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 경제학

경제학, 거시경제학, 사회과학

num_of_likes 93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8- 14:31:21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케인스 경제학
경제학, 거시경제학, 사회과학
report
Edit

케인스 경제학은 20세기 대공황이라는 전례 없는 경제적 재앙에 맞서 탄생한 혁명적 사상입니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고전파 경제학의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과 '유효 수요'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거시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경제 정책의 나침반 역할을 하며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팬데믹 등 자본주의가 중대한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다시금 소환되어 국가 경제의 구원투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919

[평화의 경제적 결과]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케인스는 독일에게 부과된 과도한 배상금이 유럽 전체의 경제적 파멸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승전국들의 근시안적인 복수심이 향후 더 큰 갈등의 불씨가 될 것임을 예견했습니다. 이 저서는 케인스가 국제적인 경제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을 비판하며 독일의 지불 능력을 넘어선 배상금 요구가 유럽 경제의 불균형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경제적 불안정이 정치적 극단주의(나치즘의 부상 등)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 선지적인 저술로 평가받습니다.
[출처: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https://en.wikipedia.org/wiki/The_Economic_Consequences_of_the_Peace)

1923

[화폐 개혁론 발표]

통화 가치의 안정성이 경제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저서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물가 안정을 위해 통화량을 조절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경제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인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표현이 이 시기에 등장했습니다.

금본위제 복귀에 반대하며 관리통화제도의 필요성을 선제적으로 제안했습니다.
단기적인 경제 문제 해결을 외면하고 장기적인 균형만을 강조하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이 책은 이후 그가 전개할 거시경제적 통찰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1925

[금본위제 복귀 반대]

영국 정부가 전쟁 전 수준으로 금본위제에 복귀하려 하자 케인스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인위적인 고환율 정책이 영국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실업을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영국 경제는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습니다.

'처칠 씨의 경제적 결과'라는 소책자를 통해 통화 가치 과대평가가 노동자의 실질 임금을 깎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영국 산업계는 이 정책으로 인해 극심한 타격을 입고 1926년 대파업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통찰은 훗날 시장의 자율적 조정 능력을 불신하게 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1929

[검은 목요일의 발생]

미국 뉴욕 증시의 대폭락과 함께 전 세계적인 대공황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시장이 스스로 수급을 조절한다는 고전파의 '세이의 법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현실이 드러났습니다.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률이 치솟으며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붕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당시 경제학계는 이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시장의 자동 회복을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 주류였습니다.
케인스는 이 전대미문의 사태를 목도하며 기존 경제학 체계의 근본적인 오류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케인스 혁명'을 촉발시킨 역사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1930

[화폐론의 출간]

투자와 저축의 불일치가 경제 순환의 교란을 일으킨다는 분석을 담은 두 권 분량의 대작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시장 금리가 자연 금리와 일치하지 않을 때 경기 변동이 발생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비록 이 책은 나중에 출간될 '일반이론'의 과도기적 성격이 강했으나 분석의 틀을 정교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저축과 투자의 관계를 이윤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려 시도했습니다.
출간 직후 동료 경제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케인스 스스로도 자신의 이론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케인스 서클(Keynes Circus)이라는 연구 집단이 형성되어 이론 보완에 나섰습니다.

1931

[승수 효과의 발견]

케인스의 제자 리처드 칸이 정부 지출이 전체 소득에 미치는 영향을 수치화한 승수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초기 투자가 연쇄 반응을 일으켜 경제 전체에 더 큰 소득 증대를 가져온다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케인스는 이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하여 자신의 이론 체계에 통합시켰습니다.

칸의 논문 '고용에 대한 홈 투자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고용 승수 개념이 명확히 제시되었습니다.
이는 불황기에 왜 정부의 재정 지출이 효과적인지를 설명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승수 효과는 훗날 케인스주의 재정 정책의 핵심적인 논거로 자리 잡았습니다.

1933

[번영을 위한 수단]

대공황 타개를 위해 정부가 대규모 공공사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정책 제안을 담은 소책자를 발간했습니다. 그는 재정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총수요를 부양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제안은 당시 긴축 재정을 고수하던 정부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혁신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공공 지출의 증가가 세수를 다시 증대시켜 장기적으로 재정 건전성을 회복시킨다는 역발상을 제시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의 성격도 띠고 있었습니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논리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1934

[루스벨트와의 만남]

케인스는 미국을 방문하여 프랭크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직접 만나 경제 정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는 뉴딜 정책의 방향성을 긍정하면서도 정부 지출의 규모를 더 과감하게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비록 두 사람의 만남이 즉각적인 정책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서로의 사상적 교감이 이루어졌습니다.

