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싱어송라이터, 화가, 작가, 문화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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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3: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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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싱어송라이터, 화가, 작가, 문화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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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넘게 활동하며 대중문화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한 음악가. 포크 블루스 록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음악의 지평을 확장. 뛰어난 작곡·작사 능력으로 세대의 목소리이자 문학적 깊이를 더한 시인. 음악 예술 문학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침. 노벨 문학상 퓰리처상 등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을 다수 수상한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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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음악 거장의 탄생]

미국 미네소타주 덜루스에서 로버트 앨런 지머맨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으며, 히빙에서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당시 가톨릭 신자 다수 마을에서 유대인은 소수였기에, 삼촌 소유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탈출구를 찾았고, 반항아 제임스 딘을 동경했습니다.

이후 음악적 재능을 발견해 피아노와 기타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1959

[예술가의 길을 택하다]

미네소타 대학교 문학 전공으로 입학했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자퇴했습니다.

우디 거스리, 로버트 존슨, 행크 윌리엄스의 포크, 블루스, 컨트리 음악에 심취하며 거리에서 자신의 음악을 노래하는 청춘을 선택했습니다.

평소 동경하던 시인 딜런 토마스의 이름을 차용해 '밥 딜런'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61

[뉴욕에서 영웅을 만나다]

미네소타를 떠나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가 숭배하던 영웅 우디 거스리가 신경퇴보증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수십 개의 침상이 나란히 놓인 방에서 무기력한 거스리를 기타 연주와 노래로 위로하며 떨리는 손으로 친필 서명을 받았습니다.

1962

[데뷔, 그리고 새로운 만남]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수많은 클럽과 카페에서 흑인 델타 블루스, 우디 거스리 등 고전 포크 계열의 노래와 자작곡을 부르며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 유명 음반 제작가 존 하몬드의 눈에 띄어 컬럼비아 레코드를 통해 데뷔 음반 《Bob Dylan》을 발표했습니다.

이 앨범은 판매 부진을 겪었지만, 훗날 록계를 풍미할 거물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만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1963

[세대의 목소리로 우뚝 서다]

미대 지망생 수즈 로토로와의 이별의 아픔 속에서 미친 듯 곡을 써 내려갔습니다.

이 시기 탄생한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Blowin' in the Wind〉 등이 수록된 두 번째 음반 《The Freewheelin' Bob Dylan》이 발표되었습니다.

특히 〈Blowin' in the Wind〉는 피터, 폴 앤 메리가 불러 빌보드 차트 2위에 오르며 그를 하루아침에 스타로 만들었습니다.

이 곡은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그를 '세대의 목소리'로 칭해지게 했습니다.

1965

[파격적 음악 변신: 포크 록]

자신이 의도치 않았던 '저항 가수'로서의 굴레에 언론과 마찰을 빚던 딜런은 비틀즈의 일렉트릭 사운드에 자극받아 정통 어쿠스틱 포크에서 일렉트릭 사운드로의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록 밴드와 함께 일렉트릭 사운드를 선보여 수많은 대중과 포크 팬들의 야유와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자신의 음악적 전환을 확고히 이어가며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음악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이 시기에 《Bringing It All Back Home》, 《Highway 61 Revisited》, 《Blonde On Blonde》 등의 명반들을 발표했습니다.

[사라 라운즈와 결혼]

활발한 음악 활동 중 25세의 전직 모델 사라 라운즈와 극비리에 혼인식을 치렀습니다.

이듬해에는 호주와 유럽을 중심으로 투어를 시작하며 새로운 백업 밴드인 더 혹스(더 밴드의 전신)와 함께 공연했습니다.

1966

[모터사이클 사고와 은둔]

투어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와 자택 근처 도로에서 모터사이클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사고는 그가 뮤직 비즈니스계에서 도피하려는 의도로 자의에 의해 과장된 부분이 크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1974년까지 콘서트 활동을 일체 중단하고 우드스탁에 집을 짓고 아이들을 키우며 은둔자와도 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 시기, 같은 곳에 정착한 더 밴드의 멤버들과 교류하며 루츠 록 장르의 즉흥 세션으로 마스터 테이프를 녹음했습니다.

1971

[방글라데시 자선 공연 참여]

친구이자 비틀즈의 전 멤버인 조지 해리슨이 주최한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에서 공연하며 오랜 은둔 생활을 깨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같은 시기 오랜만의 정규 음반 《Planet Waves》가 전미 음반 차트 넘버원에 랭크되며 다시금 예전의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1975

[이혼과 명반의 탄생]

당시 이혼 직전 상태에 있던 사라 딜런과의 불화와 이혼을 겪으며 새 음반 《Blood On The Tracks》를 발표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살인범으로 수감되어 있던 흑인 프로 복서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석방을 기원하며 만든 노래 《Hurricane》이 수록된 음반 《Desire》를 발표하며 오랜만의 히트 싱글을 기록했습니다.

