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정치인, 혁명가, 독재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04:33:36
조지아 출신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정치인. 레닌 사후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해 철권통치를 펼쳤다. 급진적인 산업화와 집단농장화를 추진해 소련을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정적 숙청과 인권 탄압으로 독재자로 평가받으며 그의 유산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 이오시프 스탈린 출생
- 볼셰비키당 정식 입당
- 티플리스 은행 강도
- 첫 아내 예카테리나 사망
-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프라우다 창간 및 가명
- 러시아 귀국 (2월 혁명)
- 10월 혁명 성공
- 레닌 병세 악화 시작
- 소련 공산당 서기장 취임
- 레닌 사망과 우상화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둘째 아내 나데즈다 자살
- 키로프 암살 및 대숙청
- 군부 대숙청 단행
-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 트로츠키 암살 지시
- 각료평의회 의장 취임
- 독소전쟁 발발 (바르바로사)
- 국방인민위원 취임
- 모스크바 방어전 지휘
-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
- 쿠르스크 전투 승리
- 테헤란 회담 참석
- 체첸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 얄타 회담 추진
- 소련군 대원수 취임
- 포츠담 회담 참석
- 대일전 참전 및 아시아 몫
- 김일성 지도자 심사
- 유고슬라비아 이탈 숙청
- 김일성 한국 전쟁 승인
- 만찬 중 쓰러짐
-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1878
[이오시프 스탈린 출생]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조지아 고리에서 구두 제화공과 재봉사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86
[천연두 발병과 곰보]
7세에 천연두를 앓아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남았다.
후에 소련의 사진에서는 스탈린의 천연두 자국이 모두 편집, 삭제되었다.
1889
[교회 소학교 입학]
10세에 독실한 어머니의 바람대로 교회 소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 교회 학교는 조지아 민족들에게 러시아인이 되는 교육을 강요했다.
1891
[교통사고로 왼팔 불구]
12세에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왼팔이 영구적으로 불구 상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청년기에는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1894
[티플리스 신학교 입학]
15세에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아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여 문학, 역사, 라틴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1899
[신학교 퇴학]
기말고사를 치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일설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혁명가가 되기 위해 성직자의 길을 포기했다고도 전해진다.
[트빌리시 천문대 근무]
트빌리시 천문대 서기로 수개월간 근무했으며, 이는 그가 정치 이외 분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 유일한 직업으로 알려져 있다.
1900
[지하 정치운동 가담]
21세에 지하 정치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고 지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캅카스 지방 공단에서 노동자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다.
1902
[혁명 활동 첫 체포]
혁명 활동 중 처음으로 체포되어 이후 1903년 3월까지 7번의 체포, 투옥, 추방을 반복하며 제국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1903
[볼셰비키당 정식 입당]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멘셰비키와 볼셰비키파로 분당하자, 레닌이 이끌던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볼셰비키에 정식으로 입당하며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1905
[조지아 볼셰비키 지도자]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며, 각종 시민사회 단체를 조직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열성을 보여 동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06
[첫 결혼 (예카테리나)]
동료의 은신처를 찾던 중 첫사랑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카토)를 다시 만나 결혼했고, 후에 아들 야코프를 얻었다.
신혼 초에는 아내에게 부드럽고 세심했다는 동료들의 회고가 있다.
1907
[티플리스 은행 강도]
볼셰비키당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 현금 수송 방해 작전을 획책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4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후 스탈린은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그의 대담한 은행 강도 행각은 농촌 및 중소 도시 은행에서 대도시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 성공적으로 탈취하게 되었다.
1908
[첫 아내 예카테리나 사망]
바쿠 도피 중 첫 부인 예카테리나 스바니제가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스탈린은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함께, “첫 아내의 죽음 이후로 나는 모든 인간성을 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1912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러시아 국외에 체류 중이던 레닌에 의해 볼셰비키당 제1차 중앙위원회 신입 위원으로 선출되며 당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는 레닌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의 후광 덕분이었다.