루스벨트는 처음에 케인스를 경제학자라기보다 통계학자로 생각하여 대화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케인스의 이론은 이후 뉴딜 정책이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 행정부 내에 케인스주의 성향의 참모들이 대거 포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6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현대 거시경제학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인 저서를 출간하며 기존 경제학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그는 경제가 항상 풀고용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 부족으로 인한 '비자발적 실업' 상태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케인스 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전파의 공급 중심 이론을 비판하고 '유효 수요'의 원리를 경제 분석의 중심으로 가져왔습니다.
소비 성향, 투자의 한계 효율, 유동성 선호 등 현대 경제학의 필수 개념들이 처음으로 체계화되었습니다.
[출처: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https://en.wikipedia.org/wiki/The_General_Theory_of_Employment,_Interest_and_Money)

[유효 수요의 원리 확립]

경제 전체의 생산량과 고용 수준은 단순히 생산 능력이 아니라 실제로 물건을 사려는 총수요에 의해 결정됨을 입증했습니다. 이는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팔린다는 낙관론을 깨뜨리는 차가운 현실 분석이었습니다. 정부가 수요를 관리해야 할 경제학적 명분이 이 원리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소비 수요와 투자 수요의 합이 소득과 일치해야 하는 '총수요=총공급'의 새로운 균형식을 제시했습니다.
불황기에는 민간의 투자 의욕이 낮으므로 정부가 그 빈자리를 채워 유효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현대 각국 정부의 경기 부양책의 기본 논리가 되었습니다.

[유동성 선호 이론 제시]

사람들이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현금을 보유하려는 성향이 이자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이자율은 단순히 저축의 대가가 아니라 현금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정의되었습니다. 이는 통화 정책이 실물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경로를 명확히 밝힌 것입니다.

거래적, 예비적, 투기적 동기라는 세 가지 현금 보유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특히 '투기적 동기'는 자산 시장의 기대 심리가 경제 전체의 이자율과 연결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 이론은 이후 화폐 경제학의 핵심 토대가 되었습니다.

[야성적 충동의 개념 도입]

경제 주체들의 투자가 합리적인 계산뿐만 아니라 인간의 직관과 낙관주의 같은 심리적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습니다. 케인스는 이를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라 부르며 시장의 불안정성을 설명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비합리성을 경제 모델에 포함시킨 선구적인 시도였습니다.

기업가가 투자를 결정할 때 단순히 확률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는 본능적 충동'에 의존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는 심리적 변화에 따라 급격한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습니다.
현대 행동경제학의 기원 중 하나로 꼽히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임금의 하방 경직성 설명]

불황이 닥쳐도 노동자의 임금이 쉽게 내려가지 않는 성질 때문에 실업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논증했습니다. 고전파의 주장처럼 임금이 즉각 조정되지 않기 때문에 시장의 자동 복구 기능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경직성'은 케인스주의 모델의 핵심 가정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이 화폐 임금의 절대적 삭감에 저항하며, 노동조합 등 사회적 구조가 임금 조정을 방해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실질 임금을 낮추기 위해서는 명목 임금 삭감보다 완만한 물가 상승이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이후 '뉴케인스주의'에서도 이 가격 경직성 개념을 계승하여 발전시켰습니다.

1937

[IS-LM 모형의 탄생]

존 힉스가 케인스의 '일반이론'을 수식과 그래프로 단순화한 IS-LM 모형을 발표했습니다. 이 모형은 생산 시장과 화폐 시장의 균형을 동시에 보여주어 정책 결정자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케인스의 난해한 사상이 대중적인 경제 교육용 도구로 변모한 순간이었습니다.

