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연표
1933
[다하우 수용소 개설]
나치 독일이 인종적, 정치적 적대 세력을 감금하고 억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하우에 최초의 강제수용소를 설립했다.이곳은 이후 수많은 유대인과 반대자들이 희생되는 비극의 시작점이 되었다.
1933년 3월, 나치 집권 후 반대파에 대한 폭력을 심화하며 사법 절차 없이 구속하기 위한 수용소 설립을 시작했다. 다하우는 민족 공동체에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공포감을 심기 위한 초기 목적을 가졌다. 당시 독일 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반대파에 대한 폭력 캠페인을 심화시켰다.
[강제 불임화 법 통과]
나치 독일이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자손을 낳는 것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강제 불임화 법을 통과시켰다.이는 인종 순수성을 강조하는 우생학 정책의 일환이었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불임화하는 법이 통과되었고, 200여 개 이상의 유전 건강 법원이 설립되어 400,000명 이상이 불임 시술을 받았다. 이 정책은 1941년 8월, 독일 가톨릭과 개신교의 강력한 반대로 중지되었다.
[유대인 기업 불매운동]
나치 정권이 유대인 기업에 대한 최초의 전국적 불매운동을 개시했다.이는 유대인들을 사회 핵심 분야에서 배제하고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첫 단계였다.
처음 1주를 계획했던 이 불매운동은 지지자 부족으로 하루 만에 종료되었다. 하지만 이를 시작으로 전문 공무 회복법 등 유대인의 의사, 변호사, 농업 종사, 언론 참여 등을 금지하는 일련의 반유대주의 법률이 제정되며 유대인들의 삶은 점차 옥죄어졌다.
1935
[뉘른베르크법 제정]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과 아리안족 간의 결혼 및 성적 관계를 금지하고 유대인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하는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했다.이는 유대인 배척을 법적으로 공식화한 조치였다.
뉘른베르크법은 나중에 집시와 흑인까지 포함되었으며,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나치는 '인종 오염' 개념을 선전하며 이 법을 정당화했다. 히틀러는 이 법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최후의 해결책'이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1938
[크리스탈나흐트 발생]
유대인 청년의 독일 외교관 암살 사건을 빌미로 나치당이 '깨진 유리의 밤'으로 불리는 대규모 유대인 대상 물리적 폭력을 선동했다.수많은 유대인 상점과 유대교회당이 파괴되고 약 3만 명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38년 11월 7일, 유대인 헤르셸 그린슈판이 파리 주재 독일 외교관을 암살한 사건을 계기로 나치당은 대규모 유대인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 11월 9일부터 '크리스탈나흐트'라고 불리는 이 폭력은 독일 전역에서 7천 개 이상의 유대인 상점과 1,200채 이상의 유대교회당을 파괴했고, 약 3만 명의 유대인이 다하우, 작센하우젠, 부헨발트 등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 이후 독일로부터 유대인 이주가 가속화되었고, 독일에서 공개적인 유대인의 삶은 끝났다.
1939
[히틀러의 몰살 연설]
아돌프 히틀러가 공개연설에서 만약 유럽 유대인들이 또 다른 세계 대전을 유발한다면, 그 결과는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몰살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며 최종 해결책의 의도를 드러냈다.
히틀러의 이 연설은 나치 선전 영화 '영원한 유대인'에도 사용되어 유대인 학살의 합리적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는 사적으로도 유대인 몰살 의지를 분명히 밝힌 바 있다.
[T-4 작전 시작]
나치 독일이 'T-4 작전'의 일환으로 가스 실린더와 밀폐된 트렁크 칸막이를 이용한 실험용 가스차를 도입하여 정신 질환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이는 대량 살인에 가스를 활용하는 최초의 시도였다.
1939년 12월부터 나치는 포메라니아, 동프로이센, 점령된 폴란드의 요양원에서 정신 질환자들을 죽이는 데 가스차를 사용했다. 1941년 11월부터는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엔진 배기가스를 이용하는 더 큰 가스차가 사용되었고, 1941년 12월 헤움노 집단 수용소에도 도입되었다. 이 가스차는 주로 유대인이었지만 집시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포함하여 약 50만 명을 죽이는 데 사용되었다. 군사 정부 통치자 한스 프랑크는 다수를 간단히 쏘아 죽일 수 없으므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언급하며 대량 살인 기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1940
[게토 형성 시작]
폴란드 침공 후, 나치는 유대인들을 제한된 게토에 집단 수용하기 시작했다.이 게토들은 임시적인 조치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학살 수용소로의 이송 전 고립과 통제를 위한 거대한 감옥이었다.
