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음악가, 팝의 황제, 싱어송라이터, 댄서, 프로듀서,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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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20세기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압도적인 음악가였습니다. 기네스 세계 기록이 인정한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아티스트”이자 “가장 성공한 음악가”로 앨범 《Thriller》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등재된 세계적 기록입니다. 음악 춤 패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시대를 초월한 아이콘이었지만 사생활 논란과 법적 문제로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연관 연혁
주요사건만
최신순

1958

[마이클 잭슨 탄생]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의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9남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엄격한 훈련과 학대에 대한 고통을 겪었지만, 이는 그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했다.

1963

[잭슨 브라더스 합류]

아버지에 의해 형제들이 결성한 '잭슨 브라더스' 밴드에 합류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65

[잭슨 파이브 결성 및 우승]

형 저메인과 함께 리드 보컬을 맡으며 밴드 이름을 '잭슨 파이브'로 바꾸었다.

같은 해 메이저 지역 탤런트 쇼에서 제임스 브라운의 곡으로 우승하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1967

[아폴로 극장 공연]

잭슨 파이브는 클럽, 강당 등 다양한 곳에서 공연하며 경험을 쌓았고, 8월 할렘의 아폴로 극장에서 아마추어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1969

[모타운 계약 및 성공]

지역 레코드사에서 활동 후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며 전문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롤링 스톤》은 마이클을 '신동'으로, 잭슨 파이브를 '흑인 비틀즈'로 칭하며 극찬했다.

첫 4장의 싱글이 모두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를 기록하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밴드로 평가받는다.

최초 발매 싱글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가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하며 '가장 발전한 크로스오버 흑인 음악가의 본보기'로 불렸다.

1972

[솔로 앨범 발매 및 성공]

'Got to Be There', 'Ben', 'Music&me', 'Forever Michael' 등 네 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특히 'Ben' 앨범의 싱글 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그의 유년 시절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1973

[모타운과의 갈등 시작]

잭슨 파이브는 모타운 사운드에 대한 불만과 작사/작곡의 자유를 요구하며 모타운과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밴드의 인기도 점차 감소했다.

1975

[에픽 레코드 이적]

모타운과의 갈등 끝에 잭슨 파이브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인 에픽 레코드와 계약하며 밴드 이름을 '더 잭슨스(The Jacksons)'로 바꾸었다.

1976

[더 잭슨스 첫 앨범 발매]

에픽 레코드에서 첫 앨범 'The Jacksons'를 발매, 미국에서 53만 장이 판매되었다.

마이클은 이 앨범에서 'Blues Away'를 단독 작사/작곡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넓혔다.

1978

[프로듀싱 참여 및 퀸시 존스 만남]

'Destiny' 앨범에서 작사/작곡 및 프로듀싱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는 빌보드 7위를 기록했다.

'Triumph' 앨범에서도 다수의 곡에 참여하며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또한 영화 '마법사' 출연 중 음악 감독 퀸시 존스를 만나 다음 솔로 앨범 작업을 약속했다.

퀸시 존스는 마이클의 뛰어난 재능에 놀라며 그의 작업 태도를 극찬했다. 마이클이 두 곡의 리드 보컬과 세 곡의 백 보컬 부분을 단 하루 만에 해냈다고 회고했다.

1979

[Off the Wall 앨범 발매]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성인 솔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앨범 《Off the Wall》을 발매했다.

빌보드 200에서 3위를 기록했고 세계적으로 2천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와 'Rock with You'가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했으며, 총 4장의 싱글이 10위권에 진입했다. 앨범은 평론가들로부터 세련된 디스코로 호평받았고, 2003년 롤링 스톤 선정 위대한 앨범 500위 중 68위, 2008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80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수상]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3관왕을 차지했으며, 빌보드 연간 차트에서 '탑 블랙 아티스트'와 '탑 블랙 앨범상'을 수상했다.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Don't Stop 'Til You Get Enough'로 '최우수 남자 알앤비 보컬 퍼포먼스' 상을 받았으나, 마이클은 앨범의 성공에 비해 적은 수상에 크게 실망하며 다음 앨범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당시 음악 업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인 음반 도매 수익의 37%를 받았다.

