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로버트슨
농구 선수, 스포츠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15:48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빅 오 오스카 로버트슨. 그는 최초로 시즌 평균 트리플-더블을 달성하며 농구의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코트 밖에서는 선수들의 자유 계약 권리를 보장하는 오스카 로버트슨 규칙을 이끌어내며 선수 권익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 NBA 챔피언 등 화려한 경력은 그의 압도적인 기량을 증명합니다.
1934
1938
[가난 속 농구 열정]
테네시주 샬럿에서 태어나 4살 때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주하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농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습니다.
테니스공으로 슈팅 연습을 하며 형제들과 슬럼가 코트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습니다.
오스카 파머 로버트슨은 1938년 11월 24일 테네시주 샬럿에서 태어났습니다. 4세 때 가족과 함께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주하여 자랐으며, 부모님이 빈곤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테니스공을 이용해 농구를 배우고 형제들과 함께 슬럼가의 코트에서 경기를 개발했습니다.
1955
[고교 주립 타이틀 획득]
크리스퍼스 애턱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만 구성된 팀 최초로 인디애나 주립 농구 타이틀을 거머쥐며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키가 크고 재능 있는 선수로 번영한 로버트슨은 크리스퍼스 애턱스 고등학교에서 대학 팀에 가입했습니다. 1955년 주니어로서 그는 자신의 학교를 인디애나 주립 타이틀로 이끌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팀이 업적을 이루는 데 처음이었습니다.
1956
[고교 2연패 & MVP]
고등학교에서 두 번째 주립 타이틀을 차지하며 62승 1패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고, 그 해 인디애나주 '미스터 바스켓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어진 시즌에 로버트슨과 동료 선수들은 2번째 우승을 거두어 62승 1패를 기록했습니다. 로버트슨은 그해 인디애나주 미스터 바스켓볼로 임명되었습니다.
1959
[팬아메리칸 게임 금]
신시내티 대학교에 입학한 후, 1959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미국 국가대표팀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무대에서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전국적으로 모집된 로버트슨은 신시내티 대학교에서 첫 흑인 선수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학 팀과 자신의 3년의 각해에 득점에서 국가를 이끌어 한 경기에 33.8 포인트의 평균을 기록하고, 전부의 3개 시즌에서 '올해의 선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1959년 팬아메리칸 게임에 참가하여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1960
[올림픽 금메달 획득]
신시내티 대학교 시절 1960년 하계 올림픽 미국 농구팀의 공동 주장으로 활약하며, 훗날의 NBA 라이벌 제리 웨스트와 함께 팀을 이끌어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로버트슨은 NCAA 토너먼트의 파이널 포에서 신시내티 대학교를 2번이나 이끌었습니다. 국내 선수권 대회가 스타 가드를 회피한 동안에 로버트슨은 1960년 하계 올림픽 팀의 공동 주장을 맡아 남자 팀을 금메달 획득으로 이끄는 데 훗날의 NBA 라이벌 제리 웨스트와 팀을 이루었습니다.
[NBA 드래프트 1순위]
신시내티 로열스에 NBA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6피트 5인치의 키로 가드 포지션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였습니다.
동년에 신시내티 로열스는 NBA 드래프트에서 로버트슨을 선발하였습니다. 6 피트, 5 인치의 가드를 위하여 프로 수준에서 그의 출석이 느껴지는 데 약간의 조절이 필요했습니다.
1961
[올해의 신인 & 올스타 MVP]
프로 데뷔 시즌에 올스타 경기 MVP와 '올해의 신인 선수'로 선정되며 한 경기에 평균 30.5점, 리그 최고 기록인 9.7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는 올스타 경기의 MVP로 임명되고, 한 경기에 30.5 포인트와 리그 사상 9.7 어시스트를 평균한 후 '올해의 신인 선수'로 투표되었습니다.
1962
[NBA 최초 트리플-더블 시즌]
리그 역사상 최초로 시즌 평균 트리플-더블(30.8점, 12.5리바운드, 11.4어시스트)을 달성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성취를 다른 어떤 선수도 매치하지 못했습니다.
이어진 해에 로버트슨은 리그 역사상 트리플-더블(포인트 (30.8), 리바운드 (12.5), 어시스트 (11.4))을 평균하는 데 첫 선수가 되었을 때 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적 시즌들 중 하나를 보냈습니다. 이 성취를 아무 선수도 매치하지 못했습니다.
1964
[NBA MVP 선정]
경기당 경력 최고인 31.4점을 평균하며 NBA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10년 동안 무려 7번이나 NBA 어시스트 1위를 차지하는 등 독보적인 플레이메이커로서의 능력을 선보였습니다.
한 경기에 경력 사상 31.4 포인트를 평균한 후, 1964년 MVP로 임명되었으며 10년간의 코스에 7회의 어시스트에서 NBA를 이끌었습니다.
