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호

야구 선수, 유격수,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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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0: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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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호
야구 선수, 유격수,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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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호는 한국 프로야구(KBO) 역사상 유격수 포지션에서 독보적인 기록들을 세우며 평화왕으로 불렸던 전설적인 야구 선수입니다. 대한민국 최초로 메이저리그(MLB)에 직행한 내야수로서 KBO에서 유격수 최초 40홈런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KBO 골든글러브를 4회 수상했으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회로 국가대표팀에서도 맹활약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아쉽게도 부상과 개인사로 인해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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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강정호는 1987년 5월2일 광주직할시 (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2005

[고교시절 대활약]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며 재능을 뽐냈습니다.

광주제일고등학교 에이스로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며 우수 투수상과 타점상을 수상했고, '황금사자기가 낳은 최고의 스타'로 불렸습니다.

청소년 국가대표 주장과 4번 타자를 맡아 국제 무대에서도 맹활약했으며, 프로 스카우트들에게 '최고의 만능선수'라는 극찬을 받으며 고졸 야수 중 가장 빠른 순번으로 2차 드래프트 1라운드에 지명되었습니다.

투구 구속이 148km/h에 달했고, 프로 스카우트들이 인정할 만한 최상급 포수 능력을 가졌습니다. 청소년 대표팀에서 일본 에이스를 상대로 유일한 타점을 올리는 등 타율 0.375를 기록하며 '베스트 10 포수'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고교 시절 롤모델은 스즈키 이치로였습니다.

2006

[프로 데뷔, 김재박 극찬]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아 현대 유니콘스에 포수로 입단했으나, 곧바로 내야수로 전향했습니다.

입단 초기 전지훈련에서 당시 김재박 감독으로부터 "박진만보다 훨씬 낫다"는 극찬을 받으며 시즌 개막전에 주전으로 기용되어 프로에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팀 사정상 1군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고, 2군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고도 기회를 받지 못해 야구를 그만둘 뻔했던 힘든 시기였습니다.

2006년에는 10경기, 2007년에는 20경기에만 출전했습니다. 2군에서는 1년차에 타율 0.322, 16홈런, 73타점, OPS 0.955를 기록하는 등 맹활약했습니다. 가장 닮고 싶은 선수로는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꼽았습니다.

2008

[넥센 이적, 유격수 변신]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넥센 히어로즈로 선수단이 인계된 후 1군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초반에는 2루수로 활동했으나, 강한 어깨와 빠른 공 처리 속도를 인정받아 유격수로 전향했습니다.

당시 이광환 감독의 꾸준한 기용 속에 초반 부진을 딛고 후반기에 타격이 폭발하며 팀의 주전 유격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리그를 대표하는 대형 유망주'로 떠오르며 타 팀 팬들의 트레이드 0순위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허구연 해설위원 등 전문가들은 그의 수비 범위를 '2루수 고영민 그 이상'이라고 평가했으며, 김성근, 김경문 등 타 팀 감독들도 그의 유격수 전향 후 팀 내야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극찬했습니다.

2009

[유격수 20홈런, 전경기]

당시 김인식 국가대표 감독이 "국가대표 유격수를 뭐하러 걱정하느냐? 차기 국가대표 유격수에 그가 있다"고 공언할 만큼 주목받았습니다.

시즌 초반 극심한 타격 부진에도 불구하고 후반기 맹타를 휘둘러 유격수 포지션에서 6년 만에 20홈런을 달성했고, 백업 없이 유격수 전 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리그 최고급의 수비 능력을 겸비했지만,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하며 이례적인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수상자인 손시헌마저 미안함을 표할 정도의 논란 속에서도, 이순철, 이효봉 해설위원 등은 그를 이종범 이후 최고의 유격수로 성장할 자질을 갖춘 선수로 평가했습니다.

2010

[첫 GG, AG 금메달]

데뷔 첫 3할 타율을 기록하며 생애 처음으로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결승전에서 2홈런 5타점을 기록하는 맹활약으로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과 병역특례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대만과의 경기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 '대만 킬러'라는 별명과 함께 추신수와 더불어 최고의 타자로 지목되며 미국 CBS, ESPN 등 주요 스포츠 방송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주가를 한참 올렸습니다.

2년 연속 유격수 전 경기 출장을 기록했습니다. 아시안 게임에서 13타수 8안타, 3홈런, 8타점, OPS 25할의 맹타를 휘둘렀습니다.

2012

['K-로드' 20-20 클럽]

이택근, 박병호와 함께 'LPG 트리오'를 결성하며 강력한 타선을 이끌었습니다.

유격수 포지션임에도 압도적인 장타력을 뽐내며 팬들로부터 'K-로드'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종범에 이어 유격수로는 두 번째로 '20-20 클럽'에 가입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리그 유격수들의 WAR와 OPS를 압도하며 '평화왕'으로 불렸고, 총 투표수 351표 중 324표라는 압도적인 득표로 두 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커리어하이인 25홈런을 기록했습니다. ADT 캡스 최고 수비왕, ADT 캡스 베스트 수비수, KBO 베스트 나인 등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며 공수겸장의 유격수로 인정받았습니다. 80년대 김재박, 90년대 이종범을 잇는 대형 유격수 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2013

[WBC 활약, MLB 스카우트]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대표팀 주전 유격수로 선발되어 타이완전에서 역전 2점 홈런을 터뜨리며 승리에 공헌했습니다.