[프라우다 창간 및 가명]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의 공식 신문 '프라우다'를 창간하고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강철의 인간'을 뜻하는 가명 '스탈린'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3
[시베리아 망명]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망명했으며, 이후 각지를 전전했다.
이 기간 중 그는 황실과 귀족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을 키워나갔다.
1917
[러시아 귀국 (2월 혁명)]
니콜라이 2세의 퇴위로 제정이 무너진 러시아 2월 혁명 이후, 시베리아 망명에서 돌아와 프라우다 편집 책임을 다시 맡았다.
[내무인민위원 임명]
10월 혁명 직후 인민위원회 내무인민위원(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인종문제담당 장관)을 겸임하며 혁명 정부의 핵심 직책을 맡게 되었다.
[10월 혁명 성공]
레닌, 트로츠키와 함께 10월 혁명을 주도하여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별다른 희생 없이 이루어졌다.
1919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재혼]
옛 공산당 동료의 딸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재혼하여 크렘린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났던 스탈린은 연애하면서 낭만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921
[레닌 병세 악화 시작]
국가 원수 레닌이 병석에 누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면서 스탈린은 병든 레닌의 의사를 무시하며 정책을 추진하고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1922
[소련 공산당 서기장 취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에 취임하며 당내 최고 권력자로 부상할 기반을 마련했다.
이 직책은 1952년 10월 16일까지 유지되었다.
1924
[레닌 사망과 우상화]
블라디미르 레닌 사망 후, 스탈린은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레닌을 우상화하여 레닌주의의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권력 입지를 굳혔다.
1925
[스탈린그라드 개명]
자신의 우상화 정책의 일환으로 차리친 시를 '스탈린그라드'로 개명하였다.
스탈린그라드는 후일 세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무대가 된다.
1928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레닌의 신경제정책을 폐기하고 국가 주도의 국영산업화 정책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며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했다.
농민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다.
집단화와 산업화, 중공업을 통한 경제발전을 선언했다.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은 체포, 사살되거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1932
[둘째 아내 나데즈다 자살]
혁명 기념 만찬에서 만취 상태로 후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에게 폭언을 퍼부었고, 모멸감을 느낀 그녀가 스탈린의 인간적인 결점과 정치적 실패를 비판하는 서신을 남기고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다.
1934
['레이디 맥베스' 금지]
오페라 <레이디 맥베스>를 관람하다 극중 노골적인 성적 묘사에 불쾌감을 느껴 퇴장했고, 며칠 뒤 당 기관지를 통해 오페라를 강하게 비난하며 소련 내 상영을 금지시켰다.
[키로프 암살 및 대숙청]
대중적 인기를 가졌던 레닌그라드 지구당 당서기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자, 이를 정적 트로츠키의 음모로 선전하며 대규모 '대숙청'을 개시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반대파 인사들이 체포, 처형되었다.
1956년 흐루쇼프는 스탈린 자신이 숙청을 단행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고 암시했다. 대숙청은 당내, 군부, 내무인민위원회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1937
[군부 대숙청 단행]
소련군 내부의 장성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여 투하체프스키 원수 등 소련군의 핵심 군사전략가 1500여 명을 간첩 혐의로 처형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초 소련군 고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숙청과 동시에 스탈린은 작전술에 대한 연구를 금지시켰고, 이들의 이론은 스탈린이 죽은 뒤에야 재개되었다. 1938년까지 대략 2백만 명이 숙청되었으며, 이 중 20만 명은 고급인력들이었다.
1939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나치 독일과의 전쟁 위협 속에서 서방국가들의 반히틀러 동맹 제안이 거절당하자, 아돌프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국제적인 충격을 주었다.
이 조약으로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용기를 얻었다는 비판이 있다. 스탈린은 이 조약을 체결하며 소련 내 산업화를 추진하고 서부전선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타임지 올해의 인물 (1)]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에서 한 해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Person of the Year)'에 선정되었다.
