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 홀리

가수, 작곡가, 로큰롤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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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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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작곡가, 로큰롤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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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음악의 중심이자 선구자적인 인물로 짧지만 강렬한 음악 인생을 펼쳤습니다. 특유의 딸꾹질 창법과 혁신적인 기타 연주로 비틀즈 밥 딜런 등 수많은 후대 아티스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 이 비극적인 날은 음악이 죽은 날로 불리며 로큰롤 역사의 전설로 기억됩니다. 직접 곡을 쓰고 녹음하며 로큰롤 밴드의 전통적인 구성을 확립한 진정한 아티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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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로큰롤 전설의 탄생]

미국 텍사스주 러벅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공황 시기에 음악적 재능이 있는 가족 속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기타와 노래를 접했습니다.

찰스 하딘 홀리라는 본명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친구(buddy)'라는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가족 대다수가 음악에 조예가 깊어 자연스럽게 음악적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11세에 피아노 수업을 그만두고 기타로 관심을 돌렸으며, 형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952

[작은 도시의 큰 꿈]

러벅의 현지 텔레비전에 처음 출연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친구 밥 몽고메리와 '버디 앤드 밥' 그룹을 결성하며 본격적인 음악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친구 밥 몽고메리와 듀오 '버디 앤 잭'으로 활동하다가 잭 닐이 탈퇴한 후 밥 몽고메리가 합류하여 '버디 앤 밥'이 되었습니다. KDAV 라디오 프로그램 '선데이 파티'에서 공연하며 러벅 시내 곳곳에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컨트리 음악에 리듬 앤 블루스 요소를 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1955

[운명적인 만남, 전환점]

엘비스 프레슬리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며 깊은 영감을 받아 음악인의 길을 굳게 결심합니다.

이 만남 이후 그의 음악은 컨트리에서 로큰롤로 완전히 전향하게 됩니다.

러벅에서 열린 엘비스 프레슬리 공연의 오프닝을 맡았으며, 이후 4월과 6월 공연에서도 오프닝을 담당했습니다. 이 시기 래리 웰본(스탠드업 베이스)과 제리 앨리슨(드럼)과 함께 밴드를 꾸려 로큰롤 음악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저 음반사 입성]

빌 헤일리 & 히즈 코메츠의 오프닝 공연 중 내슈빌의 스카우터 에디 크랜달에게 발탁되어,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맺게 됩니다.

계약 과정에서 성 'Holley'가 'Holly'로 잘못 기재되어 '버디 홀리'라는 예명이 됩니다.

KDAV의 패피 데이브 스톤이 주선한 빌 헤일리 & 히즈 코메츠 공연에서 홀리는 크랜달의 눈에 띄었습니다. 크랜달의 제안으로 그랜드 올 오프리의 매니저 지 데니를 통해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1957

[자유를 찾아서, 크리케츠 탄생]

데카 레코드에서의 작업 방식에 불만을 느끼던 중, 프로듀서 노먼 페티를 만나 'That'll Be the Day' 데모를 제작합니다.

이 곡을 브룬스윅 레코드에 보내면서 자신의 밴드 이름을 '더 크리케츠'로 정하고 활동을 시작합니다.

데카 레코드에서 창작권 제약에 불만을 느낀 홀리는 노먼 페티의 녹음실에서 'That'll Be the Day'를 재녹음했습니다. 페티는 홀리 밴드의 매니저를 맡아 이 데모를 브룬스윅 레코드에 보냈습니다. 홀리는 데카와의 계약 문제로 인해 밴드 멤버 제리 앨리슨이 제안한 '크리케츠(Crickets)'를 밴드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룬스윅이 사실 데카의 자회사였던 탓에 홀리는 결과적으로 이중계약을 맺은 셈이 되었습니다.

[차트 정복의 시작: That'll Be the Day]

'더 크리케츠' 명의로 발매된 싱글 'That'll Be the Day'가 미국과 영국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둡니다.

이는 버디 홀리의 음악 커리어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음반사는 데모에 깊은 인상을 받아 재녹음 없이 그대로 발매했습니다. 이 곡은 R&B 차트에 진입하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뉴욕 아폴로 극장에서의 공연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9월 23일에는 미국 '베스트셀러 인 스토어'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영국 싱글 차트에서는 11월 3주간 1위를 유지했습니다.

[꼬리를 문 히트곡: Peggy Sue]

'Peggy Sue'가 발매되어 빌보드 팝 차트 3위, R&B 차트 2위, 영국 싱글 차트 6위라는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이 곡의 성공으로 버디 홀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코랄 레코드에서 발매된 이 싱글에서는 홀리가 '녹음자(performer)'로 기록되었습니다. 'Peggy Sue'의 성공으로 '더 크리케츠'라는 밴드명조차 '버디 홀리 앤 더 크리케츠'로 변용될 정도로 홀리 개인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습니다.

[데뷔 앨범과 방송 출연]

정규 앨범 《The "Chirping" Crickets》가 발매되어 영국 앨범 차트 5위를 기록했습니다.

12월 1일에는 인기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여 히트곡을 선보이며 대중적 인기를 확고히 했습니다.

