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라부아지에

화학자, 공직자, 과학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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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22: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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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화학의 아버지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폐기하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확립 산소의 역할을 규명하며 화학 혁명을 이끌었습니다. 탁월한 과학적 업적 외에 세금 징수원으로서 프랑스 국가 운영에도 기여했으나 혁명의 광풍 속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 세기가 지나도 재현하기 어려운 위대한 두뇌의 상실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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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

[위대한 화학자의 탄생]

프랑스 파리에서 법률 고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난 열정을 보였습니다.

1749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 에밀리 라부아지에가 딸을 한 명 더 낳은 후 사망했습니다.

이로 인해 가족의 애정과 기대가 라부아지에에게 집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761

[명문 학교 졸업]

콜레주 마자랭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라카유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배우며 자연 과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766

[가로등 제안으로 아카데미 메달 수상]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대도시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방안을 공모했을 때, 그의 뛰어난 제안이 인정받아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그의 초기 과학적 재능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768

[세금 징수원으로서의 새로운 도전]

과학 아카데미 회원과 같은 해, 그는 프랑스 정부의 중요한 재정 기관인 세금 징수 조합에 합류하여 공직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담배 밀수와 사기 적발 등 국가 재정 확보에 기여했습니다.

[프랑스 최고 과학 기관 입성]

끊임없는 연구와 논문 발표로 학계의 인정을 받아, 치열한 경쟁 끝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연구 활동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1770

[물의 변형설을 뒤집다]

당시 과학계에 만연했던 '물을 계속 증류하면 흙이 된다'는 가설에 의문을 품고 100일간의 철저한 실험을 통해 이를 반증했습니다.

이 반증으로 그의 이름은 크게 알려졌습니다.

이 실험은 물질이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형태만 바뀐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한 그의 초기 인식을 보여주었습니다.

1771

[과학적 동반자와의 결혼]

세금 징수 조합의 상관이었던 자크 폴즈의 외동딸 마리안과 결혼했습니다.

마리안은 이후 남편의 실험 기구 묘사, 결과 기록, 영어 논문 번역 등을 도우며 그의 위대한 연구에 핵심적인 조력자 역할을 했습니다.

1772

[연소 현상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 시작]

황과 인을 연소할 경우 공기를 흡수하여 질량이 증가하고, 금속회를 가열하면 공기를 잃고 질량이 감소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아카데미에 제출했습니다.

이는 그가 연소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1774

[프리스틀리를 통해 산소 개념 접하다]

영국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탈플로지스톤 공기'(산소)의 존재를 프리스틀리의 파리 방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기체가 연소 현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직감하고 추가 실험에 돌입했습니다.

스웨덴의 칼 빌헬름 셸레도 1772년경 산소를 발견하고 라부아지에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라부아지에가 답장하지 않아 셸레의 우선권이 무시되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1775

[국가 핵심 요직에 오르다]

뛰어난 과학적 능력과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프랑스 재정 총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에 의해 화약국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화약 제조 과정을 혁신하고 일꾼들에게 화학 지식을 가르치는 등 국가 방위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산소의 어원이 된 '생명의 공기' 개념 제시]

공기 성분 중 특정 성분이 생물의 호흡과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생명의 공기'라고 명명했습니다.

1777년에는 이를 '산을 생성하는 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principe oxygine'으로 명명하며 현대 산소(Oxygen)의 어원을 마련했습니다.

1777

[구시대적 플로지스톤설에 대한 첫 공격]

연소를 '물체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현상'으로 설명하는 플로지스톤설이 순환 논리에 불과하며, 단지 가설일 뿐이라고 강력히 비판하는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이는 그가 근대적인 연소 이론을 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785

[물의 진실을 밝히다: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

30명 이상의 과학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열을 이용해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고, 반대로 수소와 산소를 이용해 물을 합성하는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물이 원소가 아닌 두 원소의 화합물임을 확실히 증명하여 플로지스톤설을 반박할 결정적인 근거를 얻었습니다.