재정 정책(IS 곡선)과 통화 정책(LM 곡선)의 조합이 어떻게 균형 소득을 만드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케인스 본인은 자신의 사상이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것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으나, 이 모형은 수십 년간 거시경제학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경제학 교과서에서 거시경제학의 입문 단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1940

[전쟁 비용 조달 방법]

제2차 세계대전에 직면한 영국 정부를 위해 인플레이션 없이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세금을 올리는 대신 강제 저축과 배급제를 결합한 '연기된 소비'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불황뿐만 아니라 전시 과열 경제에서도 케인스 이론이 유효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시 소득 증가가 물가 폭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득의 일부를 강제로 저축하게 하고 전후에 돌려주자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영국 정부는 그의 제안 중 일부를 받아들여 전시 재정 운용에 활용했습니다.
케인스는 이 시기 재무부 고문으로 복귀하여 실무 정책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1944

[방코르 제안]

케인스는 국제 무역 결제를 위해 '방코르(Bancor)'라는 가상의 세계 공용 통화를 도입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특정 국가의 통화가 기축 통화가 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불안정성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경제력을 가졌던 미국의 달러 중심 체제에 밀려 이 제안은 무산되었습니다.

무역 흑자국과 적자국 모두에게 불균형 시정의 의무를 부과하는 획기적인 시스템이었습니다.
흑자국이 너무 많은 방코르를 쌓아두면 벌금을 부과하여 세계 수요의 위축을 막으려 했습니다.
최근 달러 패권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마다 케인스의 방코르 구상이 재평가되기도 합니다.

[브레턴우즈 회의 참석]

전후 세계 경제 질서를 설계하기 위해 열린 브레턴우즈 회의에 영국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그는 국가 간 결제 시스템의 불균형을 막기 위한 범세계적인 통화 체계 구축을 제안했습니다. 미국 대표인 화이트와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현대 국제 금융 기구의 모태를 만들었습니다.

이 회의를 통해 국제통화기구(IMF)와 세계은행(IBRD)의 설립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비록 케인스의 구상이 전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국제 협력을 통한 경제 안정이라는 그의 신념이 제도화되었습니다.
[출처: Bretton Woods Conference](https://en.wikipedia.org/wiki/Bretton_Woods_Conference)

1946

[거인의 서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전후 영국의 차관 협상과 경제 재건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비록 생을 마감했으나 그의 이론은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전후 세계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국제 무대에서 영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협상을 이끌었습니다.
사후에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 서구 국가들은 약 30년 동안 케인스주의를 공식 경제 기조로 채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영국의 국부적인 예우 속에 거행되었습니다.

1948

[사무엘슨의 경제학 발간]

폴 사무엘슨이 케인스 경제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과서 '경제학(Economics)'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다음 세대 경제학자들이 케인스적 사고를 익히는 표준 매뉴얼이 되었습니다. '신고전파 종합'이라는 이름 아래 현대 경제학의 틀이 공고해졌습니다.

미시경제학의 분석 도구와 케인스의 거시경제학을 결합하여 현대 경제학의 표준적인 체계를 정립했습니다.
수많은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되어 케인스 경제학이 학계의 주류(Mainstream)로 안착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책은 현재까지도 개정을 거듭하며 출판되고 있는 경제학의 고전입니다.

1950

[전후 황금기의 시작]

케인스주의 정책을 수용한 서구 경제는 낮은 실업률과 높은 성장률을 동시에 기록하는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정부는 공공 지출과 사회 복지를 확대하며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 시기는 케인스 경제학이 현실 경제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시대였습니다.

미국의 마셜 플랜을 통한 유럽 재건 과정에서 케인스적 재정 확장 정책이 큰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중산층이 확대되고 대중 소비 사회가 도래하면서 자본주의의 안정적 성장이 지속되었습니다.
이후 약 20년간을 경제학사에서 '황금기'라고 부릅니다.

1958

[필립스 곡선의 발견]

경제학자 빌 필립스가 실업률과 물가 상승률 사이에 상충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이터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정부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약간의 인플레이션을 용인해도 된다는 케인스주의 정책의 정당성을 뒷받침했습니다. 정책 결정자들은 이 곡선을 보고 최적의 정책 배합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낮은 실업률을 유지하려면 높은 물가 상승을 감수해야 하고, 물가를 잡으려면 실업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선택 모델입니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이를 통해 미세 조정(Fine-tuning)이 가능하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1970년대의 경제 위기는 이 단순한 관계가 영원하지 않음을 입증했습니다.

