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트 휠릿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스포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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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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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축구의 전설 검은 튤립 뤼트 휠릿. 공격 미드필더 수비 모두 소화하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정석이었습니다. 1987년 발롱도르 수상으로 세계 최고에 등극 AC 밀란 황금 트리오로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국가대표 주장으로 유로 1988 우승을 달성했고 첼시 감독으로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잉글랜드 축구에 한 획을 그은 선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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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축구 영웅의 탄생]

미래 축구계의 전설이 될 뤼트 휠릿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그의 비범한 축구 인생의 첫 장을 열었습니다.

본명은 '뤼디 딜'이었지만, 그는 후에 아버지의 성인 '휠릿'을 사용하며 축구계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수리남인 아버지 헤오르허 휠릿과 네덜란드인 어머니 리아 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길거리 축구를 통해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1970

[유소년 축구 시작]

뤼트 휠릿은 ASV 메이르보이스 유소년팀에 입단하며 체계적인 축구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10살에는 AFC DWS로 소속팀을 옮겼고, 그곳에서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만나 친구이자 동료로 성장했습니다.

DWS에서 뛰면서 어머니의 성 '딜' 대신 아버지의 성 '휠릿'을 유니폼에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가 축구 선수로서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한 중요한 선택이었습니다.

1978

[HFC 하를럼 프로 입단]

오랫동안 휠릿을 지켜본 배리 휴스 감독의 제안을 수락하며 HFC 하를럼과 프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는 '검은 튤립' 뤼트 휠릿의 화려한 프로 축구 커리어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계약을 통해 휠릿은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프로 축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비범한 재능이 만개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979

[에레디비시 최연소 데뷔]

HFC 하를럼 소속으로 MVV 마스트리흐트와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그는 당시 16세 11개월의 나이로, 에레디비시 역사상 역대 최연소 데뷔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이 기록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잠재력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네덜란드 축구계를 넘어 세계 축구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1

[에이르스터 디비시 우승]

HFC 하를럼이 에이르스터 디비시에서 우승하며 에레디비시로 복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휠릿은 이 시즌 에이르스터 디비시의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며 뛰어난 재능을 입증했습니다.

이 우승으로 휠릿은 강등되었던 팀을 다시 1부 리그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의 활약은 구단 역사상 첫 UEFA컵 출전 자격을 획득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배리 휴스 감독은 그를 '네덜란드의 덩컨 에드워즈'라고 극찬했습니다.

[국가대표팀 데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하며 성인 대표팀으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는 그가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대표팀 데뷔는 훗날 네덜란드 축구의 황금기를 이끄는 핵심 선수로 성장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1984

[페예노르트 리그/컵 우승]

페예노르트 소속으로 에레디비시와 KNVB컵을 동시에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페예노르트는 리그와 컵대회 모두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 시즌은 휠릿이 네덜란드 무대에서 지배적인 선수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었으며, 그는 이 해 처음으로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1986

[PSV 에레디비시 우승]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하여 팀의 에레디비시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68경기 출전 46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PSV의 공격을 이끌며 리그를 제패했습니다.

PSV에서의 활약은 휠릿이 네덜란드 리그를 넘어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해 다시 한번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와 '네덜란드 골든슈'를 수상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1987

[AC밀란 이적 및 발롱도르]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인 약 600만 파운드를 기록하며 이탈리아의 명문 AC 밀란으로 이적했습니다.

이적 첫 해, 유럽 최고 선수에게 주어지는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세계 축구의 정점에 섰습니다.

AC 밀란에서 마르코 판 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황금 트리오'를 결성하며 AC 밀란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이 해 '월드 사커 올해의 축구 선수'에도 선정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1988

[유로 1988 우승 주역]

네덜란드 대표팀의 주장으로 UEFA 유로 1988에 참가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는 네덜란드 축구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한 메이저 국제 대회 우승으로, 휠릿은 이 대회의 올스타팀에도 선정되었습니다.

결승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팀의 우승을 견인했습니다. 이 우승은 '토털 풋볼'의 계보를 잇는 네덜란드 축구의 위상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1989

[AC밀란 유러피언컵 우승]

AC 밀란의 핵심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유러피언컵(현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AC 밀란 황금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트로피 중 하나였습니다.

1989년 '월드 사커 올해의 축구 선수'에 다시 한번 선정되었고, '옹즈 드 옹즈'에 포함되며 세계 축구의 아이콘으로서 명성을 공고히 했습니다.