그는 물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수소와 산소의 질량을 측정하여, 질량 보존의 법칙이 화학 반응에서도 철저히 적용됨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1787

[화학 언어의 혁명: 통일된 명명법 제정]

혼란스러웠던 화합물 명명법을 개선하기 위해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 등과 함께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화학 물질의 이름을 그 성질에 기반하고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원칙을 제시하여 통일된 화학 언어를 만드는 데 세계 최초로 기여하며 화학 발전에 큰 의의를 남겼습니다.

1789

[화학 혁명의 바이블 탄생]

자신의 새로운 연소 이론과 확립된 화학 개념들을 집대성한 《화학 원론》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공기와 물의 조성, 연소와 산에서의 산소 역할, 열과 호흡 이론 등을 정리하고 최초의 근대적인 화학 물질 목록을 제시하며 근대 화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혁명의 광풍 속으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그의 화려했던 경력은 점차 위협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며 코뮌 대표로 시민들을 진정시키려 애썼습니다.

1790

[세계 최초의 국제 표준 도량형 확립에 기여]

프랑스 국회가 과학 아카데미에 도량형 통일안 제작을 의뢰하자,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가 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비록 국제적인 협조는 실패했지만,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법의 기초를 다지는 세계 최초의 대규모 노력으로 평가받습니다.

라부아지에는 이 작업에서 비서와 회계 업무를 담당하고 헌법제정국민의회에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793년 1월에는 질량 단위 정하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1791

[주요 공직인 세금 징수 조합 해체]

혁명 정부의 변화 속에서, 그가 오랜 세월 봉직하며 국가 재정에 기여했던 세금 징수 조합이 헌법제정국민의회에 의해 해체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공직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1792

[혁명의 압박, 화약국장직 사임 및 연구소 이전]

프랑스 혁명 정국의 압박 속에서 화약국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에 따라 병기창에 있던 그의 집과 연구소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는 그의 과학 활동에 큰 제약이 되었습니다.

1793

[학문의 전당,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폐쇄]

프랑스 혁명 정부의 광풍 속에서 그가 속해 있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를 비롯한 수많은 학술 기관이 강제로 문을 닫았습니다.

라부아지에는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세금 징수원 혐의로 체포 및 투옥]

혁명 정부의 전직 세금 징수원에 대한 숙청 분위기 속에서, 국민 공회의 발의가 통과되면서 그의 장인과 함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1794

[근대 화학의 아버지가 단두대에 오르다]

혁명 정부에 의해 유죄가 선고되어 장인과 함께 파리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참수형을 당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공동묘지에 버려졌습니다.

수학자 라그랑주는 "이 머리를 베는 데는 일순간으로 충분하지만, 프랑스에서 같은 두뇌를 만들려면 100년도 넘게 걸릴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아내 마리안의 시련과 투쟁]

라부아지에 처형 직후 그의 모든 재산이 몰수되고, 아내 마리안 역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안은 사형을 면하고 그해 8월 17일 풀려났습니다.

12월 10일 'Le cri dis familles' 출판으로 세금 징수원 유족의 비극적 상황이 알려지며 여론의 지지를 얻었고, 마리안은 1795년 관련자들을 기소하여 1796년 4월 공식적으로 남편의 유품을 돌려받았습니다.

1795

1795.10.22 사후 1년

[뒤늦은 애도와 재평가 시작]

그의 처형이 부당했다는 여론이 일면서, 천문학자 제롬 랄랑드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후 파리에서 첫 번째 장례식이 치러지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1796

1796.08.02 사후 2년

[위대한 과학자에 대한 국가적 애도]

라부아지에를 기리는 두 번째 장례식이 3,000명이 넘는 참여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수많은 찬사와 애도가 쏟아지며 프랑스 과학계는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고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1802

[조수 엘뢰테르 이레네 뒤퐁, 듀폰사 설립]

라부아지에의 조수였던 엘뢰테르 이레네 뒤퐁은 프랑스 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하여, 훗날 세계 최대의 화학 기업 중 하나가 되는 듀폰사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라부아지에의 영향력이 다른 방식으로 계승된 흥미로운 결과입니다.

1805

[마리안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삶과 죽음]

라부아지에 사후, 그의 아내 마리안은 럼포드 백작 벤저민 톰프슨과 재혼했으나, 1836년 2월 10일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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