1965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

타임지가 표지 기사로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는 밀턴 프리드먼의 발언을 인용하며 케인스 학파의 전성기를 선언했습니다. 정파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권에서 케인스적 정책이 상식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케인스 경제학이 누린 사회적 위상의 정점이었습니다.

심지어 보수적인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조차 훗날 이 표현을 사용하며 정책적 합의를 보여주었습니다.
정부의 시장 개입과 거시경제 관리가 현대 국가의 당연한 의무로 인식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을 했던 프리드먼은 훗날 케인스주의를 무너뜨리는 통화주의의 기수가 됩니다.

1968

[자연실업률 가설의 등장]

밀턴 프리드먼이 필립스 곡선의 한계를 지적하며 정부가 억지로 실업률을 낮추려 하면 결국 인플레이션만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인플레이션을 예상하게 되면 정부의 부양 정책이 효과를 잃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케인스주의의 완벽한 성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첫 신호였습니다.

장기적으로 실업률은 경제의 구조적 요인에 의한 '자연적인 수준'으로 회복된다는 이론입니다.
케인스주의의 핵심 도구인 '미세 조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논쟁은 이후 거시경제학의 주도권이 케인스 학파에서 통화주의 학파로 넘어가는 전조가 되었습니다.

1971

[브레턴우즈 체제의 종말]

미국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 태환 중단을 선언하며 케인스가 설계에 관여했던 국제 금융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달러 가치의 불신과 무역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고정환율제 시대가 가고 변동환율제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는 케인스적 국제 협력 모델이 직면한 커다란 시련이었습니다.

금본위제와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어지면서 전 세계적인 통화 팽창과 인플레이션의 위험이 커졌습니다.
케인스가 우려했던 국제 수지 불균형의 문제가 더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경제적 패권 변화가 케인스주의적 세계 질서에 타격을 준 사건입니다.

1973

[제1차 석유 파동]

중동 전쟁으로 유가가 급등하며 전 세계 경제에 공급 측면의 충격이 들이닥쳤습니다. 물가는 오르는데 경기는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낯선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수요 관리만으로 경제를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던 케인스주의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공급 충격에 의한 인플레이션은 케인스주의의 전통적인 처방(수요 억제)으로 해결하기 어려웠습니다.
전후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케인스 경제학의 정책적 신뢰도가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이 위기를 틈타 통화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대안으로 급부상하게 되었습니다.

1975

[루카스 비판의 발표]

로버트 루카스가 정부의 정책 변화가 사람들의 기대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과거의 데이터에 기초한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면 정부의 인위적인 경기 부양책은 무력해진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케인스주의적 계량 모델에 대한 치명적인 이론적 타격이었습니다.

합리적 기대 가설을 바탕으로 거시경제 정책의 무용성을 논리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이로 인해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은 미시경제적 기초(Microfoundations)를 보완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경제학계의 패러다임이 '새고전파'로 급격히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9

[볼커의 강력한 긴축]

미국 연준 의장 폴 볼커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유례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긴축 정책을 단행했습니다. 고용보다 물가 안정을 우선시한 이 조치는 케인스주의적 접근법과는 정반대되는 행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물가는 잡혔지만 극심한 실업과 경기 후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연방기금금리를 20%까지 인상하는 초강수를 두어 인플레이션 기대를 꺾어놓았습니다.
이는 통화주의 정책이 실제로 작동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되었고, 케인스주의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케인스주의적 합의'가 완전히 무너지고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는 서막이었습니다.

1980

[신자유주의의 득세]

레이건과 대처가 집권하면서 시장 자율과 규제 완화를 강조하는 공급 중시 경제학이 득세했습니다. 정부 지출을 줄이고 복지를 축소하려는 움직임 속에 케인스 경제학은 '실패한 과거의 사상'으로 치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케인스주의의 명맥은 학계에서 조용히 진화하며 다음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노조를 압박하고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하는 정책이 세계적인 흐름이 되었습니다.
케인스주의는 정책의 최전선에서 밀려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일부 학자들은 케인스 이론의 문제점을 수정하며 '새케인스주의'를 준비했습니다.

1984

[효율 임금 가설의 등장]

조지 애컬로프와 재닛 옐런 등이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업이 높은 임금을 유지한다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왜 시장에 실업자가 있는데도 임금이 내려가지 않는지를 미시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케인스가 주장한 '임금 경직성'에 과학적인 근거를 부여한 것입니다.

