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철학, 유가, 학파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9:43
- 양명학은 명나라 철학자 왕수인이 집대성한 유교 학파입니다. - 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즉리 양지를 아는 것 치양지 앎과 행동의 일치 지행합일이 핵심 사상입니다. - 기존 주자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며 등장했습니다. - 중국뿐 아니라 조선 일본 등 동아시아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특히 인간의 욕구를 긍정하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혁신적 사상으로 평가받습니다.
1139
육왕학의 육(陸)을 담당하는 육구연이 태어났다. 그는 왕수인과 함께 육왕학의 기초를 다진 학자이다.
1192
육왕학의 육(陸)을 담당하는 육구연이 사망했다. 그의 학풍은 훗날 왕수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1472
[왕수인(왕양명) 탄생]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수인(왕양명)이 중국 명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훗날 주자학의 한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유교 사상을 제시하게 된다.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이자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수인(王守仁)이 태어났다. 그의 호는 양명이며, 이 호를 따서 학파의 이름이 양명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1473
조선 시대 문신이자 유학자인 김세필(金世弼)이 태어났다. 그는 훗날 양명학의 전래 초기에 박상과 함께 양명학을 비판하는 데 참여했다.
1474
조선 시대 문신이자 유학자인 박상(朴祥)이 태어났다. 그는 훗날 《눌재집》 연보에 양명학의 전래 사실과 자신의 비판을 기록했다.
1491
왕수인의 제자이자 양명학 유파 중 정통파인 양명우파에 속하는 추수익(鄒守益)이 태어났다.
1496
왕수인의 제자이자 양명학 유파 중 정통파인 양명우파에 속하는 전서산(錢緖山)이 태어났다. 그는 왕용계와 4구결을 둘러싸고 대립하며 분파를 형성했다.
1498
왕수인의 제자이자 양명학 유파 중 현성파로 분류되는 양명좌파의 학자인 왕용계(王龍溪)가 태어났다. 그는 왕양명의 4구결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1504
왕수인의 제자이자 양명학 유파 중 정통파인 양명우파에 속하는 나홍선(羅洪先)이 태어났다.
1510
양명학 좌파의 학자인 왕벽(王檗)이 태어났다.
1521
조선 중종 16년(1521년) 이전에 양명학이 조선에 전래되었음이 확인된다. 박상과 김세필은 왕양명의 《전습록》을 접하고 양명학을 불교의 선학(禪學)과 동일시하며 배척하는 논쟁을 시작했다.
1527
양명학 좌파 학자 중 한 명으로, 왕용계의 사상을 계승하여 인욕(人欲)의 긍정으로 발전시킨 이탁오(李卓吾, 이지)가 태어났다.
1528
[왕수인(왕양명) 사망]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수인(왕양명)이 사망했다. 그의 사망 이후 제자들은 양명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여러 유파로 나뉘어 학설을 발전시켰다.
양명학을 창시한 왕수인(왕양명)이 사망했다. 그의 사망 이후 양명학은 제자들에 의해 귀적파, 수증파, 현성파 등 다양한 유파로 나뉘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1529
조선 시대에 양명학을 수용하고 연구한 학자 남언경(南彦經)이 태어났다. 그는 주자학이 지배적인 조선 유학계에서 양명학의 명맥을 이었다.
1530
조선 시대에 양명학의 전래 초기에 이를 선학이라 비판했던 박상(朴祥)이 사망했다.
1533
조선 시대에 양명학 전래 초기에 박상과 함께 《전습록》을 비판했던 김세필(金世弼)이 사망했다.
1562
왕수인의 제자이자 양명우파에 속했던 추수익(鄒守益)이 사망했다.
1564
왕수인의 제자이자 양명우파에 속했던 나홍선(羅洪先)이 사망했다.
1574
왕수인의 제자이자 양명우파에 속했던 전서산(錢緖山)이 사망했다.
1578
양명학 우파에 속하는 유종주(劉宗周)가 태어났다.
1583
왕수인의 제자이자 양명좌파에 속했던 왕용계(王龍溪)가 사망했다.
1587
조선 시대 문신이자 학자로 미미하게나마 양명학을 연구하며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했던 장유(張維)가 태어났다.
양명학 좌파의 학자 왕벽(王檗)이 사망했다.
1594
조선 시대에 양명학을 수용하고 연구했던 남언경(南彦經)이 사망했다.
1638
조선 시대 문신이자 양명학을 연구하며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했던 장유(張維)가 사망했다.
1645
양명학 우파에 속하는 유종주(劉宗周)가 사망했다.
1649
조선 후기 양명학을 크게 발전시켜 강화학파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제두(鄭齊斗)가 태어났다.
1650
청나라 시대가 시작되면서 주자학을 확립하려는 황제들의 노력과 고증학의 득세로 양명학은 점차 쇠퇴하여 성리학을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1681
조선 후기 실학자로 주자학의 주지주의적 공리공론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여 양명학적 경향을 보인 이익(李瀷)이 태어났다.
1736
조선 후기 양명학을 크게 발전시켜 강화학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제두(鄭齊斗)가 사망했다.
1840
[아편 전쟁 이후 양명학의 중국 재부활]
제1차 아편 전쟁을 계기로 중국에서 개혁의 움직임이 일었고, 일본을 통해 양명학이 역수입되며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기 시작했다.
1840년을 주기로 발발한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인들 사이에서 개혁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던 양명학이 일본으로부터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중국 국민들에게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