1940년과 1942년 사이에 바르샤바 게토(38만 명)와 우치 게토(16만 명) 등 거대한 게토들이 형성되었고,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공동체(Judenrat)가 독일인의 지시를 받아 게토를 운영했다. 이들은 식량 배급, 강제 노역 구성, 그리고 학살 수용소로의 추방을 용이하게 하는 역할을 강요받았다. 이 기간 동안 기아와 질병, 특히 장티푸스로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 바르샤바 게토에서만 1941년에 4만 3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1941
[홀로코스트 실행 시작]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던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유대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1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홀로코스트가 본격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는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라고도 불린다. 사망자 중 약 100만 명의 어린이, 200만 명의 여성, 300만 명의 남성 유대인이 포함되며, 이들은 독일 전역 및 점령지 약 4만여 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학살은 뉘른베르크법 제정 등 유대인 배척 법령, 집단 수용소 노역, 특별행동부대의 총살, 게토 수용 후 학살 수용소 이송, 가스실 및 생체실험 등 절차적으로 진행되었다. 한 학자는 이 때문에 독일 제3제국을 '학살국가'라고 칭하기도 했다.
[동유럽 유대인 총살]
동유럽 점령지에서 특별행동부대(아인자츠그루펜)가 100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하는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이는 나치 학살의 잔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독일의 동유럽 점령 후, 특별행동부대(Einsatzgruppen)는 유대인과 정치사범에 대한 무자비한 총살을 실행했다. 1941년 6월 30일 루마니아 이아시에서는 1만 4천 명의 유대인이 루마니아 주민과 경찰에 의해 사망했다. 1941년 7월 폴란드 예드바브네에서는 나치 질서경찰 앞에서 3백 명의 유대인이 불에 탄 헛간에 갇혀 사망했다. 발굴된 무덤에서 확인된 희생자 수는 소문보다 훨씬 많았다.
1942
[첫 빈민가 폭동 발생]
남동부 폴란드 라크바의 작은 마을에서 최초의 유대인 빈민가 폭동이 발생했다.이는 나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조직적인 무력 저항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1943년 1월에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하여 조악한 무장에도 불구하고 SS 부대를 4주간 지연시켰다. 이 전투로 유대인 1만 3천 명이 전사하고 5만 7천 명이 추방되었다. 같은 해 5월 비아위스토크 게토, 9월 빌나 게토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폴란드에서 약 2만~3만 명의 유대인들이 파르티잔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독일군에 대한 사보타주와 게릴라전을 벌였고, 리투아니아에서만 3천 명 이상의 독일군을 사살했다.
[반제 회의 개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주도로 베를린 교외 반제에서 회의를 열어 유럽 유대인 1, 100만 명을 폴란드 학살 수용소로 이송하여 살해하는 '최종 해결책'을 수립하였습니다.
약 15명의 나치 고위 관료들이 참석하여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결책을 논의했다. 회의록은 '완곡 어법'으로 작성되었으나, 하이드리히는 동유럽으로의 '철수'가 유대인들을 강제 노동과 대량 학살로 전멸시킬 '최종 해결책'임을 명확히 했다. 총 1,100만 명에 달하는 유럽 유대인들을 폴란드의 학살 수용소로 기차를 통해 수송하여 가스로 살해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같은 일부 캠프에서는 일에 적합한 사람들은 잠시 살 수 있었으나 결국 모두 살해될 예정이었다.
[바르샤바 게토 대추방]
히틀러의 지시로 바르샤바 게토에서 대규모 유대인 추방이 시작되어, 3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트레블링카 학살 수용소로 화물 기차에 실려 이송되었다.이는 게토 청산의 시작을 알리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히틀러가 1942년 7월 19일에 추방 시작을 지시한 지 3일 후인 7월 22일, 바르샤바 게토의 대규모 추방이 시작되었다. 9월 12일까지 약 30만 명이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링카 학살 수용소로 수송되었고, 많은 다른 게토들 또한 완전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리스트 작성을 거부한 리비우의 요제프 파르나스 같은 지도자들은 총살되었고, 1942년 10월 14일 부아로짜의 전체 위원회는 추방에 협력하는 대신 자살했다. 바르샤바의 아담 체르니아코프는 게토가 청산되자 자살했다.
1943
[트레블링카 수용소 폭동]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200명이 탈출하며 내부에서 폭동이 발생했다.상당수의 독일군 간수가 살해 또는 제압되고 수용소 건물이 불에 탔지만, 수감자 900명이 사살되고 탈출 성공자 600여 명 중 40명만이 종전까지 살아남았다.
1943년 8월에는 소비버 집단학살 수용소에서 소련군 포로를 포함한 600여 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11명의 SS대원과 수많은 간수들이 사망했고, 발각 후 중화기까지 동원한 공격으로 300명이 사살되었다. 탈출 인원 대다수도 지뢰밭을 통과하지 못해 폭사하거나 사살되었고, 60여 명만이 성공하여 소련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1944년 8월 7일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50명의 존더코만도(시신 처리반)가 간수들을 공격하고 여성 수감자들이 밀입해온 폭약으로 4번 화장터를 폭파했지만, 전원 사살되었다.