노동자가 해고를 두려워할 만큼 충분한 임금을 줄 때 더 열심히 일한다는 심리를 분석했습니다.
이로 인해 노동 시장의 불균형이 정보 비대칭성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새케인스주의 학파가 이론적 정교함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85

[메뉴 비용 이론의 발전]

그레고리 맨큐 등 새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은 가격 조정에 들어가는 작은 비용이 경제 전체의 불황을 초래할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식당이 메뉴판을 바꾸는 정도의 사소한 비용 때문에 가격이 경직되고, 이것이 총수요 충격을 증폭시킨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케인스 경제학의 미시적 기반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비록 개별 기업에는 작은 비용일지라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큰 자원 배분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합리적 기대 가설 하에서도 가격 경직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새고전파의 비판에 맞서 케인스주의의 생명력을 연장시킨 핵심 이론입니다.

1990

[새케인스주의의 완성]

합리적 기대와 미시적 기초를 수용하면서도 시장의 실패 가능성을 인정하는 새케인스주의가 주류 경제학의 한 축으로 확립되었습니다. 그들은 불완전 경쟁과 가격 경직성을 토대로 정부의 정책 개입 필요성을 다시금 입증했습니다. 이는 과거의 케인스주의를 현대적으로 업그레이드한 결과였습니다.

불완전한 정보와 독과점 시장이라는 현실적인 전제를 도입하여 모델의 정확성을 높였습니다.
전통적 케인스주의보다는 덜 급진적이지만, 여전히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오늘날 각국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모델링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997

[아시아 금융 위기]

태국을 시작으로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극심한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무분별한 시장 개방의 위험성이 드러났습니다. IMF의 초기 긴축 처방이 오히려 경제를 악화시키자 케인스적 재정 확장 정책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습니다. 시장에만 모든 것을 맡기는 신자유주의 모델에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한 사건이었습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케인스주의 성향 학자들은 IMF의 가혹한 긴축 정책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후 위기 극복 과정에서 정부의 공적 자금 투입과 수요 부양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국제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을 통제해야 한다는 케인스의 통찰이 재조명되었습니다.

2001

[IT 버블 붕괴와 부양책]

인터넷 거품이 꺼지며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정부는 금리 인하와 세금 감면을 통해 발 빠르게 대처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케인스적 경기 부양책의 복귀를 의미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위기가 닥치면 결국 케인스적 처방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은 적극적인 금리 인하로 자산 시장 붕괴를 막으려 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대규모 감세를 통해 민간 소비를 자극하는 정책을 병행했습니다.
이러한 대응은 단기적으로 성공했으나, 훗날 더 큰 거품을 만드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2008

[글로벌 금융 위기의 폭발]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함께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이 멈춰 서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시장의 합리성을 믿었던 많은 경제학자들이 충격에 빠졌고 자본주의는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거대한 공포 앞에서 세상을 구할 유일한 대안으로 다시 케인스가 호출되었습니다.

복잡한 파생상품과 탐욕이 결합된 시장 실패의 전형적인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금융 시장의 유동성 고갈로 인해 '유동성 함정'의 공포가 현실화되었습니다.
[출처: Global Financial Crisis](https://en.wikipedia.org/wiki/2007%E2%80%932008_financial_crisis)

2009

[거대한 정부의 귀환]

미국 오바마 정부를 비롯한 주요국들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시장에 쏟아붓는 경기 부양책을 승인했습니다. 케인스의 가르침대로 정부가 '최종 소비 주체'로 나서서 붕괴하는 수요를 떠받쳤습니다. 이 조치는 세계 경제가 대공황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의 '미국 회복 및 재투자법'은 약 7,870억 달러 규모의 재정 지출을 포함했습니다.
동시에 중앙은행들은 '양적 완화'라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했습니다.
폴 크루그먼 등 현대 케인스주의자들은 더 과감한 지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여론을 이끌었습니다.

2010

[거장의 귀환 열풍]

금융 위기 이후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거장의 귀환' 같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며 케인스 사상이 대중적으로 다시 유행했습니다. 언론과 학계에서는 '우리는 다시 케인스주의자가 되었다'는 고백이 이어졌습니다. 시장의 불완전성을 경고했던 그의 예리한 통찰은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증명되었습니다.

