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희
농구 선수, 농구 지도자, 농구 해설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21:38
- 대한민국 농구 역사에 슛도사라는 별명과 함께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슈터. - 농구대잔치 12시즌 연속 득점왕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우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 -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 남자 농구팀의 금메달을 이끌며 국민적 영웅으로 자리매김. - 배우 최란과의 결혼으로도 큰 화제를 모았으며 은퇴 후 지도자 및 해설위원으로도 활약.
1959
[전설적인 '슛도사' 이충희의 탄생]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에서 태어난 이충희는 한국 농구계의 전설적인 '슛도사'로 불리며 슈팅 가드와 스몰 포워드로 활약한 농구 선수이자 지도자입니다.
1959년 11월 7일,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에서 태어난 이충희는 대한민국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현역 시절 '슛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슈팅 능력을 자랑했으며, 슈팅 가드와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맹활약했습니다. 그의 등장은 한국 농구의 인기를 견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8
[국가대표 데뷔 및 아시안 게임 은메달 획득]
이충희는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단체전 은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대회에서의 첫 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1978년부터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이충희는 같은 해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 단체전 은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무대에서의 화려한 경력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의 뛰어난 기량은 빠르게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81
[현대전자에 입단 및 득점왕 신화 시작]
현대전자에 입단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한 이충희는 농구대잔치에서 12시즌 연속 득점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슛도사'의 명성을 공고히 했고, FIBA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1981년 현대전자 농구단에 입단한 이충희는 곧바로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농구대잔치에서 12시즌 동안 득점왕을 차지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한국 농구계의 독보적인 존재임을 입증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압도적인 득점력을 바탕으로 팀을 이끌었으며 '슛도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FIBA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단체전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1982
[아시안 게임 농구 금메달 획득]
인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농구 종목에서 대한민국 대표팀 소속으로 출전하여 중국을 꺾고 대한민국 남자 농구 사상 두 번째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그의 선수 시절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1982년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안 게임에서 이충희는 대한민국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대한민국 남자 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남자 농구 사상 두 번째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었습니다.
1984
[배우 최란과의 결혼]
당대 최고 인기 농구 스타였던 이충희는 유명 배우 최란과 결혼하여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이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습니다.
1984년, 이충희는 유명 배우 최란과 결혼식을 올리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의 만남은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되었으며, 이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습니다.
1987
[ABC대회 최우수선수 선정]
태국 방콕에서 열린 ABC대회(FIBA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에 선정되며 아시아 최고의 선수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1987년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ABC대회(현 FIBA 아시아컵)에서 이충희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는 이 대회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며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었고, 아시아 농구계에서 그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했습니다.
1992
[프로 선수 은퇴 및 해외 리그 진출]
현대전자를 은퇴한 후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훙궈 엘리펀츠에서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선수 생활의 마지막과 지도자 경력의 시작을 알리는 전환점이었습니다.
1992년, 이충희는 오랜 기간 몸담았던 현대전자 농구단을 떠나 중화민국 푸위안 건축 농구단(훙궈 엘리펀츠)으로 이적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지도자 경력을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1997
[창원 LG 세이커스 초대 감독 부임]
창원 LG 세이커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며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창단 첫 해 정규리그 2위와 플레이오프 4강이라는 돌풍을 일으키며 지도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1997년, 이충희는 창원 LG 세이커스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며 한국프로농구(KBL)에서 본격적인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창단 첫 시즌에 팀을 정규리그 2위와 플레이오프 4강으로 이끄는 등 인상적인 돌풍을 일으켰으나, 이후에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2007
[대구 오리온스 감독 역임과 자진 사퇴]
대구 오리온스의 감독을 역임했으나, 4승 22패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시즌을 채 마치지 못하고 자진 사퇴하며 지도자로서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007년 5월, 이충희는 대구 오리온스의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팀의 성적 부진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4승 22패라는 심각한 성적으로 시즌 도중인 12월에 자진 사퇴하며 지도자로서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008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 시작]
한국방송공사(KBS)와 KBS N 스포츠에서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현장 경험과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시청자들에게 경기를 전달했습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이충희는 KBS와 KBS N 스포츠에서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약했습니다. 선수와 감독으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경기를 분석하고 해설하며 팬들에게 농구의 재미를 더했습니다.
2013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으로 현장 복귀]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으로 선임되어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했습니다. 복귀 후 3연승을 기록했으나, 이후 성적 부진으로 팀을 창단 첫 최하위로 추락시켰습니다.
2013년 4월 29일, 이충희는 원주 동부 프로미의 감독으로 선임되며 프로농구 현장에 복귀했습니다. 초반 3연승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작전 타임 전술 부족과 무리한 주전 선수 기용 등으로 인해 팀은 12연패, 최종 14연패를 기록하며 창단 첫 최하위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2014
[스카이 스포츠 해설위원 활동]
스카이 스포츠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농구 팬들과 소통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그의 다재다능한 농구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활동이었습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이충희는 스카이 스포츠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농구 팬들에게 그의 경험과 통찰력을 전달했습니다. 이는 그의 다재다능한 농구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활동이었습니다.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직 자진 사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직에서 자진 사퇴하며, 지도자로서의 또 다른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2014년 2월 1일, 원주 동부 프로미를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으로 이끌었던 이충희 감독은 결국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습니다. 이는 그의 지도자 경력에 또 한 번의 아쉬운 기록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