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문학가, 언론인, 독립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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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3: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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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문학가, 언론인, 독립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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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이자 만인의 연인이라 불린 천재 작가 이광수. 그는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무정으로 새로운 문학을 열었지만 일제 말기 친일 행적과 창씨개명으로 큰 논란을 낳았습니다. 민족개조론 여성 해방 등 시대를 앞선 사상을 설파했으나 그 복합적인 삶은 오늘날까지 뜨거운 논쟁의 대상입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한국 근대사의 축소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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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조선의 신동 탄생]

평안북도 정주에서 전주 이씨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형들이 요절해 사실상 독자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며 '신동' 소리를 들었습니다.

1902

[11세, 고아가 되다]

11세 되던 해, 콜레라로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되어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 충격은 평생 고아 콤플렉스와 병약함으로 이어졌으나, 오히려 그를 자립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1903

[천도교에서 새로운 길을 찾다]

고아가 된 후 경성에서 육체노동을 전전하던 중, 천도교인의 도움으로 천도교에 입교했습니다.

도쿄와 한성부의 문서를 베끼고 배포하는 일을 하며 문필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1905

[첫 일본 유학, 좌절과 희망]

천도교의 지원으로 일본 타이세이 중학교에 입학하며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학비 문제로 그해 11월 중퇴하고 귀국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는 그의 학구열과 자립심을 더욱 불태웠습니다.

1906

[다시 일본으로, 배움의 여정]

경성에서 학비를 모아 1906년 2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타이세이 중학교에 복학했습니다.

이후 메이지 학원 중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이어갔고, 문일평, 홍명희 등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길렀습니다.

1908

[《검둥의 설움》 한국어 번역]

미국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한국어로 처음 번역하여 《검둥의 설움》이라는 제목으로 신문관을 통해 간행했습니다.

이는 한국 최초의 번역 소설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유학생 문학 활동의 시작]

소년회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창간하여 시, 소설, 논설 등을 발표하며 문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일본 유학 중 안창호의 애국연설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굳혔습니다.

1909

[첫 소설 《사랑인가》 발표]

일본어로 된 소설 《사랑인가》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며칠 뒤 소설 《호 虎》를 연이어 발표하며 문학적 재능을 선보였습니다.

1910

[메이지 학원 졸업과 귀국]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할아버지 위독 소식에 귀국했습니다.

이후 남강 이승훈의 추천으로 정주 오산학교 교원이 되어 김소월 등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애정 없는 첫 결혼]

중매를 통해 1년 연하의 백혜순과 결혼했으나, 애정 없는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이후 그는 자유로운 연애와 이혼의 자유를 주장하며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1911

[오산학교 학감으로 학교를 지키다]

105인 사건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오산학교 학감으로 취임하여 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김기홍 등과 함께 총독부가 불태운 교사를 재건하며 학교를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1913

[오산학교 퇴직과 방랑]

학생들에게 진화론, 니체, 톨스토이 등의 사상을 가르치다 기독교계의 반발과 교장과의 갈등으로 오산학교를 떠났습니다.

이후 만주, 상하이,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1914

[1차 세계대전으로 미국행 좌절]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주필을 맡기로 하고 미국으로 향하던 중, 러시아 치타에서 1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미국행을 단념하고 귀국했습니다.

다시 오산학교 교편을 잡았습니다.

1915

[김성수 후원으로 와세다 유학]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하며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 시기 의학도 허영숙, 미술학도 나혜석과 교류하며 문학적 영감과 애정의 갈등을 겪었습니다.

1917

[한국 최초 근대 장편소설 '무정' 연재]

《매일신보》에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자유 연애와 신교육을 다룬 이 작품은 당대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고, 유림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으며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소설 '무정'은 연재 당시 '부도덕한 작품'이라는 유림과 중장년층의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젊은 세대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특히 단행본으로 출간된 후 1만 부 이상 판매되며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고, 그의 명성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1918

[허영숙과 베이징 애정 도피]

첫 부인 백혜순과 합의 이혼 후, 의사 허영숙과 베이징으로 떠나며 당시 파격적인 '애정 도피'를 감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지만, 그의 자유 연애 사상을 상징하는 일화로 남았습니다.

[독립선언 준비 주도]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소식을 접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했습니다.

이후 2·8 독립선언의 선언문 기초를 주도하며 독립운동의 중요한 불씨를 지폈습니다.

1919

[2·8 독립선언문 기초 및 발표]

도쿄에서 재일본 조선 유학생들과 함께 2·8 독립선언문을 직접 기초하고 발표를 주도했습니다.

이는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의 강력한 민족의식과 문필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공보국장 취임]

3·1 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습니다.

임정 공보국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겸임하며 임시정부의 선전 활동을 총괄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1921

[독립운동 회의와 귀국]

생활고, 폐병 악화, 그리고 임시정부 내 파벌 다툼에 대한 회의감으로 1921년 3월 상하이 독립운동을 접고 귀국했습니다.

귀국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나며 '변절자' 의혹에 휩싸였습니다.

1922

[파란의 《민족개조론》 발표]

잡지 《개벽》에 '우리 민족이 게으르고 나약하며 허위와 술수에 능하다'며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는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며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민족개조론 발표 직후, 이광수의 집에는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하고 개벽사의 기물까지 파괴되는 등 격렬한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그럼에도 이광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이 논설은 실력양성론과 자치운동론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1923

[동아일보 입사, 언론 활동 재개]

김성수, 송진우의 권유로 《동아일보》에 객원논설위원으로 입사하며 언론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이후 사회부 촉탁기자,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며 많은 작품과 논설을 발표했습니다.