이 앨범은 크리케츠 명의로 발매되었습니다. 《에드 설리번 쇼》 출연 직후, 고된 투어 활동을 이유로 리듬 기타리스트 니키 실리번이 크리케츠를 탈퇴했습니다. 12월 29일에는 《아서 머레이 파티》에서도 'Peggy Sue'를 공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58

[전 세계를 흔들다]

'미국 제일의 청소년 앨범스타' 투어에 참여한 후, 하와이를 거쳐 호주와 영국에서 연이은 투어를 시작하며 전 세계 팬들을 만났습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25일간 50회 공연이라는 강행군을 펼쳤습니다.

1월 8일부터 '미국 제일의 청소년 앨범스타' 투어 기획에 참여했으며, 1월 26일 《에드 설리번 쇼》에 두 번째 출연하여 'Oh, Boy!'를 공연했습니다. 다음 날 하와이 호놀룰루 공연을 위해 비행기를 탔고, 이후 일주일간의 호주 투어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맹활약했습니다.

[버디 홀리 솔로 활동 시작]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솔로 앨범 《Buddy Holly》가 발표되었습니다.

같은 해 4월에는 데카 시절 녹음했던 곡들을 담은 앨범 《That'll Be the Day》도 발표되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앨런 프리드의 '빅 비트 쇼' 투어에 41일 동안 참여했습니다. 5월에는 클로비스에서 새로운 녹음 세션을 진행하며 리드 기타리스트로 토미 올섭을 채용했고, 'It's So Easy', 'Heartbeat' 등을 녹음했습니다. 6월에는 뉴욕에서 크리케츠 멤버 없이 재즈/R&B 악단과 함께 솔로 녹음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깜짝 결혼과 갈등의 서막]

피어사우스 사무실에서 만난 마리아 엘레나 산티아고에게 첫 만남부터 데이트를 신청하고 곧바로 청혼하여 결혼했습니다.

매니저 페티는 여성 팬들을 위해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치라고 했고, 이는 홀리와 페티의 갈등의 시작이 됩니다.

홀리는 뉴욕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 엘레나 산티아고를 만나 첫눈에 반해 청혼했습니다. 페티는 이 결혼을 못마땅해하며 비밀에 부칠 것을 요구했고, 홀리는 이에 반발하며 페티의 공연 섭외 방식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크리케츠 멤버들도 홀리가 밴드 수익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이별]

마침내 홀리는 프로듀서 노먼 페티와의 계약을 해소하고, 페티를 계속 매니저로 삼으려던 크리케츠 멤버들과도 결별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홀리는 새로운 밴드를 꾸려 투어를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내 산티아고와 그녀의 이모로부터 페티가 크리케츠의 저작료를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홀리는 페티를 해임하고 저작료를 회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뉴욕으로 이주한 홀리는 그리니치 빌리지 아파트에서 통기타로 'Crying, Waiting, Hoping' 등 여러 자작곡을 녹음하며 음악적 영감을 발산했습니다. 10월에는 18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 'It Doesn't Matter Anymore', 'Raining in My Heart' 등 명곡을 녹음했습니다. 이 시기 러벅의 DJ 웨일런 제닝스의 프로듀싱을 맡기도 했습니다.

1959

[마지막 투어의 시작]

웨일런 제닝스, 토미 올섭 등과 함께 새로운 밴드를 꾸려 '윈터 댄스 파티' 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 투어는 넓은 이동 거리와 겨울철 버스 고장 등으로 멤버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58년 12월 고향 러벅에서 웨일런 제닝스, 토미 올섭, 칼 번치 등을 불러 모아 새로운 밴드를 조직했습니다. 투어용 버스가 겨울철 엄동설한에 두 번이나 고장 나 드러머 칼 번치가 동상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등 고충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홀리는 다음 공연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비행기 대절을 결정하게 됩니다.

[음악이 죽은 날]

아이오와주 클리어 레이크 공연 후 다음 공연장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대절했으나, 이륙 직후 비행기가 옥수수밭에 추락하며 버디 홀리, 리치 밸런스, 더 빅 보퍼, 조종사 로저 피터슨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날은 후일 '음악이 죽은 날'로 불리며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클리어 레이크 서프 볼룸에서의 공연을 마친 후, 아이오와주 메이슨 시티의 항공사에서 4인승 비행기 비치크래프트 보난자를 대여했습니다. 동승하기로 했던 웨일런 제닝스와 토미 올섭은 각각 J. P. 리처드슨과 리치 밸런스에게 좌석을 양보했습니다. 조종사 로저 피터슨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계기비행 자격 없이 비행을 강행했습니다. 비행기는 오전 12시 55분경 옥수수밭에 곤두박질쳤고, 탑승자 전원이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영원한 안식]

고향 러벅의 태버내클 침례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본래 성(Holley)이 새겨져 있으며, 그가 사용하던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가 묘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아내 엘레나는 텔레비전을 통해 홀리의 죽음을 접했고, 충격으로 유산을 겪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홀리의 모친 역시 라디오 소식을 듣고 혼절했습니다. 엘레나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평생 홀리의 묘소조차 방문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웨일런 제닝스는 '윈터 댄스' 투어를 계속해야 했기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1986

[불멸의 로큰롤 전설]

로큰롤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로큰롤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또한 유명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인'에서 13위에 랭크되며 그의 위대한 업적과 영향력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습니다.

버디 홀리는 로큰롤의 전통적인 밴드 구성을 정립한 음악인으로 평가받으며, 밥 딜런, 비틀즈, 롤링 스톤스 등 후대의 수많은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2023년에는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인 200인' 중 174위에 이름을 올리며 그의 음악적 유산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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