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기독교 개혁, 유럽 역사, 문화 변혁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11:14
16세기 서방교회 개혁을 넘어 유럽 사회 전반을 뒤바꾼 거대한 변혁 운동입니다. 교황 중심의 부패한 중세 시대를 끝내고 근세의 문을 연 역사적 분수령으로 평가됩니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시작되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등 다섯 솔라 교리로 발전했으며 기독교 교파 분화 국가주의 성장 예술·과학·경제 자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살아있는 메시지를 남긴 중요한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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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95개조 반박문 발표]
마르틴 루터가 당시 서유럽 교회의 면죄부 판매, 교황권 주장 등 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종교 개혁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이는 중세의 종말과 근세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대담한 행동은 유럽 전역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로 구원을 돈으로 거래하는 교황청의 부패를 인식, 95개 조항의 서신을 마데부르크 알브레히트 주교에게 보냈습니다. 이는 '모든 주교는 하느님의 백성이 복음과 그리스도를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습니다. 이 반박문은 독일 전역에 빠르게 퍼지며 루터의 개혁 사상에 대한 지지를 얻었습니다. 다만 95개조 반박문을 교회 정문에 못 박았다는 주장은 역사적 상상력에 불과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당시 유일한 문서인 요하네스 슈나이더의 육필원고에 따르면, 루터는 '대학의 오랜 관습에 따라 모종의 명제를 논쟁용으로 제출했으나, 너무나 조심스러운 형태라서 누군가를 비방·중상할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종교개혁이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신학적 비판으로 시작되었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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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 스위스 개혁 시작]
독일의 루터와는 달리, 스위스 취리히에서 울리히 츠빙글리가 교회의 예배 형태를 성경에 근거하여 철저히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부정부패를 에라스무스적 풍자와 학문적 공격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달리 개인의 구원 확신보다는 교회의 부정부패를 처음부터 직시하며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개혁은 민족주의적 요소가 강해 용병 제도의 근절을 주장하며 재정적 수입원 차단을 모범으로 보였습니다. 그의 복음 이해는 인문주의적 합리성을 띠었으며, 화체설에 반대하는 영성체 신학을 확립했습니다. 하지만 과격 재세례파와의 갈등도 겪었습니다.
[루터, 라이프치히 논쟁 참여]
요한 에크와의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을 위해 교황을 인정하는 교황중심주의가 필요 없음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공의회조차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닌 그리스도뿐이라고 역설하며 교황청과의 분리를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루터는 이 논쟁에서 콘스탄스 공의회가 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예로 들며 공의회의 과오 가능성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에베소서 1:22-23을 근거로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닌 그리스도임을 주장하며, 자신의 주장이 보편교회적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루터는 교황청과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교황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 기사 및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카를 5세, 신성로마 황제 즉위]
신성로마제국 막시밀리안 황제 서거 후,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카를 5세가 선제후들의 손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독일계 스페인 출신으로, 이후 루터의 종교개혁과 밀접하게 얽히게 됩니다.
카를 5세는 독일계 스페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즉위는 종교개혁 시기 유럽의 정치적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황청의 착취가 심했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통치 아래 대봉건 영주들의 총회의로 운영되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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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 회의: 루터의 선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소집한 보름스 회의에서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개혁 사상을 변호했습니다.
그는 성서와 이성에 비추어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선언하며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멘'이라는 역사에 남을 명언을 남겼습니다. 보름스 회의 이후 추방령이 내려지자,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하며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의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현대 독일어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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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농민 전쟁 발발]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분노한 독일 농민들이 루터의 개혁에 힘입어 대규모 항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혁명은 도시 빈민층까지 가세하며 거세게 확산되었으나, 루터는 이들을 지지하지 않아 농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어진 농민들의 권리 회복 요구가 루터의 종교개혁 분위기를 타고 터져 나온 사건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이 의지하는 제후들의 편에 서서 농민 봉기 진압을 주장하는 소책자를 발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로 인해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교황청과의 타협을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자신의 개혁 운동이 혼자의 힘으로 이끌어갈 수 없게 되는 좌절을 겪었습니다. 농민군은 1526년까지 진압되었고, 10만에서 15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1532
[제네바, 복음주의자 추방]
제네바에 도착하여 조용히 설교하던 파렐, 사우니어, 올리베탄이 현수막 사건으로 인해 추방당했습니다.
하지만 파렐은 포기하지 않고 프로망을 불어선생 자격으로 제네바에 잠입시켜 개혁적 복음주의를 전파하게 했습니다.