1982

[Thriller 앨범 발매]

인종과 장르 구분을 넘어선 정규 앨범 《Thriller》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6천6백만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세계 최초, 최고 기록을 세웠다.

빌보드 200에서 37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앨범의 7개 싱글 모두 빌보드 핫 100 10위권 안에 들었으며, 'Billie Jean'과 'Beat It'이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비틀즈 이후 1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국립 음반 기록소'에 등재되었고, 2008년 그래미 어워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Thriller》는 MTV의 인종차별적 방송 장벽을 허물고, 당시 불황이던 음반 시장을 구원하는 등 음악 산업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1983

[문워크 첫 공개 및 펩시 계약]

모타운 레코드 25주년 공연에서 'Billie Jean' 댄스와 함께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문워크'를 대중 앞에서 최초로 선보였다. 이 공연은 지난 50년간 미국인들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순간 7위에 뽑혔다.

11월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직비디오 중 하나인 14분짜리 대작 'Thriller'를 공개했고, 이는 미국 국회 산하 Library of Congress National Registry에 보관된 유일한 뮤직비디오다.

펩시콜라와 5백만 달러의 기록적인 광고 계약을 체결했다.

1984

[Victory Tour 개최]

형제들과 함께 'Victory Tour'를 개최했으나, 사행성 티켓 판매 방식으로 비판을 받자 기자회견을 열어 판매 방식 변경 및 약 3백만-5백만 달러의 공연 수익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형제들과의 공연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펩시 CF 화상 사고 및 기부]

펩시콜라 CF 촬영 중 2도 이상의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펩시로부터 받은 합의금 150만 달러 전액을 화상 치료센터에 기부하며 선행을 베풀었다.

[그래미 어워드 8관왕]

그래미 어워드에서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8개의 상을 휩쓸며 '최다 부문 후보, 최다 수상'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잭슨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백악관 감사 표창]

낸시 레이건 영부인의 반마약 운동 'Just say no' 캠페인에 자신의 히트곡 'Beat it'을 사용하도록 허락한 공로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초청받아 백악관에서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와 상을 받았다.

1985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

아프리카 기아들을 돕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 'We Are The World'에 라이오넬 리치와 공동으로 작사/작곡하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곡은 싱글로 1천4백만 장 이상 판매되어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다.

[ATV 출판사 구매]

폴 매카트니의 조언을 받아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 카탈로그 등 4천여 곡의 저작권을 소유한 ATV 출판사를 4천7백5십만 달러에 구매하며 음악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1986

[산소 체임버 자작극]

노화 방지를 위해 고압 산소 체임버에서 잔다는 언론 보도를 직접 조작하여 퍼뜨렸다.

이는 언론을 통제하고 자신을 현실과 분리시키려는 의도였으나, 타블로이드 언론은 'Wacko Jacko'(괴짜 잭슨)라는 별명을 붙이며 그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시작했다.

이 별명을 잭슨은 매우 싫어했다.

과거에도 타블로이드 언론이 마이클 잭슨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성전환 수술, 동성 결혼 등)을 퍼뜨려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마이클은 오랜 기간 언론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피부색 변화(백반증) 또한 언론에 의해 '백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식으로 왜곡 보도되며 괴롭힘을 당했다.

1987

[Bad 앨범 발매]

정규 앨범 《Bad》를 발매했다.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이 앨범에서 5개의 싱글이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하며 '하나의 앨범에서 가장 많은 빌보드 1위 곡'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총 판매량 3천2백만 장 이상으로 역사상 10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전작 《Thriller》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평론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발매 5개월 만에 1천1백만 장이 팔려 1987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마이클은 댄스, 발라드, 록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했다.

[Bad Tour 시작]

첫 솔로 투어인 'Bad Tour'를 일본에서 시작하여 총 123회 공연으로 4백4십만 명을 동원하며 가장 성공적인 투어 중 하나로 기록됐다.

영국 웸블리 구장에서 7회 연속 매진이라는 신기록을 세웠고, 관객들이 기절하거나 부상당하는 등 안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암표 논란으로 암표상이 체포되는 사건도 있었다.

1988

[자서전 출판 및 네버랜드]

첫 자서전 'Moonwalk'를 출판, 2백만 권 이상 판매되며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3월에는 17억 원을 들여 약 3백3십만 평에 달하는 자신의 집 '네버랜드'를 건립, 놀이동산, 동물원, 영화관 등을 설치했다.

