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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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2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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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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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은 격변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중도파의 이상과 좌절을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 언론인 학자로서 아홉 차례나 투옥되면서도 비타협적 민족주의를 지켰습니다.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 민공협동을 주창하며 통일국가 건설에 헌신했으나 이념 대립의 파고 속에서 한계를 경험했습니다. 초대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납북되어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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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

[안재홍 탄생]

경기도 수원군(현 평택시)에서 지주 집안의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 학자 안향의 24대손으로, 어린 시절부터 역사의식이 강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1911

[와세다 대학 유학]

이승만의 영향과 이상재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학과 공부 외에도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독서하여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었다.

재학 중 신익희, 송진우, 조소앙 등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경성기독청년회 중학부 졸업 후 1909년 9월 도쿄청년학원에 들어가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1910년 9월에 수료했다. 이후 1911년 9월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과에 입학하여 1914년 6월 졸업했다. 유학 중 여운형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1913년 상하이에서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입했다.

1919

[3.1 운동 참여와 투옥]

3·1 만세 운동에 참여해 평택에서 학생들의 만세 운동을 지도했다.

같은 해 5월 비밀조직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총무로 활약하며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하다 체포, 대구 경무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 고문으로 등뼈에 심한 타박상을 입어 후유증을 겪었다.

1920년 12월 대구지법 최종 재판에서 제령 위반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2년 출옥했다.

1923

[언론 활동과 물산장려운동]

출옥 후 최남선 등과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했으며, 1924년에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 겸 이사, 1926년 9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이 되었다.

또한 조만식, 김성수 등과 함께 국산품 사용을 장려하는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여 물산장려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1930년 1월부터 조선일보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연재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27

[신간회 결성 주역]

타협적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서, 허헌, 김병로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여 본부 총무간사로 선출되었다.

이는 좌우합작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1928

[일제강점기 아홉 차례 투옥]

1919년 이후 총 9번에 걸쳐 일제 총독부에 체포되어 7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필화사건, 신간회 활동, 군관학교 밀파 알선,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등 그의 독립운동과 언론 활동은 끊임없이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건강과 재산을 잃었으나 독립 정신을 잃지 않았다.

주요 옥고는 다음과 같다: 1928년 1월 조선일보 사설 '보석지연의 희생'으로 투옥(2차), 1928년 5월 논설 '제남사건의 벽상관'으로 투옥(3차, 조선일보 무기정간), 1929년 12월 신간회 광주학생사건 관련 투옥(4차), 1932년 3월 만주 동포 구호 의연금 유용 사건 연루 투옥(5차), 1936년 5월 중국 난징군관학교 밀파 알선 사건으로 투옥(6차, 징역 2년),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 구금(7차), 1938년 10월 군관학교 사건 형 확정으로 투옥(8차),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 투옥(9차, 1943년 3월 불기소 풀려남).

1944

[일제로부터 치안 협력 요청]

일제 패망을 예감하고 민족주의 조직 결성을 구상하던 중, 일본의 패전 직전인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초대로 총독부를 방문했다.

그는 패전 후 조선반도 치안 유지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한일 양민족 간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한 '민족자주, 호양협력, 마찰방지' 3원칙을 제시했다.

이후 총독부는 그를 암살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으나, 안재홍은 '호양협력'의 자세를 일관되게 견지하며 종전에 대비한 협상을 재개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1945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광복 직후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경성중앙방송국에서 질서 유지, 식량 확보, 정치범 석방 등을 언급하며 연설하는 등 해방정국의 혼란 수습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송진우 등에게 건준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으며, 이후 박헌영파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1945년 9월 초 건준과 결별했다.

[조선국민당 창당 및 통합]

건국준비위원회의 좌경화에 대한 반감으로 건준과 결별하고 '조선국민당'을 창당했다.

이후 여러 군소 정당과 통합하여 '국민당'을 만들었으며, 1946년 4월 18일에는 민족대동단결을 위해 한독당과의 통합을 강행하여 입당했다.

김성수의 권고로 한민당 입당도 고려했으나, 한민당 일각에서 그를 좌파 또는 조선식 공산주의자라고 음해하여 무산되었다.

[신탁통치 반대에서 수용론으로]

초기에는 김구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여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았다.

그러나 이후 국제 정세와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사항을 면밀히 검토한 뒤, 1946년 4월 한민족의 단결된 의사로 미소공동위원회 합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신탁통치를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는 파업 철회를 촉구하고 좌우의 극한 대립을 경계하며,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 수용이 곧 신탁통치 허용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1947년 6월 19일 한국독립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1946

[해방정국 정치활동]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28인 중 1인) 및 정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이어서 민주의원 의원에도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좌우 대립을 경계하며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만일 한국에서 통일 정부를 빨리 만들지 않으면 '내란적인 항쟁의 피를 흘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1946년 12월에는 미 군정의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7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취임]

미 군정청의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어 1948년 9월 15일까지 근무했다.

각 부처의 장과 도지사를 한국인으로 교체하고 미국인을 고문으로 임명하는 등 한국인 중심의 행정을 추진하려 했다.

민정장관 재임 중 한민당과 공산당 양측으로부터 '친일파', '미군정의 앞잡이', '계급의식을 희석화하려는 소부르주아지' 등으로 맹렬한 공격을 받으며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김구 또한 그를 냉담하게 대했다.

1948

[제주 4.3 진압 회의 참석]

제주 4.3 사건 해결을 위한 회의에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경무부장 조병옥 등과 함께 참석했다.

회의 중 조병옥과 김익렬 연대장 간의 극심한 언쟁과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여 회의가 난장판이 되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중재하려 했다.

이 회의에서 김익렬 중령이 조병옥 경무부장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회의는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1949

[국기시정위원회 위원 위촉]

남북협상 실패 후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며 이승만 정부에 참여했다.

1949년 대한민국 1대 대통령 이승만이 조직한 '국기시정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어 국기 제정에 기여했다.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자로 출마했으나 2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이후 조선국민당 당수와 조선일보사 사장 겸 주필을 역임했다.

1950

[제2대 국회의원 당선]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평택군 민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는 해방 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그의 중도적 노선과 대중적 지지가 여전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중 납북]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정부의 안심하라는 방송을 믿고 서울에 머물다 조선인민군에 의해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포로가 되는 길을 택했으며, 이후 북한에서 별다른 활동 없이 금기의 인물이 되었다.

조선인민군은 권태희와 2명의 정보요원을 시켜 안재홍이 숨은 곳과 연고지를 추적했으며, 그는 돈암동 자택 근처에서 체포되었다.

1965

[북한에서 생을 마감]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된 후, 1965년 3월 1일 북한에서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일본 방송을 통해 남한에 전달되었으며, 시신 없는 영결식이 서울에서 거행되었다.

북한 정권은 1965년 12월 세계적십자사국제위원회를 통해 시신을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옛 동지인 홍명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1989

1989.03.01 사후 24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추서]

한국에서는 한동안 납북 인사로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1970년대부터 그의 재평가 논의가 활발해졌다.

그의 민족을 위한 헌신과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되어, 1989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중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며 그의 업적이 재조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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