1940
[트로츠키 암살 지시]
멕시코로 망명한 자신의 최대 정적이자 국제 공산주의 이론가인 레프 트로츠키를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를 보내 암살하도록 지시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비판이 국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반대 여론으로 확장될 것을 두려워했다. 이 사건은 스탈린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941
[일소 중립 조약 체결]
일본 제국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 소-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동방에서의 잠재적 위협을 완화하고 서부 전선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각료평의회 의장 취임]
독일의 소련 공격 가능성을 판단, 스스로 소비에트 연방 인민위원회 위원장(이후 각료평의회 의장)에 취임하며 전시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한을 강화했다.
[독소전쟁 발발 (바르바로사)]
아돌프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기습 공격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스탈린은 충격과 공황상태에 빠졌으나 곧 기력을 회복하고 스스로 소련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전쟁 초기 1200대 이상의 소련군 항공기가 파괴되고 수십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머무르며 반격을 준비했다.
[국방인민위원 취임]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 국방담당 인민위원에 취임하며 전시 군사력 총동원 및 지휘의 핵심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는 전쟁 승리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모스크바 방어전 지휘]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서 10월 혁명 기념 퍼레이드를 강행하며 수도 사수 의지를 보여주었고, 일대 반격을 지시했다.
1942
[타임지 올해의 인물 (2)]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에서 한 해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Person of the Year)'에 두 번째로 선정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대승을 거두며 동부 전선의 전세를 역전시키고 소련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1943
[쿠르스크 전투 승리]
여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독일군을 완전히 후퇴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소련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이후 독일군은 제대로 된 반격 없이 후퇴하게 된다.
[테헤란 회담 참석]
이란 테헤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과 함께 연합국 수뇌 회담에 참석하여 전후 처리 방안과 전쟁 전략을 논의했다.
1944
[체첸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독소전쟁 중 반소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체첸인들을 무력 진압하고, 반발하는 자는 사살하며 전 인구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체첸 인구의 10%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5
[얄타 회담 추진]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얄타 회담을 추진하여 대단한 협상 기술을 발휘하며 중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권을 확보했다.
이는 냉전 시대의 기반이 되었다.
[소련군 대원수 취임]
소련군 대원수에 취임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끈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이 계급은 그의 사망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포츠담 회담 참석]
미국의 해리 트루먼, 영국의 윈스턴 처칠과 함께 독일 포츠담에서 전후 유럽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회담에 참석했다.
이 회담은 연합국 간의 의견 차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일전 참전 및 아시아 몫]
미국의 요청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전했으나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짧은 기간에 그쳤다.
스탈린은 소련군 사상자를 근거로 아시아에서의 몫을 요구했다.
1946
[김일성 지도자 심사]
한국전쟁 발발 전 김일성과 박헌영을 수시로 소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자격을 심사했으며, 최종적으로 김일성을 낙점했다.
1947
[북유럽 3국 140% 득표]
북유럽 3국에서 개최된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140%의 득표율을 얻었다.
이는 선거 당국이 스탈린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과장하고자 조작한 결과였다.
1948
[유고슬라비아 이탈 숙청]
유고슬라비아가 티토주의를 표방하며 소련 진영에서 이탈하자, 다른 위성국의 분리 독립을 막기 위해 티토주의자들을 명목으로 지도자들을 숙청했다.
1950
[김일성 한국 전쟁 승인]
끈질긴 김일성의 요청 끝에 한국 전쟁을 개시하는 것에 동의하였으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공동 결정 및 신중한 준비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김일성은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남침을 고집했다.
1953
[만찬 중 쓰러짐]
니키타 흐루쇼프 등 공산당 정치국원 4명과의 만찬 도중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자신의 비밀 별장으로 옮겨졌다.
그는 자신을 암살한 것이라 염려했다고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만찬 중 쓰러진 지 4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공식 사인은 뇌졸중이지만, 죽기 직전 주치의들을 숙청한 점과 사망 당시의 정황으로 독살 의혹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사망 장소는 자신의 관저였는데, 암살을 우려한 스탈린이 찾기 어렵도록 미로처럼 복잡하게 지어져 병원으로 옮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사망 후 3일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