제네바에서는 주교와 사보이 백작, 자유 시민으로 이루어진 3원 체제 하에 사보이 가문이 주교직까지 세습하며 시민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이때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으면 완전 대사를 받을 수 있다'는 현수막 사건이 발생, 이를 빌미로 복음주의자들이 추방되었습니다. 이후 프로망의 활동으로 복음주의자와 가톨릭주의자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발생, 가톨릭 사제 윌리가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파렐, 제네바 복귀]
프로망의 활약과 베른시의 지지 속에 가톨릭 수도자와 공개 토론회가 열렸고, 파렐은 공개 토론회 참가자 자격으로 제네바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제네바 개혁의 전환점이 됩니다.
파렐은 1533년 2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를 베풀고, 3월 1일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의 교회를 빌려 사오천 명이 한꺼번에 예배를 드리는 등 제네바는 기사도 정신이 뛰어난 프랑스인 파렐을 맞이하여 개혁을 이끌어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제 이 길을 이끌어갈 '마부'인 칼뱅의 등장이 필요했습니다.
1534
[영국, 왕위지상권 통과]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시작된 영국 종교개혁의 핵심 사건입니다.
영국 의회에서 왕위지상권이 통과되어 교황의 권한이 영국 내에서 제한되고 국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는 국가 권력을 신성한 것으로 본 루터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왕비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의 도움으로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을 발동했습니다. 이로써 국왕 허가 없이 교황에게 항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위지상권은 왕권에 신앙상의 권위, 즉 영국 성공회 교구의 과오, 이단, 죄악을 검열하고 개혁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 것으로, 로마교회로부터의 영국 성공회 독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 헨리 8세는 앤 볼린과 결혼했습니다.
1536
[영국, 수도원 해산법 시행]
헨리 8세가 부패의 온상이던 수도원을 해산시키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6세기 이후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던 잉글랜드 성공회가 로마교회에서 완전히 독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교황청은 이에 격노하여 헨리 8세를 파문했습니다.
수도원 해산은 영국 교회의 재정적 자립을 도모하고,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정치적 권위를 상실시키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헨리 8세는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켜 앤 볼린이 아들을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 메리, 엘리자베스 순으로 명기했습니다. 하지만 앤 볼린이 다시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간통죄를 적용해 그녀를 처형하고 제인 시무어와 재혼했습니다.
1537
[칼뱅, 제네바 개혁안 제시]
장 칼뱅이 제네바 대의회에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 종교 교육, 결혼 등 4가지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했습니다.
이는 제네바를 개혁교회의 중심지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칼뱅은 성만찬을 자주 집행하고 불합당한 자는 출교하며, 회중에게 시편 찬송을 권장하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며, 성경에 일치하는 새로운 결혼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제안들은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하여 성만찬은 연 4회, 결혼 광고는 예식 3주 전으로 규정되었습니다.
1538
[제네바 시의회, 칼뱅 개혁 반대]
제네바 시의회가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고, 칼뱅과 파렐을 반대하는 인물들이 시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베른시의 간섭과 함께 칼뱅의 개혁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결국 칼뱅과 파렐은 제네바를 떠나게 됩니다.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은 재세례파와 연대하여 파렐과 칼뱅을 아리우스주의자,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약했던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며, 코로우, 파렐, 칼뱅에게 제네바시를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칼뱅은 허탈감에 빠져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와 프랑스 난민 목회에 전념하게 됩니다.
1541
[예수회, 공식 수도회 창설]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대표로 예수회가 새로운 수도회로 공식 출범했습니다.
예수회는 종교 개혁으로 실추된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고 신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며 학문을 발달시키기 위한 군대 교단이자 선교 집단으로, 반종교개혁의 선봉에 섰습니다.
로욜라는 군인으로 복무 중 큰 부상을 입은 후 성서와 성인 전기를 읽으며 영적 지도자의 꿈을 키웠습니다. 예수회는 절대 복종을 요구하며 신앙의 토착화라는 지혜로운 선교 방식을 개발했습니다.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고 원주민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는 등 현지 전통을 존중하며 전도하여 원주민들의 반발을 줄였습니다.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대적인 반격을 위한 핵심 동력이 됩니다.
[칼뱅, 제네바 복귀 및 규범 제정]
파렐의 강력한 설득과 제네바 상황의 악화로 칼뱅은 3년여 만에 제네바로 돌아와 교회 규범을 제정하여 의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엄격한 훈련과 경건 생활 실천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며 개혁을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칼뱅의 복귀 후 제네바는 순조롭게 개혁을 진행했으며,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 이르기까지 정열적인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춤, 도박, 음주, 사치 등 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엄격한 사회 규범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 청교도 윤리의 주된 흐름이 되었습니다.
