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교

종교, 영지주의, 고대 종교, 중세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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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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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는 3세기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가 창시한 이란 계통의 영지주의 종교입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대립을 설명하는 독특한 우주론을 가르쳤죠. 한때 로마 제국에서 중국까지 전파되어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졌으나 기존 종교들의 박해로 서양에서 빠르게 사라졌고 위구르 제국의 국교였던 시기를 거쳐 동양에서도 14세기경 소멸했습니다. 인류의 흥미를 자극하는 신비롭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지닌 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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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마니교 창시자 마니 탄생]

마니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마니가 바빌로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설교를 시작했으며, 청년 시절 신적 존재로부터 계시를 받아 진리를 깨달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영은 그에게 구원의 통찰력을 가져다주어 '영지주의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진리의 파라클레토스'라고 주장하며, 인류에게 물질체에 갇힌 영적인 빛의 근원을 일깨우는 사명을 지녔다고 믿었습니다.

마니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마니는 기원후 216년경 바빌로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르사케스 왕조 출신의 페르시아인이었으며, 그의 부모는 엘카사이파 교인이었습니다. 마니는 젊은 나이에 설교를 시작했고, 만다야교나 유대교 계시 문헌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알나딤과 알비루니의 전기에 따르면, 마니는 청년 시절 한 영으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이 영을 자신의 쌍둥이, 시지고스, 수호천사 또는 신적 자아라고 불렀습니다. 이 신적인 자아는 마니에게 진리들을 가르쳤고, 마니는 이를 하나의 종교로 발전시켰습니다. 마니교 전통에서는 이 신적인 자아가 마니에게 '자아에 대한 완전한 앎'을 가져다주어 그를 '영지주의자'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마니는 자신이 신약성경에서 예수에 의해 제자들에게 약속된 '진리의 파라클레토스'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241

[마니, 샤푸르 1세에게 『샤푸라간』 헌정 및 마니교 확산]

마니가 자신의 가르침을 요약한 『샤푸라간』을 중세 페르시아어로 저술하여 당시 사산 제국의 왕 샤푸르 1세에게 헌정했습니다. 샤푸르 1세는 마니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제국 내 마니교 확산을 용인하고 박해를 금지하여 마니교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마니교는 이 시기 페르시아 제국의 후원을 받아 선교 활동을 활발히 펼치며 확산되었습니다.

마니는 일곱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이들 중 여섯 권은 시리아 아람어로 저술되었습니다. 일곱 번째 책, 『샤푸라간』은 중세 페르시아어로 저술되었는데, 마니는 이 책을 사산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에서 당시의 사산 제국의 왕이었던 샤푸르 1세(재위 241~272)에게 헌정했습니다. 샤푸르 1세가 마니교 신자였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는 자신의 제국의 영토 내에서 마니교가 확산되는 것을 용인했고 마니교에 박해를 가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한 전승에 따르면 마니는 '마니교 문자'라고 불리는 시리아어 문자의 독특한 버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니교는 마니 이전의 예언자들(아담, 자라투스트라, 붓다, 예수)의 가르침이 타락했다고 주장하며, 마니의 가르침이 원래의 완전한 모습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로써 마니교는 다른 종교의 신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경전에 적합하게 바꾸는 등 포용적인 태도로 확산되었습니다.

274

[마니교 창시자 마니 옥사]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가 감옥에서 옥사했습니다. 그는 다음 세대 페르시아 황가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바흐람 1세에 의한 처형을 기다리던 중 사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로써 마니교는 창시자를 잃었으나, 이미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어 세계 종교로서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마니교가 확산되고 있던 시기에,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기존 종교들은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마니교의 신봉자들의 수는 적었으나, 마니교는 당시의 여러 고위 정치인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후원으로 마니는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의 페르시아 황가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또한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마니는 페르시아 황제 바흐람 1세에 의한 처형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옥사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니의 사망 연대는 기원후 276~277년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그의 생몰연대가 216~274년으로 기록된 자료에 따라 274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280

[마니교 로마 전파 및 초기 번성]

마니교는 사도 프사티크에 의해 로마 제국으로 전파되었으며, 290년에는 이집트 파이윰 지역에서 크게 번성했습니다. 마니교의 확산은 기존 종교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어, 헬레니즘,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불교 문화권에서 대대적인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마니교는 동서양을 아울러 가장 널리 퍼진 세계 종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마니교는 동쪽과 서쪽 두 방향으로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습니다. 마니교가 로마에 전파된 것은 사도 프사티크에 의한 것으로 이는 가장 늦게 잡아도 기원후 280년경에 이루어졌습니다. 프사티크는 또한 244~251년 동안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마니교는 290년에 이집트의 파이윰 지역에서 번성했습니다. 기독교 교황 멜키아데(임기 311~314)가 교황좌에 있던 시기인 312년의 로마에는 마니교 사원이 있었습니다. 마니교의 확산과 성공은 다른 종교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졌으며, 헬레니즘,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불교 문화권에서 크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291

[페르시아 제국의 대규모 마니교 박해]

페르시아 제국에서 바흐람 2세에 의한 대규모 마니교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 사도 시신이 살해당하고 수많은 마니교도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는 마니교가 공식적인 종교 탄압에 직면한 첫 번째 사례 중 하나로, 이후 로마 제국에서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마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291년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에서 박해가 일어나 바흐람 2세(재위 276~293)에 의해 사도 시신이 살해되었고 또한 많은 마니교도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는 마니교가 발생지에서 큰 탄압에 직면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후 303년에 기독교를 크게 탄압했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는 그 이전의 296년에 마니교를 탄압하는 칙령도 발표했었습니다. 이 칙령의 결과로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많은 마니교 순교자가 발생했습니다.

