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암스트롱
음악가, 재즈, 트럼펫, 스캣, 가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3:35:39
• 미국의 전설적인 재즈 음악가이자 트럼펫 연주자. • 새치모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반세기 넘게 대중의 사랑을 받음. • 독창적인 스캣 창시자로 재즈 보컬의 새 지평을 염. • 재즈를 예술이자 대중음악으로 확장시킨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됨. •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며 비틀즈를 제치는 등 대중적 성공을 거둠.
1901
[불우했던 어린 시절]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빈민가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이 가족을 떠났고, 어머니는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1살에는 학업을 중단해야 했지만, 이웃 유대인 가족 카로노프스키 일가로부터 코넷을 선물받아 독학으로 연주를 익혔습니다.
루이 암스트롱 본인은 1900년 7월 4일 출생이라고 주장했으나, 재즈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실제로는 1901년 8월 4일에 태어났음이 밝혀졌습니다. 어린 시절 석탄과 폐품을 팔며 가계를 도왔고, 또래 아이들을 모아 4중창단을 조직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동전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1913
[소년보호소의 첫 음악 학교]
의붓아버지의 권총으로 위험한 장난을 치다 흑인소년보호소에 입소했습니다.
이곳 소년원에서 브라스 밴드 마스터 피터 데이비스에게 기본적인 음악 교육을 받으며 코넷 연주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경험은 가난과 범죄로 얼룩진 빈민가를 벗어나기 위한 그의 첫 번째 음악학교가 되었습니다.
18개월 동안 소년보호소의 감호를 받았으며, 출감 후에는 뉴올리언스 재즈의 거목 킹 올리버에게 음악을 배웠습니다.
1918
[첫 결혼과 연주 활동 시작]
17세의 나이에 데이지 파커와 첫 결혼을 했으며, 뉴올리언스의 거리와 살롱에서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22
[시카고와 뉴욕 진출]
재즈의 중심지 뉴올리언스 스토리빌이 철거되자 시카고로 이동한 킹 올리버 악단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편곡자 플레처 헨더슨의 권유로 뉴욕에서 연주 활동을 하면서 최고의 코넷·트럼펫 연주자로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이 시기에 악보 읽는 법과 편곡 기법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뉴욕에서는 폴 화이트먼, 듀크 엘링턴을 포함한 모든 밴드 리더들이 그의 음악을 가까이 두고자 할 정도로 인정받았습니다.
1924
1925
[재즈 역사상 불멸의 명반]
시카고에 정착하여 자신이 온전히 통제하는 소규모 밴드인 '핫 파이브'와 '핫 세븐'을 결성했습니다.
이들의 수십 곡 녹음은 미국 재즈 사상 불멸의 명반으로 평가받으며, 암스트롱의 순도 높은 즉흥 연주, 매력적인 보컬, 창의적인 스캣을 통해 재즈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밴드에는 두 번째 아내 릴 하딘 암스트롱을 비롯해 조니 도즈, 키드 오리 등 5~7명의 유동적인 구성원들이 참여했습니다. 레코딩을 통해 보다 진화된 음악적 개념의 재즈 연주를 도입했으며, 리듬, 화성, 솔로, 앙상블의 모든 개념을 새롭게 가져왔습니다. 같은 해 가수로도 데뷔했습니다.
1927
[스캣의 대중화 선구자]
트럼펫 연주자 겸 가수였던 루이 암스트롱은 이후 '스캣'을 널리 보급하며 재즈 즉흥 가창법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이는 뜻이 없는 음절에 선율을 붙여 열정적으로 부르는 방식으로, 서아프리카의 음악 관습을 원조로 합니다.
암스트롱은 트럼펫 솔로의 놀라운 표현력에 곁들여 소박하고 개성적인 노래를 부르는 독특한 연기력과 기교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레퍼토리도 재즈에서 팝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어 재즈 사상의 거인이자 희대의 솔리스트, 재즈 보컬리스트의 제1인자로 평가받습니다.
