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학
학문, 유학, 중국사, 철학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9:43
-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반 혼란기에 등장한 실증주의 유학입니다. - 주관적인 양명학을 비판하며 문헌학과 언어학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 강희 옹정 건륭제 시기 사상 탄압을 겪으며 경세치용에서 순수 실증 연구로 변모했습니다. - 건륭-가경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비정치적 성격으로 청말 혼란기에 쇠퇴했습니다. - 고염무 황종희 등 초기 거장들이 기틀을 다지고 대진 등이 집대성한 학문입니다.
1600
[혼란 속 피어난 실증주의, 고증학의 태동]
명말 청초의 격동기, 주관적 '공론'에 치우친 양명학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학문적 요구가 커졌습니다.
이에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 '청초 3대유'는 경세치용(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의 정신으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학문 연구를 시작하며 고증학의 싹을 틔웠습니다.
명나라 말기의 정치적 혼미와 만주족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유로(遺老)들이 반만반청(反滿反淸)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경세치용을 내세웠습니다. 이들의 학문은 실제 정치와 사회에 대한 역할을 중시하며,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 비추어 구체적인 방책을 논했고, 이는 고증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661
['문자의 옥'을 피해 학문적 방향을 틀다]
청 왕조의 지배가 공고해지자, 강희, 옹정, 건륭 3대에 걸쳐 '문자의 옥'과 같은 사상 탄압이 강해졌습니다.
이에 고증학은 반만(反滿) 민족의식이나 경세치용적 요소가 표면적으로 사라지고, 학자들은 정치적 위험이 적은 순수 실증 연구, 즉 문헌학과 언어학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청초의 학풍에서 경세치용적 요소와 반만 민족의식이 사라지면서 오직 실증적인 측면만이 발전하게 되었고, 이는 건륭으로부터 가경에 걸친 고증학 전성시대를 이끄는 배경이 됩니다. 고증학은 한대 훈고학의 복귀를 목표로 한학(漢學)의 기치를 들고 실사구시를 모토로 삼았습니다.
1700
[고증학에 맞선 새로운 흐름, 동성파의 탄생]
고증학이 실증적 연구에 몰두하는 동안, 안후이성 동성(桐城)의 방포는 송대 유학을 숭상하고 당송팔대가의 고문을 이상으로 하는 '동성파' 학풍을 열었습니다.
이 학파는 요내, 청말 증국번 등으로 이어지며 고증학과는 다른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1735
[거대 학문의 꽃을 피우다, 《사고전서》로 정점을 찍은 실증주의]
건륭제부터 가경제에 이르는 시기는 고증학의 전성기였습니다.
고염무의 뒤를 이어 염약거, 호위 등이 기초를 닦았고, 쑤저우 학파(혜동, 전대흔 등)와 안후이 학파(강영, 대진, 단옥재 등) 같은 수많은 학파와 학자들이 배출되어 다채로운 학풍을 겨루었습니다.
특히, 청대 고증학의 집대성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백과사전 편찬 사업인 《사고전서》의 발기와 완성은 이 시기 고증학의 학문적 성과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순수한 한학을 개척한 쑤저우의 혜동과 그 계통의 여소객, 강성, 왕명성, 전대흔(오파), 고염무의 학풍을 받고 다시 천문역산·예제의 학에 뛰어난 안후이의 강영과 그 계통의 대진, 단옥재, 왕염손, 왕인지(완파)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활약했습니다. 《사고전서》는 북경의 주균이 발기하고 기균이 완성했으며, 대관료 완원 역시 고증학의 집대성자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1850
[시대의 변화에 흔들리다, 고증학의 쇠퇴와 공양학의 부상]
청대 중기에서 말기에 이르며 청조의 정치적, 사회적 곤란이 격화되자, 비정치적인 성격의 고증학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혼란한 시대를 해결하기 위한 학문적 요구가 커지면서, 실용성을 중시하는 경세치용의 학문인 공양학(公羊學)이 새롭게 대두하며 고증학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1890
[혁명가이자 학자, 고증학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청말 민국 초의 유명한 혁명가이자 학자인 장빙린(章炳麟)은 청조 고증학 최후의 대가로 꼽힙니다.
그는 고증학의 엄밀한 방법론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혁명 사상과 결합하는 독특한 길을 걸어, 혼란기 중국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