296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마니교 탄압 칙령]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마니교를 탄압하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칙령은 '마니교의 지도자들과 주동자들을 최고의 형벌에 처하여 그들의 혐오스러운 경전들과 함께 화형에 처할 것'을 명했으며, 이로 인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수많은 마니교 순교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에서 마니교가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된 주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303년에 기독교를 크게 탄압했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는 그 이전의 296년에 마니교를 탄압하는 칙령도 발표했습니다. 칙령은 "마니교의 지도자들과 주동자들을 최고의 형벌에 처하여 그들의 혐오스러운 경전들과 함께 화형에 처할 것을 명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칙령의 결과로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많은 마니교 순교자가 발생했으며, 이는 로마 제국 내 마니교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382

[로마 테오도시우스 1세의 마니교 사형 칙령]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마니교 사제나 승려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381년 기독교인들이 마니교도의 시민권 박탈을 요구한 데 따른 것으로,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적 종교로 선언되기 직전에 마니교에 대한 최후의 박해가 가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로 인해 서방 마니교는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381년에 기독교인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에게 마니교도의 시민권 박탈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382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마니교의 사제 혹은 승려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은 387년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적 종교로 선언하기 직전의 시기에 발생하여, 서방 세계에서 마니교가 종말을 맞이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387

[아우구스티누스,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

유명한 기독교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9년에서 10년간 유지했던 마니교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이후 마니교의 주요 비판자가 되었으며,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마니교에 대한 자신의 반대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종은 당시 서방 세계에서 마니교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기독교가 우위를 점하게 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387년에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387년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마니교를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한 382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고 또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적 종교로 선언한 391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의 저서 『고백록』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듣는 자'의 그룹에 속하여 9년 또는 10년간을 마니교 신앙을 지켰는데, 그 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마니교의 주요한 반대자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니교 주교였던 밀레베의 파우스투스의 견해에 반대하는 자신의 글에서 마니교에 대한 자신의 반대 의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믿음이 너무 수동적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믿음이 가진 사람의 삶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고 비판했습니다.

600

[마니교, 6세기 후반 중국에 전파]

오랫동안 7세기 말에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졌던 마니교가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6세기 후반에 이미 중국에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마니교가 동방으로 더 일찍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마니교는 교역로를 따라 중국의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전파되며 동방에서 그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오랫동안 학자들은 마니교가 7세기 말에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6세기 후반에 이미 마니교가 중국에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마니교는 교역로를 따라서 전파되어 당나라(618~907)의 수도인 장안까지 전파되었습니다.

763

[위구르 제국, 마니교를 국교로 채택]

위구르 제국의 칸 보쿠 테킨이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마니교는 840년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약 100년간 제국의 공식 종교로서 번성했습니다. 이는 마니교가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후원을 받았던 시기로, 동방 세계에서 마니교의 확산과 유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위구르 제국의 칸인 보쿠 테킨(759~780)은 763년에 마니교를 받아들였고 이후 840년에 위구르 제국(744~840/848)이 멸망하기까지 약 100년간 마니교는 위구르 제국의 국교로 존재했습니다. 이 시기 마니교는 동방으로 크게 확산되었으며, 위구르 제국의 후원 아래 많은 경전들이 위구르어와 중국어(한문)로 번역되었습니다.

775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마니교 탄압 및 학살]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3대 칼리프 알마흐디가 마니교를 '진디크'(이단)로 규정하고 대규모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단 심문소를 설치하여 마니교를 뿌리 뽑으려 했으며, 결국 마니교인들에 대한 전면적인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마니교가 심각한 박해에 직면하게 된 주요 사건입니다.

8세기에, 이스람 아바스 왕조의 제3대 칼리프인 알마흐디(재위 775~785)는 마니교를 탄압하였습니다. 그는 마니교를 '진디크'(이단)로 규정하고 진디크를 뿌리 뽑기 위한 이단 심문소를 설치하였는데 결국 마니교인들을 전면적으로 대학살하였습니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9세기에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제7대 칼리프인 알마으문(재위 813~833)이 마니교 공동체를 용인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840

[위구르 제국 멸망, 마니교 국교 지위 상실]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면서 마니교는 국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는 마니교가 동방에서 누리던 가장 강력한 정치적 후원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며, 이후 마니교는 중국 남부 등 일부 지역에서 명맥을 이어가다 14세기 이후 최종적으로 소멸했습니다.

위구르 제국의 칸인 보쿠 테킨이 763년에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으나, 840년에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면서 마니교는 국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이로 인해 마니교는 동방에서 강력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고, 이후 중국 남부에서는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에 마니교 전통의 일부가 홍건당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14세기 이후 최종적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1400

[중국 남부에서 마니교 최종 소멸]

중국 남부에서 마니교는 14세기 이후에야 최종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서양에서는 비교적 빨리 쇠퇴했지만, 동양에서는 네스토리우스교가 사라진 것과 비슷한 시기에 그 명맥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한때 동서양을 아우르며 번성했던 세계 종교 마니교의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서양에서는 마니교가 비교적 빨리 사라졌지만 동양의 경우 중국 남부에서는 14세기 이후에야 최종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는 네스토리우스교(경교, 동방의 교회)가 중국에서 쇠퇴하여 사라진 것과 동시대의 일입니다. 마니교는 발생 후 1000년 동안 서방에서 산발적으로 유지되었고, 발생지인 페르시아에서는 한때 크게 융성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 북부, 중국 서부와 티베트까지 전파되었으나, 지속적인 박해와 기존 종교들의 확산 속에서 결국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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