1932
[유럽 공연과 영화 데뷔]
유럽 순회 공연을 가졌으며, 영국 국왕 앞에서 어전 연주를 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같은 해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A rhapsody in black and blue》에 출연하며 영화 배우에 데뷔했습니다.
1930년대를 중심으로 절정기를 맞았던 그는 스윙 재즈 열풍 속에서 베니 굿먼, 글렌 밀러, 듀크 엘링턴 등과 함께 스윙 재즈의 전도사로 활약했습니다. 마피아 알 카포네와도 친분이 있던 매니저 조 글레이저와 계약하며 공연, 레코딩 외에도 뮤지컬, 영화 배우로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1938
1942
1947
[올스타즈 밴드 결성]
뉴욕 타운 홀 공연의 성공을 계기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6인조 밴드 '루이 암스트롱과 올스타즈'를 결성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미국 전역과 세계를 순회하며 말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얼 하인스, 잭 티가든, 바니 비가드, 드 캐틀릿 등이 참여한 올스타즈는 멤버 교체를 거듭하며 암스트롱의 마지막 활동까지 함께했던 동반자였습니다. 재즈가 비밥과 쿨 재즈 등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블루스와 가스펠, 재즈뿐 아니라 팝, 뮤지컬, 샹송 등 다양한 장르로 음악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1954
[엘라 피츠제럴드와의 협연]
데카와의 장기 계약을 마치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다양한 레코딩에 매진했습니다.
패츠 월러의 곡을 노래한 와 재즈 보컬리스트 엘라 피츠제럴드와의 환상적인 하모니를 자랑하는 는 그의 가장 빛나는 음악적 성과로 평가받습니다.
이 시기 백인 관객들 앞에서 보인 과장된 웃음과 제스처로 인해 후배 재즈 뮤지션과 일부 팬들로부터 "우스꽝스러운 엉클 톰"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에 암스트롱은 1950년대 중반부터 흑인들의 인권 지지와 교육 지원을 위한 기부 활동에 열성을 보였습니다.
1956
[아프리카 뿌리에 대한 자긍심]
아프리카 가나 공화국을 방문하여 “나의 조상은 이곳에서 왔고, 나에게는 여전히 아프리카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통해 자신의 뿌리와 피부색에 대한 깊은 자긍심을 드러냈습니다.
1963
[대한민국 방문 공연]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2주간 공연을 펼쳤습니다.
이는 60세가 넘는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약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의 열정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963년 4월 8일부터 22일까지 한국에 머물렀습니다.
1964
[빌보드 1위, 비틀즈를 넘다]
싱글 가 빌보드 팝 차트에서 비틀즈의 곡을 제치고 전 세계 최초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 곡으로 그래미 어워즈 최우수 남자 보컬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으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60세가 넘는 나이에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것은 전례 없는 성과로, 그의 대중적 영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1967
[불후의 명곡, 왓어원더풀월드]
싱글 앨범 를 발표하여 다시 한번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인했습니다.
이 곡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는 불후의 명곡으로 남아 있습니다.
1971
[마지막 앨범과 무대]
자신의 마지막 음반인 를 발표하고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약 반세기에 걸친 그의 왕성한 음악 활동의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재즈 황제의 죽음]
뉴욕 롱아일랜드 자택에서 수면 도중 심장마비로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랜 기간 폐질환과 심근 경색 등으로 고통받았지만, 은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활동하며 대중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사망 원인은 심근 경색과 폐암 등의 합병증으로 알려졌습니다. 그의 죽음을 접한 소련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는 "천사 가브리엘이여. 루이 암스트롱에게 트럼펫을 내려주세요"라는 시를 헌화하며 애도했습니다.
1972
[그래미 공로상 수상]
그래미 어워즈에서 루이 암스트롱에게 공로상을 수여하며 그의 빛나는 음악적 유산에 대한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2000
[루이 암스트롱 기념관 개관]
뉴욕에 루이 암스트롱 기념관이 개관했습니다.
그의 생전에 남겨둔 미공개 녹음의 보존을 위해 힐러리 여사와 연방 정부가 지원금을 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