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플레밍

과학자, 생명공학자, 세균학자, 면역학자, 의학자, 노벨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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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22: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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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플레밍
과학자, 생명공학자, 세균학자, 면역학자, 의학자, 노벨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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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실린과 리소자임이라는 인류의 삶을 바꾼 항균 물질을 우연히 발견한 스코틀랜드 출신 생명공학자입니다. 특히 페니실린 발견으로 항생제 시대를 열어 수많은 생명을 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과학적 우연인 세런디피티의 대표적인 인물로 불리며 그의 발견은 현대 의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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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알렉산더 플레밍 탄생]

스코틀랜드 에어셔 지방 로흐필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01

[런던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 시작]

상선회사에서 일하다 삼촌의 유산으로 런던 대학교 세인트 메리 병원 의과대학(현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 입학하여 의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906

[의학 면허 취득 및 연구 활동 시작]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의학 면허를 취득하고, 백신 치료와 면역학의 개혁자로 불리는 앰로스 라이트의 예방 접종과에 합류했습니다.

1910

[영국 최초의 살바르산 사용]

영국에서 인류 최초의 화학요법제 '살바르산'을 가장 먼저 사용했습니다.

이는 약에 부정적이던 세인트 메리 병원 예방접종과에서 이례적인 치료 효과를 보였습니다.

1914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영국군(왕립군사의무단)에 입대하여 프랑스 야전병원에서 의무장교로 복무하며 부상자 치료와 소독약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1915

[사라 맥엘로이와 결혼]

휴가 중에 간호사 사라 맥엘로이와 결혼했습니다.

내성적인 플레밍과 달리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1918

[모교 세인트 메리 병원 복귀 및 교수 임명]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모교인 세인트 메리 병원으로 돌아와 교수가 되었습니다.

1919

[왕립외과협회 헌터좌 교수 취임]

왕립외과협회의 헌터좌 교수로 임명되어 면역학, 세균학, 그리고 화학요법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1922

[리소자임의 우연한 발견]

감기에 걸렸을 때 자신의 콧물을 세균 배양 접시에 떨어뜨렸다가 우연히 강력한 항균 효소인 '리소자임'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소독약 연구의 한계에 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플레밍은 콧물 속 효소가 미생물을 분해하는 것을 관찰했으며, 이 발견을 통해 체내 자연 방어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높였습니다. 리소자임은 독성이 없는 세균에만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지만, 훗날 페니실린 발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플레밍은 훗날 페니실린보다도 리소자임이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28

[세균학 교수 임명]

런던 대학교 세인트 메리 의과대학 세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과의 부책임자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페니실린의 기적 같은 발견]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연구 중, 포도상구균 배지에서 푸른곰팡이가 자라면서 주변 세균의 성장이 억제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곰팡이 추출물에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인류 최초의 항생제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발견은 과학적 우연인 '세런디피티'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당시 플레밍의 실험실은 늘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여름 휴가 후 돌아온 그는 우연히 열려 있던 배양 접시에서 곰팡이 주변의 세균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희귀한 곰팡이 종류와 특수한 환경 조건이 겹치면서 페니실린이 발견될 수 있었습니다. 이 발견은 1929년 논문으로 발표되었으나,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1929

[페니실린 연구 논문 발표]

『영국실험병리학회지』에 「B-인플루엔자 분리에 이용된 페니실륨 곰팡이의 항세균 작용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페니실린 발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1932

[페니실린 연구 잠정 포기]

플레밍은 자신이 화학요법을 연구할 만한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페니실린 연구를 잠시 포기했습니다.

그는 심각한 감염 치료에 대한 가능성을 낮게 보았습니다.

1939

[페니실린 균주, 옥스퍼드 연구팀으로 이전]

플레밍의 페니실린 균주 표본이 하워드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이 이끄는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팀으로 넘어가면서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 및 임상 연구의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연구팀은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페니실린을 정제하고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943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

영국 최고 권위의 과학 학회인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회원으로 선출되며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1944

[영국 국왕으로부터 기사작위 수여]

영국 국왕으로부터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수여받아 '경(Sir)'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945

[페니실린 발견으로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페니실린과 그것의 다양한 감염성 질환에 대한 치료 효과를 발견한 공로로 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체인과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페니실린의 발견은 현대 의학과 약학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한 '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받습니다.

1946

[앰로스 라이트의 뒤를 이어 실험실 책임자 역임]

스승인 앰로스 라이트의 뒤를 이어 실험실 책임자가 되었고, 1948년에는 라이트-플레밍 연구소의 소장까지 맡았습니다.

1948

[런던 대학교 세균학 명예교수 임명]

런던 대학교의 세균학 명예교수로 임명되며 학계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1953

[아말리아 보레카와 재혼]

아내 사라 맥엘로이 사후 동료인 아말리아 보레카와 재혼했습니다.

1955

[심근 경색으로 사망]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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