또한 소련의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한 최초의 서방 연예인이 되었다.

1989

[King of Pop 등극]

친한 친구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소울 트레인 시상식에서 마이클을 'King Of Pop Rock Soul'이라고 칭한 것이 대중화되어 'King Of Pop'(팝의 황제)이라는 별명이 확고해졌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게 백악관으로 초청받아 '세기의 아티스트상'을 수여받았다.

1990

[기록적 로열티 및 자선]

당시 슈퍼스타 평균 로열티의 3배가 넘는 41%의 로열티를 지급받으며 최고 수준의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Sammy Davis Jr.'s 생일 기념 공연에 참가했고, 'Man in the mirror' 수익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등 지속적인 선행을 펼쳤다.

1991

[소니와 기록적 재계약]

소니와 6천5백만 달러에 재계약을 체결하며 기존 닐 다이아몬드의 기록을 경신하는 역대 최고액 계약을 성사시켰다.

[Dangerous 앨범 발매]

새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와 작업한 정규 앨범 《Dangerous》를 발매했다.

3천만 장 이상 판매되어 역사상 16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영국에서는 발매 첫 주 가장 빨리 팔린 앨범이기도 하다.

인종 화합 메시지를 담은 첫 싱글 'Black Or White'는 7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27개국 동시 방송으로 5억 명 이상이 시청하는 역대급 기록을 세웠다.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후반부 성적/폭력적인 장면으로 논란이 되었으나, 얼굴이 바뀌는 '모핑 기법' 등 획기적인 시각 효과로 주목받았다. 'Remember the time' 뮤직비디오는 가루에서 사람이 변하는 시각 효과를, 'In The Closet'은 성적으로 도발적인 장면을 선보였다.

1992

[자선단체 설립 및 세계 투어]

《Dangerous》는 전 세계에서 1992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조사됐다.

싱글 'Black Or White'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세계적인 올해의 싱글 베스트셀러'를 수상했다.

'Heal The World Foundation'이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하여 기부, 전쟁 피해 지역 지원, 불치병 치료 등을 목적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부시 대통령에게 이러한 선행을 인정받아 백악관에서 상을 받았다.

[Dangerous World Tour 시작]

'Dangerous World Tour'를 시작, 동구권 국가에서도 공연을 펼치며 서방 국가가 수십 년간 이루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 70회 공연으로 3백5십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연은 HBO에서 2천만 달러에 구매 방영되어 미국 케이블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 중 하나를 기록했다.

러시아 라디오 PD는 잭슨의 모스크바 공연이 러시아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루마니아 공연에서는 7만 명의 관중이 몰려 비명을 지르고 실신하는 등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흘간 국빈 대접을 받았으며, 대통령이 직접 고아원 방문을 안내할 정도였다. 1992년 2월 가봉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코르디부아르에서는 추장에 의해 'King'으로 선포되었다.

1993

[살아있는 전설상 수상]

로스앤젤레스에서 35세의 나이로 그래미 어워드 '살아있는 전설상'을 수상했다.

[1차 성추행 혐의 논란]

13세 남자아이 성추행 혐의로 민사소송을 당하며 마이클의 상업적 매력과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었다.

펩시는 후원 관계를 종료했으며, 팬들은 펩시 보이콧으로 항의했다.

이반 챈들러가 아들을 이용해 2천만 달러 합의금을 요구했으며, 마이클은 이를 거절했다.

이반 챈들러의 아들 조단은 처음에는 잭슨을 따랐으나, 이반이 최면 진정제를 사용하여 거짓 기억을 심는 과정이 있었다. 이반은 "일이 잘 되면 나는 대박일거야.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마이클 잭슨은 영원히 파괴될 것"이라고 말한 녹음이 공개되기도 했다.

[슈퍼볼 하프타임쇼 공연]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미식축구 슈퍼볼 하프타임쇼에 나와 공연을 선보였다.

그의 공연으로 시청률이 전년 대비 8.6% 상승했으며, 이후 하프타임쇼에 유명 가수들이 출연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오프라 윈프리 쇼 출연]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가졌다.