1968
[득점&어시스트 동시 1위]
1967-68 시즌 동안 득점과 어시스트 두 부문에서 동시에 리그 선두를 차지하는 드문 업적을 달성하며 다재다능함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1967년 ~ 68년 시즌 동안 그는 한 경기에 포인트와 어시스트 둘 다에서 리그의 선두를 서는 드문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1970
[밀워키 벅스 이적]
신시내티 로열스에서 챔피언십 달성에 실패하고 팀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젊은 루 앨신더(카림 압둘 자바)가 이끄는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로열스에서 그의 시간 동안 로버트슨은 챔피언십을 달성하지 못했고, 팀과 그의 관계는 나빠졌습니다. 결국 1970년 4월 21일 로버트슨은 후에 카림 압둘 자바로 알려진 젊은 센터 루 앨신더에 의해 고착된 정력적인 팀 밀워키 벅스로 이적되었습니다.
1971
[첫 NBA 챔피언 등극]
밀워키 벅스 이적 후, 카림 압둘 자바와 함께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NBA 결승전에서 볼티모어 불리츠를 4-0으로 압도하며 생애 첫 NBA 챔피언십을 차지했습니다.
드디어 염원하던 우승을 이뤄냈습니다.
벅스를 위하여 로버트슨은 챔피언십 시즌의 건설을 위하여 필요하던 최종의 견본으로 증명되었습니다. 1971년 봄에 벅스는 NBA 결승전에서 볼티모어 불리츠를 휩쓸면서 마술적 한해를 끝냈습니다. 로버트슨은 결국 챔피언이었습니다.
1974
[NBA 선수 생활 은퇴]
밀워키 벅스에서 3시즌을 더 활약한 뒤, 보스턴 셀틱스와의 플레이오프 7차전 패배를 끝으로 14년간의 빛나는 NBA 경력을 마무리하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로버트슨은 벅스를 위하여 3개 더의 시즌을 활약했습니다. 결승전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실망적인 7개 경기의 패배 후, 결국 1974년 자신의 셔츠를 영구적으로 끊었습니다. 한 경기에 25.7 포인트의 경력 평균과 은퇴한 'Big O'는 또한 NBA 역사상 여러 가드보다 더 많은 리바운드를 수집하고, 181개의 트리플-더블과 함께 기록을 세웠습니다.
1976
['오스카 로버트슨 규칙' 탄생]
선수 조합을 이끌며 NBA와 라이벌 ABA 간의 합병에 도전한 소송이 '오스카 로버트슨 규칙'으로 정착되며 NBA 선수들의 자유 계약 권리를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코트를 떠나서 로버트슨은 선수 조합의 가치있는 일원을 증명하여 결국 몇 년간 그 기구를 지휘했습니다. 그의 지시 아래 조합은 드래프트와 선수들에게 소유권들을 관계하는 규칙들은 물론, 1970년 NBA와 라이벌 ABA 사이에 제안된 합동을 도전한 소송을 제출했습니다. 법적인 도전은 결국 1976년에 '오스카 로버트슨 규칙'이 NBA 선수들에게 자유 계약을 가져오면서 정착되었습니다.
1980
[명예의 전당 헌액]
농구 역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그의 다재다능한 플레이는 매직 존슨, 르브론 제임스 등 후대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신의 무적인 만능의 활약과 함께 로버트슨은 다재다능함의 황금 표준을 설립하고, 훗날 체중이 무거운 온볼플레이어들인 매직 존슨과 르브론 제임스를 위한 길을 닦았습니다. 1980년 그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으로 헌액되었습니다.
1991
[어시스트 기록 갱신]
그가 세웠던 9,887개의 통산 어시스트 기록이 '매직 존슨'에 의해 깨졌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분야의 최고 기록을 유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9,887 어시스트는 1991년 매직 존슨에 의하여 깨질 때까지 보유된 다른 기록이었습니다.
1996
[NBA 위대한 50인 선정]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5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며 그의 위상을 다시 한번 공고히 했습니다.
1996년 NBA의 거대한 선수들 50명 중의 하나로 임명되었습니다.
2000
['세기의 선수' 선정]
농구 코치 협회에 의해 '그 세기의 선수(Player of the Century)'로 선정되며 20세기 농구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인정받았습니다.
4년 후, 그는 농구 코치 협회에 의하여 '그 세기의 선수'로 투표되었습니다.
2011
[대학 이미지 소송 참여]
대학 농구 선수로서 자신의 이미지 사용에 대한 집단 소송에 참여하며 은퇴 후에도 선수 권익 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습니다.
자신의 싸우는 영혼이 아직도 완전한 그는 인정받지 않은 대학 농구 선수로서 자신의 이미지 사용에 대해 2011년 집단 소송인 반신용 소송에 가입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