1976

[대규모 투어 '롤링 썬더 리뷰']

앨범 《Desire》의 성공 여세를 몰아 새로운 라이브 투어 '롤링 썬더 리뷰'를 시작했습니다.

이 투어는 로저 맥귄, 존 바에즈, 조니 미첼 등 쟁쟁한 아티스트가 게스트로 대거 출연한 하나의 거대한 쇼였습니다.

딜런은 훌륭한 라이브 퍼포먼스로 호평을 얻었지만, 투어는 후반기로 접어들수록 약물 사용과 아내 사라와의 이혼 문제로 인해 점차 활력을 잃어갔습니다.

1978

[재정 위기, 월드 투어 돌파]

사라 딜런과의 이혼 소송과 앨버트 그로스만과의 법정 투쟁으로 인해 엄청난 변호사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로열티 수익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유일한 해결책으로 대대적인 월드 투어에 나서며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1979

[종교적 변모와 가스펠 음악]

1970년대 말부터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원리주의에 깊이 빠져 가스펠을 노래하는 변화를 기록한 앨범 《Slow Train Coming》을 발표했습니다.

이 음반에 수록된 곡으로 그래미 최우수 남성 록 보컬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이후 《Saved》, 《Shot of Love》 등 가스펠 음반을 연이어 발표하며 전도사로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1982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

그의 음악적 업적을 인정받아 198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이어 1988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선정되며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거장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1985

[세상을 바꾼 노래에 동참]

마이클 잭슨이 주도한 역사적인 자선 프로젝트 《We Are The World》에 참여하며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이는 1980년대 밥 딜런이 대중에게 남긴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1988

[슈퍼그룹 '트래블링 윌버리스' 결성]

조지 해리슨, 로이 오비슨, 제프 린, 톰 페티와 함께 '트래블링 윌버리스'를 결성했습니다.

이 슈퍼그룹은 음반 《Traveling Wilburys Vol.

2》를 발표하며 아이디어 고갈로 고민하던 그에게 새로운 음악적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이 시기 마크 노플러, 톰 페티 앤 더 핫브레이커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E 스트리트 밴드 등 수많은 실력파 뮤지션들과 협업하며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이어갔습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그의 음악적 업적을 인정받아 198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이어 1988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선정되며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거장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1989

['네버 엔딩 투어'의 시작]

두 번째 아내와의 이혼 문제와 음악적 영감 부족으로 고민하던 시기, '네버 엔딩 투어'(Never Ending Tour)라 명명된 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에게 일종의 도피의 장이 되었으며, 이후 연간 100회에 가까운 속도로 꾸준히 공연 일정을 소화하며 전 세계 팬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같은 해 발표된 음반 《Oh Mercy》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지만 판매고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1997

[첫 그래미상 수상과 재기]

《Oh Mercy》 이후 7년 만에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와 협력하여 정규 음반 《Time Out of Mind》를 발표했습니다.

블루스 색채가 짙은 포크 록 스타일의 악곡과 심오한 노랫말, 그리고 다니엘 라노아의 독특한 프로듀싱이 결합되어 따스하면서도 예리한 딜런 특유의 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음반으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록 음악계의 정점에 다시 우뚝 섰습니다.

1999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리며, 그의 문화적 영향력을 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습니다.

2000

[폴라음악상, 아카데미상 수상]

스웨덴 왕립음악원에서 주관하는 권위 있는 폴라음악상의 주인공이 되었고, 같은 해 영화 《원더 보이스》에 수록된 그의 노래 'Things Have Changed'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하며 음악적 역량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2004

[회고록, 베스트셀러 등극]

그의 회고록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자서전》(Chronicles: Volume One)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뉴욕 타임스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목록에 19주간 머물며 작가로서의 성공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2008

[퓰리처상 특별 표창]

퓰리처상 심사위원들로부터 '그의 가사 작품의 비범한 시적 힘이 아로새긴 대중음악 및 미국 문화에서의 깊은 영향'을 인정받아 특별 표창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음악적, 문학적 가치를 다시 한번 높이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9

[빌보드 차트 1위 기록]

그의 33번째 정규 음반 《Together Through Life》가 발매되었습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와 '가장 많이 팔린 200개의 음반'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올랐으며, UK 음반 차트에서도 발매된 지 1주 만에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2010

[역사적인 첫 내한 공연]

데뷔한지 무려 48년 만에 대한민국을 찾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첫 내한 공연을 가졌습니다.

오랜 시간 그의 음악을 기다려온 한국 팬들에게 뜻깊은 순간을 선사했습니다.

2012

[최고의 명예, 자유 훈장 수훈]

당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로부터 미국 최고 민간인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음악과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국가적인 찬사를 의미했습니다.

2016

[세계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

'위대한 미국의 전통 노래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한' 공로로 대중 가수로는 세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스웨덴 학술원 사라 다니우스 사무총장은 그를 '귀를 위한 시를 쓰는 위대한 시인'이라 평하며, 호메로스, 사포와 같이 그의 시가 앞으로도 읽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문학계와 음악계의 경계를 허무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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