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채드윅
물리학자, 핵물리학자, 노벨상 수상자, 맨해튼 계획 참여자, 영국 과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10:19
제임스 채드윅은 현대 핵물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영국의 위대한 물리학자입니다. * 1932년 전기적으로 중성인 새로운 입자 중성자를 세계 최초로 발견하며 과학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 이 공로로 193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영국 팀의 수장으로 참여하여 원자폭탄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수용소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핵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1891
1908
[물리학자의 길로 들어서다]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에 입학할 때, 실수로 수학 대신 물리학과를 선택하는 운명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이 작은 실수가 그의 위대한 물리학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1911
[러더퍼드와 인연을 맺다]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어니스트 러더퍼드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맨체스터 대학교를 최고 우수 등급으로 졸업했습니다.
1913
[베타선 스펙트럼의 비밀을 밝히다]
독일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한스 가이거와 함께 방사능 측정 기기인 가이거 계수기를 사용하여 베타 방사선이 기존의 생각과 달리 연속 스펙트럼임을 세계 최초로 관측하고 입증했습니다.
이는 당시 물리학자들의 상식을 깨는 결과였습니다.
당시 가이거 계수기는 막 개발된 상태였으며, 채드윅은 이를 이용해 베타 방사선이 분절된 선 스펙트럼이 아닌 연속 스펙트럼임을 관측하여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베타 붕괴 에너지의 연속 스펙트럼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조차 설명하기 어려워했던 현상이었습니다.
1914
[수용소에서도 멈추지 않은 연구]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독일에 갇혀 베를린 루흐레벤 수용소에 억류되었지만, 마구간에 차려진 실험실에서 방사능 위약을 구해 연구를 계속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채드윅은 제자인 찰스 드럼먼드 엘리스의 도움을 받아 인의 이온화 및 이산화탄소와 아르곤의 광화학 반응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1919
[러더퍼드와 케임브리지로]
지도교수 러더퍼드를 따라 핵물리학 연구의 요람인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로 옮겼습니다.
1921
[박사 학위 취득과 교수 임용]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곤빌 카이우스 컬리지 교수로 채용되어 핵물리학의 기초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1925
[결혼과 핵물리학 난제 도전]
애일린 스테워트브라운과 결혼했으며, 같은 해부터 핵물리학의 오랜 난제였던 원자핵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심도 깊은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원자 모형은 양성자로만 핵이 구성된다고 보았지만, 질소의 질량, 전하, 스핀 등에서 모순이 발생하여 물리학자들을 괴롭혔습니다.
1932
[중성자 발견, 핵물리학의 새 지평을 열다]
프랑스 졸리오퀴리 부부의 이상한 실험 결과를 접한 후, 전기적으로 중성인 새로운 입자인 '중성자'의 존재를 성공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이는 핵물리학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세계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졸리오퀴리 부부는 폴로늄 알파선을 베릴륨에 충돌시켜 발생하는 방사선을 파라핀에 쏘았을 때 양성자가 검출되는 현상을 감마선으로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채드윅과 러더퍼드는 양성자가 감마선에 의해 방출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전기적으로 중성이면서 더 작은 입자의 충돌로 설명하며 중성자의 존재를 확신했습니다. 그는 모든 연구를 중단하고 2주간의 집중 실험 끝에 <네이처>에 중성자 발견을 기고했습니다.
1935
[노벨 물리학상 수상]
중성자 발견이라는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과학계에 그의 이름을 각인시켰습니다.
중성자의 발견은 이후 핵물리학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성자의 발견은 엔리코 페르미가 느린 중성자를 이용한 핵변환 반응을 유도하고 노벨상을 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볼프강 파울리는 베타 붕괴시 발생하는 방사능의 연속 스펙트럼을 중성자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등 핵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노벨상 상금으로 연구 투자]
노벨상 수상 직후, 고향인 리버풀 대학교 물리학 석좌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노벨상 상금 중 상당 부분을 들여 연구소의 사이클로트론 제작 비용을 충당하는 등 연구 시설 확충에 힘썼습니다.
당시 리버풀 대학교 연구소는 구식 시설이었으나, 채드윅은 노벨상 상금 8,243 파운드 중 5,184 파운드를 사용하여 사이클로트론 제작 비용을 충당하며 과감한 투자를 했습니다.
1939
[리버풀 사이클로트론 완공]
노벨상 상금 등을 투자하여 리버풀 대학교에 당대 최고 수준의 사이클로트론을 성공적으로 완공하며 핵물리학 연구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 장비는 훗날 항암치료에도 응용되어 방사선 암 치료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사이클로트론은 총 5,184 파운드가 소요되었고, 채드윅은 초과된 비용을 노벨상 상금으로 충당했습니다. 1938년에는 이 사이클로트론으로 발생시킨 중성자와 이온화 방사능을 암에 조사하는 시험을 하여 항암치료에 방사선이 동원되는 시초를 마련했습니다.
[전쟁과 핵무기 연구의 시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로부터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 연구를 요청받고, 전쟁에 대한 깊은 우려 속에서도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독일의 오토 한과 프리츠 스트라스만이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하고, 프랑스 물리학자들이 핵분열 시 중성자가 추가로 방출됨을 입증하면서 핵 연쇄 반응과 핵무기 가능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채드윅은 신중하게 접근했지만, 그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1941
[마우드 보고서 작성에 핵심 역할]
우라늄 폭탄의 군사적 이용 가능성을 보고한 '마우드 보고서'의 최종 검토를 완료하며, 핵무기 개발의 현실성을 강력하게 피력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채드윅은 마우드 위원회에서 우라늄-235의 핵 반응면 크기를 결정하는 데 주력했으며, 1941년 4월에는 우라늄-235의 임계 질량을 최대 8kg으로 확정했습니다. 그의 팀은 리버풀 폭격 속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보고서는 10월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1943
[맨해튼 계획 영국 팀 수장]
핵폭탄 개발을 위한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합류하며, 영국 팀의 수장으로서 워싱턴 D.C.와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를 오가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나치 독일의 공습이 격화되자 채드윅은 쌍둥이 자녀를 캐나다로 피신시키고 본인도 맨해튼 계획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는 맨해튼 계획을 총괄하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으로부터 모든 연구에 접근할 권한을 얻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안을 위해 '제임스 채피'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45
[트리니티 실험 목격]
인류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 현장을 직접 지켜보며 인류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1948
[곤빌 카이우스 컬리지 학장 취임]
캠브리지 대학교 곤빌 카이우스 컬리지의 학장으로 취임하여 1959년 퇴임할 때까지 교육과 연구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