[힘러의 포젠 연설]
하인리히 힘러가 폴란드 포젠에서 나치 고위 당원들에게 유대인 몰살 계획인 '최종 해결법'을 공표했다.그는 어린아이까지 포함한 유대인 '박멸'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그 잔혹한 결정을 '꺼림칙하지만 필요한' 것으로 정당화했다.
이 자리에는 해군 제독 카를 되니츠와 전시 군비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도 참석했었다. 되니츠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최종 해결법'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주장하여 인정받았으나, 슈페어는 '만약 제가 모르는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제가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라고 선언했다. 힘러는 녹취록에서 '이들에게 처자식이 있으면 대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결국 이 자리에 와서야 명쾌한 해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박멸하는데 있어서 후환이 남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후환이 어린아이의 탈을 쓰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이것들을 멸종시키기 위해서 약간은 꺼림칙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라고 말했다.
[추수감사 작전]
마이다네크 수용소와 인근 캠프에서 '추수감사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4만 2천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단 하루 만에 사살되었다.이는 나치 독일이 자행한 최대 규모의 단일 유대인 학살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러시아 점령지에서 잡힌 유대인들도 실려오는 족족 그 자리에서 사살한 이 작전은, 나치독일이 자행한 최대의 유대인 단일 학살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이 작전은 폴란드의 게토들이 공터가 되기 시작하는 시점에 일어났다.
1944
[죽음의 행군 시작]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나치 독일이 연합군의 진격으로부터 수용소 학살의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생존 수감자들을 서쪽 수용소로 강제로 이송하는 '죽음의 행군'을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약 25만 명이 사망했다.
1944년 중순 '최종 해결책'이 거의 완료된 상황에서, 독일군이 후퇴하자 동폴란드의 수용소들이 폐쇄되고 생존자들은 독일에 가까운 서쪽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다. 수감자들은 기차역까지 장거리를 걸어가고 며칠씩 화물열차에 갇혔으며, 뒤처지는 자는 즉시 총살당했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기 9일 전, 약 6만 명의 수감자들이 56km를 걸어 이송되는 죽음의 행군 중 1만 5천 명이 사망했다. 나치는 학살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가스실 해체, 화장터 폭파, 시체 소각 등의 노력을 했다.
[헝가리 유대인 학살]
히틀러의 불만 표출 이후 독일이 헝가리를 침공하고, 아돌프 아이히만이 부다페스트에 파견되어 80만 헝가리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이 중 4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세 달 만에 살해되었다.
히틀러는 헝가리의 유대인 문제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며 3월 19일 헝가리를 선제 공격했다. 점령 후 아돌프 아이히만이 부다페스트에 파견되어 80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 수용소로 이송시켰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인 40만 명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져 세 달 만에 살해되었다. 이는 루돌프 회스 소장이 전범재판에서 자백한 사실이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100만 명과 트럭 1만 대를 교환하는 '블러드 포 굿즈' 협상을 발의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마이다네크 수용소 해방]
진격하는 소련군에 의해 마이다네크 수용소가 최초로 해방되었다.이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소련군이 진격해오자 폴란드 동쪽에 있던 수용소들은 모두 폐쇄되었고 생존해있던 수감자들은 독일에 가까운 서쪽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마이다네크 해방 이후 1945년 1월 20일 헬름노, 1월 27일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서부 연합군에 의해서는 4월 11일 부헨발트(미군), 4월 15일 베르겐-벨젠(영국군), 4월 29일 다하우(미군), 5월 3~6일 마우트하우젠(미군), 5월 4일 노이엔감메(영국군), 5월 8일 테레지엔슈타트(소련군) 등이 해방되었다. 트레블링카, 소비버, 벨첵 수용소는 1943년에 나치에 의해 파괴되어 해방되지 못했다.
1945
[홀로코스트의 종결]
연합군의 진격과 주요 강제수용소들의 해방으로 1945년경 나치 독일의 조직적인 유대인 학살인 '최종 해결책'이 종결되었다.그러나 수많은 피해자들이 남겨진 깊은 상처는 인류 역사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1945년 5월 8일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의 해방을 마지막으로, 소련군과 서방 연합군에 의해 대부분의 강제수용소가 해방되며 홀로코스트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많은 수용소는 이미 폐쇄되거나 증거 인멸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살아남은 수감자들은 극심한 고통과 함께 해방을 맞이했다. 베르겐-벨젠에서는 해방 후에도 1만 명 이상이 티푸스나 영양실조로 사망하며 학살의 후유증을 보여주었다. 홀로코스트는 전 세계에 아르헨티나의 헌법 개정 등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