정규 시즌에는 개인 커리어 최다인 96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시기, 디트로이트, 워싱턴, 필라델피아, 미네소타, 샌디에이고, 피츠버그 등 수많은 MLB 스카우트들이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며 해외 진출 가능성이 점쳐졌습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6년 연속 유격수 WAR 1위를 기록했습니다. 2년 연속 골든글러브, ADT 캡스 최고 수비왕 등 수비 관련 상을 싹쓸이하며 공수 모두 리그 최고임을 입증했습니다.

2014

[유격수 KBO 역사 새로 쓰다]

KBO 리그에서 유격수 포지션의 역사를 새롭게 쓴 한 해였습니다.

그는 유격수 최초 3년 연속 20홈런, 이종범 이후 17년 만에 2번째 유격수 30홈런을 넘어, 종전 유격수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특히 시즌 최종전에서 유격수 최초 40홈런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하며 야구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와 함께 역대 최초 유격수 30홈런-세 자릿수 타점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압도적인 활약으로 플레이오프 MVP를 수상했으며,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결승 2점 홈런을 터뜨려 MVP에 선정되었습니다. 시즌 후 골든글러브 투표에서 역대 유격수 최고 득표율인 97%를 기록하며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부상 공백에도 불구하고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맹활약하며 금메달 획득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MLB 최초 직행 내야수]

KBO에서의 압도적인 활약에 힘입어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포스팅 시스템을 실시했습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500만 2015달러라는 거액을 제시하며 독점 협상권을 따냈는데, 이는 야수 포스팅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긴 협상 끝에 피츠버그와 4년 1100만 달러 보장 계약에 최종 서명하며, 대한민국 최초로 KBO 리그에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내야수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양현종, 김광현 등 다른 한국 선수들의 포스팅 결과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니코스키, 라이언 사도스키 등 MLB 전문가들은 그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 점치기도 했습니다.

2015

[MLB 돌풍, 신인상 쾌거]

메이저리그 계약 후 백업으로 시작했으나, 곧 주전으로 도약하며 공수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7월에는 타율 0.379, OPS 1.064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하며 리그 전체 상위권에 랭크되었습니다.

이러한 맹활약으로 한국인 선수로는 최희섭 이후 12년 만에 'MLB 이달의 신인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동양인 내야수 역사상 최초로 실버 슬러거 후보에 거론될 만큼 강력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5월 4일 세인트루이스전에서 MLB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9월 9일 신시내티전에서는 MLB 첫 만루 홈런을 터뜨리며 팀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신인 중 최다 멀티히트를 기록했으며, 리그 전체 유격수 WAR 1위를 기록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충격적 시즌 아웃 부상]

신인 돌풍을 이어가던 중 시카고 컵스전에서 상대 선수와의 충돌로 왼 무릎 인대 및 반월판 파열, 정강이뼈 골절이라는 심각한 중상을 입고 수술대에 오르며 시즌을 조기 마감했습니다.

비록 부상으로 시즌을 마쳤지만, 내셔널리그 신인왕 투표에서 3위를 차지하며 그의 존재감과 실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부상 복귀까지 6~8개월이 소요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류현진의 신인왕 순위(4위)를 넘어선 3위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데뷔 시즌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2016

[부상 극복, 중심 타자]

심각한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복귀하여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타율은 다소 떨어졌지만, 팀의 간판 선수인 앤드류 맥커친이 부진할 때 4번 타자로 나서는 등 중심 타자로서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20호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워싱턴 내셔널스전에서는 상대 선수의 부상으로 양 팀 간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20호 홈런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장타력을 과시했습니다. 워싱턴과의 경기에서 브라이스 하퍼의 슬라이딩과 충돌 후 다음 이닝에 위협구가 날아와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습니다.

2017

[음주운전 시련, 도미니카]

음주 운전 사건에 연루되어 메이저리그 비자 문제로 인해 2017년 시즌에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재기를 위해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주선으로 도미니카 윈터리그 아길라스 시베나스에 입단했으나, 타율 0.143의 부진한 성적으로 아쉽게 방출되며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선수 커리어에 큰 오점으로 남았으며, 팬들에게 깊은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후 그의 재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2019

[MLB 경력 종료]

여러 우여곡절 끝에 메이저리그에 다시 복귀하려 노력했으나, 부상과 공백, 그리고 이어진 부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방출되며 메이저리그 생활에 아쉬운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2018년 9월 29일, 726일 만에 빅리그에 복귀하여 첫 타석에서 좌전 안타를 기록하며 재기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2018년 11월 9일, 1년 550만 달러에 재계약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2019시즌 65경기에서 타율 0.169, 10홈런에 그치며 팀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방출되었습니다.

2023

[새로운 시작, 아카데미]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후, 2023년부터 'KINGKANG 아카데미'의 대표로서 활동하며 후배 양성과 야구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야구 팬들 앞에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속죄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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