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군인, 정치인,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3:55:18
-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활동에 헌신했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핵심 인물입니다. -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를 민족운동에 접목하며 한인사회당을 조직했습니다. - 이승만 대통령과의 노선 갈등 끝에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를 창당하는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 사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며 그의 공적이 재평가되었습니다.
1873
[함경도에서 태어나다]
조선 함경남도 단천에서 아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호는 성재였고, 대자유라는 호도 사용했습니다.
1891
[무관의 길로 들어서다]
18세 무렵 군수 시중을 드는 통인으로 일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이용익의 추천으로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1895
1896
1899
1902
[개혁당 조직 및 진위대장]
개혁당을 조직하여 개화 운동에 뛰어들었으며,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활동하며 군사적 역량과 정치적 신념을 동시에 펼쳤습니다.
1906
[애국계몽운동 투신]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군직을 사임하고,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또한 대한자강회 결성에도 관여하며 독립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1907
[기독교 신자 되다]
강화 진위대 참령으로 복무하며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나,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 일제에 체포되어 유배되었습니다.
다행히 그해 10월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1908
[신민회 조직 참여]
석방 후 서북학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이동녕, 안창호, 양기탁, 이갑 등 당대 최고의 지사들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911
[105인 사건 연루]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에서 다시 체포되었고, 황해도 무의도로 유배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1912
[북간도 망명, 교육자 변신]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해 북간도로 망명했습니다.
그곳에서 김립, 계봉우 등과 함께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주의 교육에 매진했으며, 구례선 목사의 도움으로 북간도 전역에 기독교 선교 사업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1913
[연해주 독립운동 합류]
러시아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에 가담했습니다.
이상설, 이갑, 신채호 등 당대 최고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전쟁론'을 주창하며 적극적인 민족해방투쟁에 나섰습니다.
1914
[독립군 양성 노력]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 탄압이 심해지자, 이종호 등과 함께 중국 왕청현으로 거점을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대전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1915
[무관학교 해체와 은신]
이듬해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대전무관학교가 해체되고, 자신 또한 일제 관헌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왕청현 하마탕의 한인촌에 숨어 요양해야 했습니다.
1917
[러시아 혁명과 체포]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7월 초 '독일 제국 밀정'으로 오인되어 케렌스키 임시정부 헌병대에 체포되어 수감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18
[사회주의와 민족운동]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의 도움으로 풀려나 하바롭스크로 이주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한국민족운동에 사회주의 사상을 접목시키기 시작하며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한인사회당 창당]
하바로프스크에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계열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했습니다.
또한 연해주에서 한인적위군을 편성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1919
[임시정부 군무총장 취임]
3·1 운동 직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문창범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대한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동녕현에 임시군집부를 설치하여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강력한 추진력을 보였습니다.
[임정 국무총리 취임]
8월 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습니다.
임시정부 내외의 동조 세력을 규합하고 사회주의 운동 확산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승만과 노선 갈등]
임시정부가 재개편되면서 국무총리에 선임되었으나, 공산혁명을 주장하는 그와 구미식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 간의 노선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21
[고려공산당 창당]
임시정부 탈퇴 후 고려공산당(상하이파) 창당에 나섰습니다.
그는 이를 민족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의 전환이자 '최후 승리의 경로'라고 평가했습니다.
[국민대표대회 통합 실패]
사회주의 계열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했으나, 상해파(이동휘), 이르쿠츠크파(여운형), 엠엘파(김준연)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결국 통합에는 실패했습니다.
[레닌 자금 사건과 사임]
레닌이 보낸 독립자금을 수령하는 과정에서 자금 전달책인 김립이 김구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일로 그는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를 떠나 시베리아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시정부 내 분열을 심화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
[상해 임시정부 탈퇴]
상해 임시정부의 개혁 여부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 및 다른 총장들과 대립하다 결국 임시정부를 탈퇴했습니다.
1935
[병으로 순국하다]
생애 말년 국제혁명자후원회 한인 책임자로 활동하며 파르티잔스크 지방을 방문한 후 알촘 탄광을 나오던 길에 거센 눈보라를 만나 심한 독감에 걸려 쓰러졌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옮겨졌으나 62세의 일기로 병사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1995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잊혀져 왔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의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