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
독립운동가, 평화주의자, 정치인, 사상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4:19:48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위대한 영혼으로 불리며 비폭력 무저항 운동 사티아그라하를 통해 영국 식민 지배에 맞서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다. 그의 생일은 국경일이자 국제 비폭력의 날로 기념된다. 인도의 화폐에도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으며 인도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삶과 사상은 전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지만 일부 비판점도 존재한다.
1869
[인도 영혼의 탄생]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이자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로 불린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영국령 인도 포르반다르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가르침을 받으며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하고 성실한 성격을 형성했습니다.
1882
[어린 신랑, 카스투르바이와 결혼]
간디는 7살 때 이미 약혼했으나, 약혼녀들이 차례로 사망한 후 13세에 세 번째 약혼녀인 상인 집안의 딸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힌두교 교리를 충실히 지키며 성욕을 자제하려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1887
[영국 유학의 시작]
인도 사일러스 대학교에 입학한 간디는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당시 힌두교에서는 유학 청년들이 전통을 무시할까 우려해 격렬히 반대했지만, 간디는 공부에 열중하며 런던 채식주의협회 집행위원이 될 정도로 채식주의를 고집했습니다.
영국 유학은 당시 힌두교 전통과 맞지 않아 원로 지도자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간디는 유학 기간 동안 개인적인 도덕 문제에 관심을 갖고 런던의 생활과 음식, 예절에 적응하며 채식주의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찾고 런던 채식주의협회 집행위원이 되었습니다.
1891
[변호사 자격 취득 및 귀국]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법학을 공부한 간디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인도로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귀국 전 이미 별세한 뒤였고, 인도 라지코트와 봄베이에서의 변호사 생활은 내성적인 성격 탓에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순탄치 않았습니다.
1893
[남아프리카, 차별에 눈뜨다]
1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의 인도계 상사에서 근무하게 된 간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탈 식민지에 부임해 변호사를 개업했습니다.
그곳에서 인도인들이 백인들에게 교통, 취업 등에서 심한 차별을 당하는 현실을 목격하며 독립운동을 다짐했고, '비폭력 투쟁'의 단서를 마련했습니다.
1894
[정치 운동가의 탄생]
남아프리카에서의 1년 계약이 끝나 환송 잔치에 참석한 간디는 우연히 나탈 의회가 인도인 선거권 박탈을 입법화하려 한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운동가로의 변신을 결심하고 영국 정부에 보낼 탄원서 작성을 주도했습니다.
[나탈 인도국민회의 창설]
인도인 차별법의 입법을 막는 데는 실패했지만, 간디는 나탈·영국·인도에 걸쳐 인도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홍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더반에 머무르며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인도인의 단결심을 고취시키며 차별 실상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습니다.
1915
[독립을 위한 협력]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간디는 영국이 전쟁 후 인도를 독립시켜 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1918년까지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그는 귀국하여 노동 운동, 민족 해방 독립 운동의 지도에 전념했지만, 이 시기에는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간디가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입장을 지지한 것은 훗날 그의 비폭력주의에 어긋나는 점으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이는 독립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으나, 논란의 여지를 남겼습니다.
1919
[사티아그라하 운동 선언]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독립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반영 운동을 더욱 가혹하게 탄압하는 '롤래트 법'을 제정했습니다.
간디는 '우리는 빵을 구했지만 돌을 받았다'며 분노했고, 모든 인도인에게 영국 상품 불매, 납세 거부, 공직 사퇴 등 비폭력 저항 운동인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호소했습니다.
1919년 봄,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투쟁 선언 후 민중 운동이 발생했으나, 영국군의 무자비한 발포로 400명의 인도인이 학살당하는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 발생하며 운동은 잠시 주춤하기도 했습니다.
1922
[옥고와 건강 문제로 출옥]
비폭력 저항 운동을 주도하던 간디는 1922년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출옥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인도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1925
[국민회의파 의장 취임]
간디는 1925년 인도 국민회의파의 의장직을 맡게 됩니다.
이로써 그는 인도 민족 해방 운동의 중심에 서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1930
[타임지 '올해의 인물' 선정]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이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과 그의 영향력이 인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적인 사건입니다.
1942
[인도 철퇴 요구 및 투옥]
간디는 영국에 대해 인도를 철수하라는 강력한 요구와 함께 또다시 대규모 불복종 운동을 일으키다가 투옥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석방된 후에도 마지막까지 인도의 독립을 위해 델리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융화에 전력하며 활동했습니다.
1947
[인도 독립과 민족 분열]
수십 년간의 피땀 어린 투쟁 끝에 인도는 드디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하지만 독립과 동시에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는 인도로 나뉘는 민족 분열이 벌어졌고, 종교 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간디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1948
[비폭력 운동가의 비극적 최후]
종교 갈등 해소를 위해 이슬람교도를 편든다고 여긴 극단적 보수파 힌두교 신도들의 반발을 산 간디는, 뉴델리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반이슬람 성향의 힌두교 급진주의 무장 단체 '국민 의용단' 소속 나투람 고드세에게 총을 맞아 78세의 나이로 암살당했습니다.
비폭력 운동가의 비극적인 죽음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99
[뉴욕타임스 '최고의 혁명' 선정]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 1천 년간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선정했습니다.
이는 간디의 사상과 운동이 현대에도 얼마나 큰 의미와 영향력을 가지는지 보여주는 세계적인 평가입니다.
2018
[가나 대학교 동상 철거]
간디의 흑인에 대한 과거 인종차별적 면모가 논란이 되면서, 아프리카 가나 수도에 있는 가나 대학교에서 간디의 동상이 철거되었습니다.
이는 간디에 대한 현대적인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019
[연세대 간디 흉상 설치]
가나에서 동상이 철거된 것과 대조적으로, 연세대학교는 인도 정부로부터 간디 흉상을 선물 받아 인천 송도 캠퍼스에 세웠습니다.
이는 간디에 대한 국제사회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일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