스키델스키는 케인스 전기의 결정판을 쓴 저자로, 위기 상황에서 그의 사상이 왜 유효한지 설파했습니다.
'야성적 충동'과 '불확실성'에 대한 케인스의 논의가 현대 금융 위기를 설명하는 핵심 열워드로 재발견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독주가 끝나고 혼합 경제에 대한 담론이 다시 활성화되었습니다.

2013

[구조적 정체론 논의]

로런스 서머스가 선진국 경제가 장기적인 저성장과 저물가 늪에 빠지는 '구조적 정체(Secular Stagnation)'에 직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케인스가 과거에 언급했던 장기 불황의 가능성을 현대적 맥락에서 되살린 것입니다. 민간의 투자 의욕이 구조적으로 낮은 상태에서는 정부의 지속적인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논리가 강화되었습니다.

과잉 저축과 투자 기회 부족이 만성적인 유효 수요 부족을 일으킨다는 분석입니다.
금리를 아무리 낮춰도 성장이 돌아오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며 재정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후 각국 정부의 인프라 투자 및 친환경 전환 투자 정책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2020

[코로나19와 헬리콥터 머니]

전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경제 활동이 일시에 중단되자 국가들은 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직접 현금 지원을 단행했습니다. 고용을 유지하고 가계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정부가 직접 시장에 개입하는 '슈퍼 케인스주의'적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선택으로 여겨졌습니다.

미국은 수조 달러 규모의 부양책을 통해 전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했습니다.
각국 정부는 기업의 도산을 막기 위해 대규모 대출 보증과 직접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케인스가 강조했던 '정부의 최종 고용자 역할'이 변형된 형태로 실천된 사례입니다.

2021

[포스트 팬데믹 인플레이션]

대규모 경기 부양의 여파와 공급망 차질이 겹치며 수십 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이 찾아왔습니다. 일각에서는 케인스주의적 정책이 지나쳐 경제를 과열시켰다는 비판을 제기했습니다. 이는 다시금 물가 안정과 경기 부양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라는 고전적인 숙제를 경제학계에 던졌습니다.

서머스 등 일부 경제학자들은 부양책의 규모가 너무 커서 과도한 수요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것이라고 미리 경고했습니다.
중앙은행들은 다시 금리를 급격히 올리며 긴축으로 선회했고, 케인스주의적 확장은 잠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수요 관리의 정교함이 부족할 때 발생하는 부작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습니다.

2022

[현대 화폐 이론의 부상]

케인스주의의 극단적인 변형이라 할 수 있는 현대 화폐 이론(MMT)이 대중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자국 통화를 발행하는 국가는 재정 적자에 구애받지 않고 풀고용을 위해 지출해도 된다는 주장입니다. 주류 케인스주의자들과는 견해 차이가 있으나 정부 지출의 힘을 믿는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합니다.

스테파니 켈튼 등의 학자들이 주도하며 불평등 해소와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무제한적 재정 사용을 옹호합니다.
전통적인 케인스주의자들은 인플레이션 위험을 간과한다며 MMT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입니다.
하지만 위기 시 정부의 역할에 대한 상상력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2023

[산업 정책의 화려한 부활]

미국과 유럽이 반도체 및 친환경 에너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대규모 보조금을 투입하며 산업 정책에 나섰습니다. 이는 시장의 효율성에만 맡기지 않고 국가가 전략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케인스적 개입주의의 변용입니다. 자유 무역의 시대가 가고 '큰 정부'가 주도하는 지경학적 시대가 열렸습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시장 실패를 교정하는 수준을 넘어,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정부가 직접 시장의 방향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이는 케인스가 꿈꿨던 '자본의 사회화'가 국가 전략과 결합한 현대적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4

[기후 케인스주의 담론]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녹색 투자를 통한 경기 부양을 시도하는 '기후 케인스주의'가 핵심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화석 연료 기반 경제에서 친환경 경제로의 대전환을 정부의 강력한 재정 지출로 이끌어야 한다는 논의입니다. 이는 경제적 풍요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까지 책임지는 확장된 케인스주의입니다.

그린 뉴딜 정책은 과거 루스벨트의 뉴딜을 기후 위기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것입니다.
공공 투자가 새로운 기술 혁신을 자극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를 목표로 합니다.
케인스 사상이 단순한 경기 순환 조절을 넘어 인류 공동의 목표 달성 도구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