전 세계 9천만 명, 미국 6천만 명이 시청했으며, 시청률 47.9%로 미국 역사상 가장 시청률 높았던 TV 토크쇼 역대 1위를 기록했다.

[몸수색 및 증거 불일치]

검찰에게 몸수색을 당하고 성기 사진을 찍었으나, 조단 챈들러의 증언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로이터 통신과 USA투데이가 보도했다.

마이클은 결백을 주장했으나, 변호사들의 권유로 1천5백만 달러에 민사소송을 합의했다.

합의 내용은 혐의 인정이 아니었다.

1994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대중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일각에서는 마이클이 이미지 회복을 위해 그녀를 이용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둘은 뮤직비디오와 시상식에 동행하며 반박했다.

[형사 수사 불기소]

증거 부족으로 형사 수사가 불기소 처분으로 종결되었다.

2005년 이반 챈들러는 아들 조단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했음이 드러나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다. 이반 챈들러는 마이클 사망 5개월 후 자살했다. 2009년 공개된 FBI 파일에 따르면, FBI는 마이클 잭슨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아동복지국도 불기소 처분을 권유했음에도 검찰은 이를 무시하고 기소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사건으로 마이클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진통제 중독을 겪게 되었다.

1995

[소니/ATV 출판사 설립]

가지고 있던 ATV 뮤직 카탈로그 지분 절반을 소니에게 9천5백만 달러를 받고 넘기며 '소니/ATV 뮤직 출판사'가 탄생했다.

[HIStory 앨범 발매]

정규 앨범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을 발매했다.

히트곡과 신곡으로 구성된 더블 앨범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2주간 1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에서 7백만 장 판매 인증을 받았다.

싱글 'You are not alone'은 빌보드 데뷔 첫 주 만에 1위라는 '핫샷' 신기록을 세웠다..

앨범은 2천만 장 이상 판매되었고, 평론가들에게는 평균적인 반응을 얻었다. 수록곡 'Scream'은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싱글 차트 5위에 올랐으며 그래미에서 '올해의 뮤직비디오'를 수상했다. 유럽에서 발매된 'Earth Song'은 영국에서 6주간 1위를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앨범은 '유대인 비하' 논란을 겪었으나, 마이클은 해명 후 문제가 된 가사를 수정하여 재발매했다.

[공황발작으로 입원]

연습 도중 공황발작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의료진은 15분만 늦었어도 사망할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1996

[리사 마리와 이혼 및 재혼]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2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했으며, 11월에는 그의 피부과 간호사이자 열렬한 팬이었던 데비 로우와 재혼했다.

[HIStory World Tour 개최]

'HIStory World Tour'를 개최하여 5개 대륙 35개국에서 총 82회 공연으로 4백5십만 명의 관객을 동원, 그의 투어 중 가장 성공적인 투어로 기록되었다.

1997

[첫 자녀 탄생]

데비 로우와의 사이에서 첫 번째 자녀인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가 태어났다.

[Blood on the Dance Floor 발매]

리믹스 앨범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를 발매했다.

미국에서 1백만 장, 영국에서 2십5만 장이 팔렸으며, 싱글 'Blood on the Dance Floor'는 영국에서 1위,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10위권에 드는 성공을 거두었다.

1998

[둘째 자녀 탄생]

두 번째 자녀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이 태어났다.

1999

[한국 공연 및 이혼]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서울과 독일 뮌헨에서 공연을 개최했다.

10월 8일에는 데비 로우와 이혼했다.

2001

[30주년 기념 공연]

1984년 이후 처음으로 형제들과 다시 모여 뉴욕에서 '마이클 잭슨 30주년 기념 공연'을 열었다.

[Invincible 앨범 발매]

정규 앨범 《Invincible》을 발매했으나, 잭슨의 성인 시절 앨범 중 유일하게 빌보드 핫 100 1위 곡이 나오지 않았고 판매량도 7백만 장에 그쳤으며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앨범 제작 중 소속사와 마찰을 겪기도 했다.

2002

[셋째 자녀 탄생]

세 번째 자녀인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가 태어났다.

어머니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마이클은 대리모를 통해 얻은 아이라고 밝혔다.