1990

[유러피언컵 2회 우승]

AC 밀란에서 다시 한번 유러피언컵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무대에서 세리에 A 3회, 유러피언컵 2회 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클럽 축구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또한 1990년 UEFA 슈퍼컵과 인터컨티넨탈컵에서도 우승하며 AC 밀란의 국제적인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그의 다재다능함과 리더십은 밀란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94

[삼프도리아 코파 이탈리아 우승]

UC 삼프도리아 소속으로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팀에 큰 기여를 하며 또 하나의 우승컵을 추가했습니다.

AC 밀란에서 삼프도리아로 임대 이적한 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완전 이적하여 한 시즌을 더 보냈습니다.

1996

[첼시 선수 겸 감독 부임]

첼시 FC의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되며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의 네덜란드인 감독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첼시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당시 첼시의 글렌 호들 감독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떠나자, 팬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휠릿이 그 후임으로 낙점되었습니다. 그의 지휘봉 아래 첼시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1997

[첼시 FA컵 우승 이끌다]

감독으로서 첼시의 FA컵 우승을 이끌며 클럽에 26년 만에 주요 대회 우승 트로피를 안겼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주요 축구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비(非)잉글랜드인이자 최초의 흑인 감독이라는 역사를 썼습니다.

이 우승은 첼시 팬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으며, 휠릿은 선수 시절의 명성을 감독으로서도 이어가며 그의 리더십과 전술적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1998

[첼시 감독직 경질]

첼시가 프리미어리그 2위에 랭크되고 컵대회에서도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구단과의 재계약 조건에 대한 이견으로 갑작스럽게 감독직에서 경질되었습니다.

이는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구단은 휠릿이 과도한 급여를 요구했다고 발표했으나, 휠릿은 이를 부인하며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는 첼시에 직접 영입했던 잔루카 비알리가 선임되었습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프리미어리그에서의 지도자 경력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팀의 부진을 씻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첫 시즌에 FA컵 결승에 진출하며 지도력을 보여주었으나, 팀의 고참 선수들과 불화를 겪는 등 내부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1999

[뉴캐슬 감독직 사임]

선덜랜드와의 타인 위어 더비에서 주요 선수들을 벤치에 앉히는 파격적인 선택 후 패배하자, 결국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이는 그의 뉴캐슬 시절을 상징하는 논란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휠릿과 당시 뉴캐슬의 간판 선수였던 앨런 시어러와의 불화가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휠릿은 훗날 이 선택이 옳았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2003

[네덜란드 U-21 감독]

네덜란드 U-21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며, 자국 유소년 축구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며 경험을 쌓았습니다.

2004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했으며, 2004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에서 탈락하며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습니다.

2004

[FIFA 100 선정]

국제 축구 연맹(FIFA) 100주년을 맞아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 포함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중 한 명임을 다시 한번 공인받았습니다.

이 선정은 휠릿의 선수로서의 업적과 세계 축구에 미친 영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전 세계 축구 팬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레전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11

[골든풋 레전드상 수상]

축구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골든풋 레전드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선수로서의 빛나는 업적과 축구 발전에 기여한 그의 영향력을 기리는 상입니다.

모나코에서 개최되는 시상식에서 은퇴한 선수 중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선수에게 주어지는 이 상을 받으며, 축구계의 살아있는 전설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테레크 그로즈니 감독 부임]

러시아 프리미어리그의 테레크 그로즈니 감독으로 임명되며 새로운 해외 무대 도전에 나섰습니다.

그는 축구를 통해 체첸 사람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13경기에서 3승에 그치는 부진한 성적 끝에 6월 14일 경질되었습니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끈기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쉬운 결과를 맞았습니다.

2017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AC 밀란과 삼프도리아에서 보여준 뛰어난 활약과 이탈리아 축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입니다.

그의 선수 시절 압도적인 기량은 이탈리아 세리에 A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였으며, 그의 헌액은 이탈리아 축구팬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네덜란드 대표팀 수석코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로 임명되며 자국 대표팀에 복귀했습니다.

그는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보좌하며 팀의 전력 강화에 힘썼습니다.

2017년 11월 30일, 아드보카트 감독이 물러나면서 휠릿 또한 수석코치직에서 사임했습니다.

2022

[한국 예능 '뭉쳐야 찬다2' 출연]

JTBC의 축구 전문 예능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2'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여 한국 팬들에게 친근한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축구 영웅의 색다른 모습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는 방송에서 한국 아마추어 축구팀과 함께하며 유쾌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 국내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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