서 김윤후 장군이 쏜 화살에 살리타이가 전사하자 몽골군은 사기를 잃고 철수했습니다.
이로 인해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몽골군의 총사령관 살리타이의 죽음은 몽골군에게 최초의 큰 패배이자 전술적 오점을 남겼으며, 고려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려, 강화도로 천도]
집권자 최우는 몽골과의 강화가 진심이 아니었기에, 장기 항전을 위해 수도를 천혜의 요새 강화도(강도)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몽골에 대한 적의를 분명히 드러낸 선전포고였습니다.
최우 정권은 강화도의 자연 지형을 이용해 몽골의 해상 약점을 파고들며 장기적인 항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는 육지의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1235
[몽골 3차 침공, 황룡사 소실]
몽골은 남송 공격 길에 따로 탕구타이에게 대군을 주어 고려를 다시 침략했습니다.
4년간 전국을 휩쓸며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특히 신라의 국보이자 동양 최대 목탑이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이 이 때 파괴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동아시아 건축 기술의 정수였습니다. 이 탑의 소실은 고려 문화유산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혔습니다.
1238
[강화 제의와 인질 교환]
강화도에 웅거하던 고려 조정은 백성 피해를 우려해 강화를 제의했고, 몽골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왕의 아우나 사촌을 왕자로 가장시켜 인질로 보내 시간을 벌었습니다.
몽골은 왕의 직접 입조를 강하게 요구했지만, 고려는 이를 거부하며 왕족을 인질로 보내는 방식으로 외교적 협상을 이어갔습니다.
1253
[몽골 4차 침공, 충주성 공방전]
몽골은 새 칸 몽케의 즉위 후 다시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 출륙을 요구하며 예케를 시켜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몽골군은 강화도를 함락하지 못하고 충주성에 이르러 70여 일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충주성 방어군과 함께 노비들이 합심하여 몽골군을 격퇴하는 등 민중의 저항 의지가 돋보였습니다.
1254
[자랄타이 6차 침공, 최대 피해]
몽케 칸은 왕자의 입조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랄타이를 정동원수로 삼아 또다시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 침공은 고려에게 역대 가장 큰 피해를 안겨 포로 20만 6천여 명, 살상자 수없이 발생하며 전국이 황폐화되었습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포로가 20만 6천여 명에 달했고, 살상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려 전역이 황폐해지는 전례 없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1257
[세공 정지와 8차 침공]
고려가 매년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자, 몽골은 다시 자랄타이를 보내 침략했습니다.
고려는 김수강을 사신으로 파견해 몽케 칸을 설득하여 철수 약속을 받아냈지만,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은 고려의 태도를 주시했습니다.
김수강은 몽골 칸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며 일시적인 철수를 이끌어냈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1258
[최씨 정권 최의 피살]
몽골의 끈질긴 왕의 입조와 출륙 요구로 교섭이 난항을 겪던 중,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가 김준에게 피살되면서 무신정권이 약화되고 몽골과의 강화 분위기가 급진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최씨 정권의 붕괴는 고려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몽골과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1259
[쿠빌라이 칸과 세조구제]
고려 원종은 몽골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기 전 그를 찾아가 항복했고, 이는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에 쿠빌라이는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는 '세조구제'를 내려 고려가 완전한 속국이 되는 것을 막아주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이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不改土風)'는 명을 내린 것은 몽골 황실의 기존 관례를 깬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이는 훗날 입성책동 등 고려를 몽골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막아내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고려, 몽골에 최종 항복]
고려는 박희실 등을 사신으로 보내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 등 40여 명을 인질로 몽골에 보냈습니다.
강화도의 성을 허물어 항복 의지를 확고히 하며, 28년에 걸친 길고 지루했던 전쟁이 마침내 끝을 맺었습니다.
고려가 인질을 보내고 강화도성을 철거한 것은 몽골에 대한 항복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로써 길고 긴 전쟁은 일단락됩니다.
[고종 승하와 원종 즉위]
강화 조약 체결 후 고종이 승하하고 태자 전이 귀국하여 원종으로 즉위했습니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며 성의를 보였으나,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는 등 미묘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원종은 즉위 후에도 몽골의 요구와 고려의 국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어려운 외교를 펼쳐야 했습니다.
1270
[개경 환도와 무신정권 종식]
원나라가 원종의 입조와 군대 파견을 요구하자, 결국 원종은 개경으로 환도하며 몽골에 완전히 복종했습니다.
1170년 무신정변 이후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은 이 과정에서 집권자 임유무가 처형되며 종식되었습니다.
개경 환도는 단순한 수도 복귀를 넘어, 무신정권이 시작된 지 정확히 100년 만에 그 막을 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몽골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됩니다.
[고려-몽골 국혼 시작]
고려는 제후국으로 격하되고 몽골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자, 원종은 몽골 공주와의 국혼을 추진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황금씨족 외 혼인을 금하는 관례를 깨고 이를 허락하여 충렬왕이 그의 사위가 되었고, 이는 고려가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목소리를 내고 간섭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본래 몽골은 황금씨족이 아니면 혼인하지 않는 엄격한 관례가 있었지만, 쿠빌라이 칸은 고려와의 국혼을 허락하며 충렬왕이 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칸의 사위는 몽골의 중요한 회의인 쿠릴타이에 참석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고려는 다루가치 철수, 동녕부 및 탐라총관부 반환 등 여러 외교적 성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려 왕자들은 몽골에서 교육받는 등 왕실에 대한 간섭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