[미발매곡 Shout 공개]

2001년 앨범 'Invincible'에 수록하려 했으나 9.11 테러로 인해 거절당했던 곡 'Shout'을 발표하여 'cry' 싱글에 추가했다.

[9.11 테러 추모 자선]

9.11 테러를 추모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가수들을 모아 'What More Can I Give'라는 노래를 만들고 자선 공연을 개최했다.

이 곡은 정식 앨범으로 발매될 계획이었으나 아동 성추행 재판 등으로 미발매곡으로 남게 되었다.

[베를린 발코니 논란]

독일 베를린 호텔에서 팬들에게 셋째 아기를 창가에서 보여주다가 아기를 흔드는 듯한 모습으로 비쳐 큰 논란이 되었다.

마이클은 '끔찍한 실수'였다고 사과하며, 팬들이 보고 싶어 해서 손으로 꽉 잡고 보여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2003

[2차 성추행 혐의 재판]

다큐멘터리 'Living With Michael Jackson'에서 개빈 아르비조 소년과의 친밀한 관계가 논란이 되어,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이 아동 보호 당국에 조사를 요청했다.

개빈 가족은 처음에는 잭슨을 옹호했으나, 변호사를 통해 잭슨이 술을 먹이고 자위행위를 강요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과거 백화점 절도 및 민사소송 전력이 드러나기도 했다.

[Living With MJ 방영 및 논란]

마틴 바시르 기자가 240일간 동행하며 찍은 'Living With Michael Jackson'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큰 논란을 불러왔다.

프로그램 속 불안정한 모습과 개빈 아르비조와의 관계가 문제시되며 두 번째 아동 성추행 재판의 원인이 되었다.

마이클 측은 악의적인 편집이라며 반박 비디오를 제작했다.

영국에서 1천4백만 가구가 시청하며 53.9%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전 아내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당시 마이클이 진통제에 중독된 것 같다고 언급했다.

[체포 및 구속]

경찰이 체포 영장을 발부, 마이클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3백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그는 인터뷰에서 경찰의 수갑 채우기, 화장실 감금 등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밝혔다.

2004

[네버랜드 압수수색 및 기소]

검찰은 네버랜드를 압수수색했으며, 4월 톰 스네던 검사는 마이클을 기소했다.

2005

[성추행 혐의 무죄 판결]

재판이 시작되었고, 개빈 아르비조의 어머니는 납치 시도 등 황당한 주장을 했으나, 마이클과 함께 있던 다른 아이들은 성적인 일을 당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검찰이 제시한 DNA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고, 재닛 아르비조가 합의금을 요구한 사실도 드러났다.

[모든 혐의 무죄]

기소된 14가지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FBI 파일 공개 후, FBI와 아동복지국이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불기소 처분을 권유했음에도 검찰이 이를 무시하고 기소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재판으로 마이클의 명예는 크게 실추되었고, 이후 그는 네버랜드 렌치를 떠나 해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재판 이후 재닛 아르비조는 공문서 위조로 기소되어 벌금과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2006

[공식 석상 등장]

재판 이후 은둔 생활을 하던 마이클은 MTV 재팬과 런던 뮤직 어워드에서 상을 받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고, 6월에는 일본 방송 프로그램 'SMAP×SMAP'에 출연했다.

[네버랜드 폐쇄]

재정적인 문제로 마이클 잭슨이 거주했던 네버랜드 안채가 폐쇄되었다.

2008

[기념 앨범 발매]

《Thriller 25》 기념 앨범을 발매했다.

기존 'Thriller' 곡들과 함께 리믹스 및 미공개 곡들이 수록되었으며, 카니예 웨스트, 에이콘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전 세계 3백만 장이 팔렸으며, 다수의 국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King of Pop' 베스트 앨범도 발매되었다.

2009

[This Is It 콘서트 발표]

영국 런던에서 복귀를 선언하며 'This Is It' 콘서트 시리즈를 발표했다.

처음 10회 공연이 빠르게 매진되자 40회 공연이 추가되었고, 총 75만 개의 티켓이 전량 매진되었다.

[마이클 잭슨 사망]

'This Is It' 콘서트 컴백을 준비하던 중 프로포폴과 벤조디아제핀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추도식은 각국 방송국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LA 경찰은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고, 머레이는 2011년 9월 2급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0년 VH1 선정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순간' 1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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