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독립운동가, 의병장, 사상가, 서예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9:26:01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의병장으로 이토 히로부미 저격으로 대한 독립의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동양 평화론을 주창하며 한·중·일 평화 공동체를 꿈꿨던 선구적인 사상가이자 군인으로 그의 유해는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해 많은 이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1879
[안중근 탄생]
조선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안인수는 대지주이자 미곡상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여 유년기를 어렵지 않게 보냈다.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는 ‘응칠(應七)’이라 불렸는데, 이 이름은 훗날 해외에서 주로 사용했다. 어릴 때부터 사냥을 즐겼고, 서당 공부보다는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차분히 앉아있는 날이 드물자 할아버지는 ‘무거울 중(重)’에 ‘뿌리 근(根)’자를 써서 ‘중근’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94
[동학 농민군 진압 참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명사수로 정평이 났던 소년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자발적으로 참여하자,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며 동학군 토벌에 나섰다.
당시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이 시기에 안중근도 김구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 안중근은 옥중 자서전에서 동학당을 '좀도둑떼'라 칭하며 청일전쟁의 불씨를 제공했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1897
[천주교 세례]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했으며, 1897년 안중근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신부 조제프 빌렐렘(한국명 홍석구)으로부터 세례명 '토마스'(도마)를 받았다.
안중근은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나, 뮈텔 주교가 조선인의 학문 탐구를 달가워하지 않아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이후 잠시 교회의 총대를 맡고,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는 채표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이 되었다.
1904
[청국인 폭행 사건]
아버지 안태훈이 청나라 의사 서원훈과 시비가 붙어 발에 걷어차이자, 안중근은 10여 명과 함께 서원훈을 찾아가 무수히 난타하여 중태에 빠뜨렸다.
이 일은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고, 안중근에게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그는 도주했다.
안중근의 자서전 《안응칠역사》에는 이와 다르게, 안중근이 외무부에 청원하여 재판을 받았고 서원훈의 만행이 드러나 안중근이 옳다는 판결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안중근은 어떤 청나라 사람의 소개로 서원훈과 만나 서로 사과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1905
[을사늑약과 독립운동]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갔으나 협조를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부친상을 당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906년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여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했다.
사업을 정리하고 집안 전 재산을 털어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남포 돈의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육운동에 투신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 주도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1907
[의병 활동 시작]
고종 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 전쟁의 필요성을 느껴 강원도 의병에 가담했다.
이후 국외 의병 부대 창설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계동청년회에 가입하고 임시사찰로 선출되었다.
이후 1908년 7월 전제덕 휘하의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 자격으로 엄인섭과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국내 진공 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하여 석방해준 것이 누설되어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이로 인해 의병의 신임을 잃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부대는 해체되었다.
1909
[단지동맹 결성]
1909년 초, 뜻을 같이하는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왼쪽 약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혈서로 결의를 다졌고, 이때부터 안중근의 수인(手印)을 찍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자원했다.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해 자금과 인력 부족으로 계획을 변경,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하기로 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중, 안중근은 FN M1900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으로 이토를 사격하여 살해했다. 이외에도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에게 총격을 가했다. 총격 후,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우라!'(대한독립만세)를 3번 크게 외쳤다.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 30분 만에 사망했다.
1910
[사형 선고]
러시아군에 체포되어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진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 갇혔고,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재판관할권은 일본에 없었다.
함께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최재형은 안중근의 변호를 위해 미하일로프 주필을 준비했으나, 일본에 넘겨져 일본인 관선 변호사가 선임되었다. 안중근은 사형 선고 후 고등법원장에게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수감 중 미완성 저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최후의 고해성사]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 행위로 단죄하고 성사 집전을 금지했으나, 프랑스 선교사 니콜라 빌렘 신부가 뮈텔 주교의 명을 어기고 뤼순 감옥으로 찾아와 고해성사를 집전해주었다.
다음 날인 3월 10일에는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징계를 내렸으나, 교황청 교회법원에 이의를 제기하여 성사 집행권 정지는 해제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안중근 의사의 행위를 독립운동이자 정당방위로 재평가하며 평신도 신분을 완전히 복권했다.
[사형 연기 및 유언]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 내 의병 활동을 고려하여 사형 집행이 연기되었다.
이날은 순종 황제의 탄신일인 건원절이었다.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에게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를 용서해 달라 청했으며,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 의사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는 유언을 남겼다.
[순국]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향년 32세.
미조부치 검찰관과 구리하라 감옥장이 참석했다.
안중근은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안중근은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당부했으나, 시신은 뤼순 감옥 근처 죄수 공동묘지에 묻혔다. 일본은 그의 묘지가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될 것을 우려해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그의 유해는 찾지 못하고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946
[효창공원 가묘 조성]
해방 후 백범 김구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찾아와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이때 그 옆에 언젠가 안치될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조성했다.
이는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가묘 앞에는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김구 선생은 1949년 암살로 사망하여 자신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2008
[유해 공동 발굴 실패]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 감옥 북쪽 야산 일대 등지에서 발굴 작업을 벌였음에도 유해를 찾지 못하고 정확한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일제 당시 간수들의 증언에 따랐으나 소득이 없었다.
안태근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은 당시 발굴 작업이 일본인 공공묘지에서 진행되어 유해가 이미 본국으로 가져가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그는 뤼순감옥구지묘지(감옥에서 동쪽으로 500m 떨어진 죄인 묘역)에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나, 현재 그곳에는 이미 아파트가 들어서 발굴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안중근함 진수]
대한민국 해군의 1800톤급 손원일급 잠수함 대형 3번함의 이름이 '안중근함(SS-075)'으로 명명되어 2008년 6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진수되었다.
이는 독립운동가로서는 최초로 군함의 이름으로 명명된 사례이다.
진수식에는 김태영 합참의장과 정옥근 해군참모총장 등 군 관계자, 현대중공업 임직원, 안중근 의사 숭모회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2019
[우덕순 밀정 의혹 보도]
KBS 탐사보도부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밀정을 추적하는 보도에서 안중근의 거사 동지였던 우덕순이 일제의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며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우덕순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 취재진이 입수한 일본 기밀문서 등을 통해 1920~30년대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민회 간부로 활동했음이 확인되었으며,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한국인 사회 통제를 위해 만든 대표적 친일단체였다.
[장흥 해동사 문화재 지정]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만수길에 위치한 장흥 해동사가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91호로 지정되었다.
2022
[천주교 신앙의 선조 선정]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안중근을 기리며 따르자는 취지로 2022년 전반기 신앙의 선조에 신자 안중근을 선정했다.
이는 오랜 기간 한국 천주교에서 살인자로 단죄되었던 그의 신분이 완전히 복권되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