1545
[천주교,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
교황 바오로 3세 주최로 트리엔트 공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18년간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이 공의회는 개신교의 확산과 교회 내부 부패에 대응하며 천주교회의 신학적 입지를 재확립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반종교개혁의 핵심 사건입니다.
공의회의 목적은 개신교의 강성화를 막고 교회 내부의 부패상을 개혁하는 것이었습니다. 주교들의 태만, 성직자 중임제, 감독 소홀 등이 주요 개혁 안건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교리 문제에서는 불가타판 성서를 정경으로 재확인했습니다. 그러나 1552년 개신교 측 사절들이 새로운 공의회 소집, 교리 취소, 교황 수위권 거부 등을 요구하고 독일 기사들의 난입이 발생하자 교황은 회의를 중단시켰습니다. 결국 트리엔트 공의회는 서방교회의 통합이 아닌 분리를 결정했고,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예수회를 통해 수백 년간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1547
[에드워드 6세 즉위, 개혁 급물살]
헨리 8세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영국 성공회는 섭정 서머셋 공작의 영향으로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노선으로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외척의 힘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섭정으로 선출된 삼촌 서머셋 공작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추종자였습니다. 이에 따라 로마 가톨릭 6개 조항과 관련된 모든 법이 파기되고 성만찬 집전 시 보혈과 성체 분배 허용, 성직자 결혼 금지 법령 무효화 등 개신교 노선의 개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또한 에드워드 제1·2기도서가 작성되고, 금서였던 영문 성서의 출판·판매가 자유로워졌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대헌장인 42개 조항도 발표되었습니다.
1553
[메리 1세 즉위, 가톨릭 복귀]
에드워드 6세 서거 후 헨리 8세의 딸 메리 튜더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리려 했고, 이전 왕들의 개신교 관련 법령을 번복하며 개신교도와 성공회 성직자들을 잔혹하게 박해하여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메리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적법했음을 선포하며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했습니다. 에드워드 6세의 모든 신앙 법안을 폐기하고 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 법도 무효화했습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하며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이 영국으로 복귀했고, 교황청 사절단도 파견되어 순종법과 이단 규제법을 발동했습니다.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 휴 래티머 주교 등 수많은 개신교 및 성공회 지도자들이 처형당했습니다. 크랜머 대주교는 순교 직전 신앙철회서에 서명했던 오른손을 불태우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1559
[엘리자베스 1세 즉위, 중용 노선]
메리 1세 서거 후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영국 교회를 프로테스탄트 쪽으로 이끌었으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 노선을 택하여 영국의 종교적 안정을 꾀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59년 4월 29일 여왕의 영국 교회 지존법(수장령)을 통과시켜 모든 성직이 여왕에 종속되도록 했습니다. 이 권한으로 영국 교회 통일법을 통과시켜 성직자 예복과 교회 장식을 통일했습니다. 1563년에는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개혁을 더욱 강하게 추진하며 39개조 신조를 개정했습니다. 그녀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르며 교황권으로부터 영국을 성공적으로 보호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 성공회의 가톨릭 잔재 청산을 주장한 청교도들과의 갈등도 발생했습니다.
1588
[영국,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르며 교황권과 로마 가톨릭주의로부터 영국을 성공적으로 보호했습니다.
이는 영국의 종교적 독립과 프로테스탄트 노선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해상 전투였습니다.
무적함대 격파는 영국 해상력의 우위를 확립하고, 유럽 내 종교 갈등 속에서 영국의 국가적 위상을 크게 높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군사적 승리를 넘어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장기적으로 대영제국의 초석을 다지는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1869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천주교회가 자유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여 보호막을 더욱 강하게 둘렀습니다.
이 공의회는 교황 무오류설을 교리로 확정하는 등 교황 중심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공의회는 개신교와의 대화보다는 내부 결속과 교황권 강화에 집중했습니다. 이는 종교개혁 이후 분열된 기독교 세계에서 천주교가 보수적 입장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황 무오류설 등 중요한 교리들이 확정되었으나, 이는 동시에 다른 교파와의 간극을 더욱 벌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196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천주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의 살해와 약탈을 용서한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보호막을 벗어던지고 개방을 선언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기독교 분열의 책임을 함께 지고 있다고 말하며 타 교파와의 화해를 모색했습니다.
이 공의회는 현대 세계에 대한 교회의 적응과 쇄신을 목표로 했습니다.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참관인들을 초청하고, 과거의 적대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이며 에큐메니컬 운동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습니다. 이는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를 통해 천주교회는 비로소 종교개혁에 도전장을 던지고 현대 세계와의 소통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