1924

[《민족적 경륜》 발표로 물의]

《동아일보》에 '일본의 국법이 허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 산업, 교육의 근대화를 추진하자'는 내용의 사설 《민족적 경륜》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식민지 통치를 사실상 인정하는 '자치 운동론'으로 해석되며 큰 물의를 일으켜, 동아일보 퇴사를 자초했습니다.

1926

[수양동우회 창립 주도]

안창호의 지시에 따라 '인격 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동우회 창립을 주도했습니다.

이는 흥사단의 국내 조직 역할을 하며 민족 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지만,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됩니다.

[경성제대 1호 학생이 되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하며 학번 1번을 받아 경성제대 제1호 학생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학구열과 명성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는 폐병 악화로 1926년 9월 휴학한 뒤 1930년 1월 결국 경성제국대학을 중퇴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제대 1호 학생'이라는 그의 타이틀은 당시 학계에서 그의 입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928

[역사소설 《단종애사》 발표]

장편 역사소설 《단종애사》를 발표하여 《무정》 이후 다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단종을 식민지 백성에, 세조를 총독부에 비유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이 작품은 당시 조선일보 홍명희의 《임꺽정》과 대결하며 문단의 뜨거운 화제가 되었습니다.

1930

[브나로드 운동 주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서 농촌의 문맹률과 낙후된 현실에 충격을 받고, 김성수 등과 함께 '농민 속으로' 들어가는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의 소설 《흙》은 이 운동의 정신을 담아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31

[한국 최초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삼천리》 잡지 주최, 한국 최초의 '미스 코레아' 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는 그의 폭넓은 사회 참여와 당시 대중문화에 대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미의 기준을 제시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민족혼 고취 소설 《이순신》 연재]

이순신 장군 묘역이 경매 위기에 처하자,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하며 민족혼을 고취했습니다.

이순신을 자기희생적인 애국자로 묘사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나, 역사 왜곡 논란도 있었습니다.

1933

['조선 신문계 무솔리니' 조선일보 부사장 취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동시에 5개 직책을 겸임하며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그의 언론계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1937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흥사단의 국내 조직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6개월간 수감되며 고문을 당했고, 이는 그의 인생과 사상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1938

[수감 중 전향 선언]

옥중에서 병세 악화와 고통 속에 수양동우회 사건 예심 중 전향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병보석으로 출감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이후 그의 친일 행적의 시작점으로 평가되며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39

[친일 단체 조선문인협회 회장]

친일 어용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전선 병사 위문 활동을 주도하며 일제의 전쟁 동원에 적극 협력하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40

[가야마 미쓰로로 창씨개명]

《매일신보》에 '창씨와 나'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일본식 이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를 발표하며 창씨개명을 적극 옹호했습니다.

이는 많은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그에게 '이광수'(李狂獸)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창씨개명 선언 이후 이광수의 집 앞에는 돌과 인분, 쓰레기가 던져지고 하루에도 수십 통의 욕설과 협박 편지가 쏟아지는 등 극심한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이 사건으로 이광수와 절교하기도 했습니다.

1943

[최남선과 학병 지원 독려 강연]

최남선과 함께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강연을 했습니다.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내용의 이 강연은 그의 친일 행적 중 가장 비판받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1945

[양주에서 맞이한 광복]

경기 양주군 진접면에서 은둔하며 요양하던 중 광복 소식을 접했습니다.

오랜 식민 통치가 끝났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친일 행적에 대한 비난과 함께 어려운 해방 정국을 맞이했습니다.

1946

[허영숙과의 이혼과 논란]

아내 허영숙과 합의 이혼했습니다.

이혼 사유를 두고 '친일 전범 처벌을 피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위장 이혼'이라는 비판과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선택'이라는 옹호론이 엇갈렸습니다.

이는 해방 정국의 혼란을 반영합니다.

1947

[《백범일지》 윤문 작업 참여]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윤문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도산 안창호의 평전을 집필하며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친일 논란 속에서도 문학적 재능을 활용하여 역사적 기록물 제작에 기여했습니다.

1948

[논란의 자서전 《나의 고백》 출간]

자신의 친일 행적 경위와 역사철학적 맥락을 담은 자서전 《나의 고백》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친일 행위가 '민족 보존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변명하여 또 한 번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49

[반민특위에 구속되다]

친일 행위 혐의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의 셋째 아들이 혈서로 아버지를 대신 수감해달라고 호소하는 등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이광수는 반민특위 조사에서 자신의 친일 행위가 '민족 보존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는 '일본 관헌이 작성한 3만 8천 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에서 자신을 바꾸려 했다'고 항변하며 논란을 더욱 키웠습니다. 결국 고혈압 등의 사유로 약 한 달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1950

[한국 전쟁 중 납북]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서울 효자동 자택에서 인민군에 연행되어 김규식, 안재홍 등과 함께 북한으로 납북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생사는 불분명했으나,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만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다]

납북된 지 약 3개월 만인 1950년 10월 25일, 북한 강계군 만포에서 지병인 폐결핵 악화로 5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오랜 친구 홍명희, 안재홍 등에 의해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한국 근대 문학의 거장이자 복합적인 삶을 산 이광수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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