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 파괴 운동
기독교, 종교 운동, 교회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9:28
8~9세기 동방 기독교에서 성상(이콘) 숭배를 금지하고 파괴한 운동입니다. 동로마 황제 레오 3세가 726년 시작하여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의 강력한 반발과 내전 초래 결국 동서 교회의 분열을 가속화시켜 기독교 역사의 큰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황제와 교황의 권력 다툼 민족적 자의식 등 복합적 배경이 작용했으며 세계 최초의 대규모 교회 분열로 이어지는 주요 사건입니다.
726
[레오 3세, 성상 파괴 운동 공식 선포]
동로마 황제 레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징적인 건물인 칼케에 장식된 거대한 그리스도 성화를 파괴하며 성상 파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비잔티움 역사상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로, 황제는 신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화상 금지령'을 공식 선포하고 제국 전역에서 성상 파괴와 성인 유해 소각, 수도원 탄압 등을 대대적으로 시행했습니다.
730년에는 성상 숭배를 반대하는 공식 칙령을 발표하며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의 시작은 동로마 제국을 양분시켜 내전을 초래했고, 로마 교황청이 이를 비난하며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레오 3세가 이러한 칙령을 내린 정확한 이유는 불명확하나, 화산 분화 같은 천재지변이나 이슬람교의 우상 부정 비판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운동은 로마 교황이 동로마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날 명분을 제공하며 동서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2세의 반발과 세금 납부 중단]
동로마 황제의 성상 금지령에 대해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즉각 반발하며 모든 기독교도에게 황제에 맞설 것을 호소했습니다.
교황은 성상 파괴 교리를 비난했을 뿐 아니라, 교리 문제는 교황의 고유 소관이라고 주장하며 황제의 교리 선포 행위 자체를 공격했습니다.
또한, 서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던 세금 납부를 중단하며 재정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게르만족 포교에 성상이 필수적이었다는 이유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동로마 황제의 지속적인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서로마 교회의 민족적 자존심과 독립 욕구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황제 레오 3세는 이에 반발한 이탈리아인과 교황을 응징하기 위해 이탈리아 제국 영지에 중과세를 부과하고, 교황 폐위를 시도했으나 로마 시민들과 랑고바르드 공들의 저항으로 실패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인들의 민족 자의식이 더욱 불타올랐고, 교황은 황제의 압제에 맞서는 '자유의 수호자'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731
[교황 그레고리오 3세, 성상 파괴주의 공식 유죄 선언]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즉위하자마자 로마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고, 성상 파괴주의를 유죄로 공식 선언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사도 및 성인들의 성상을 파괴하거나 모독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에서 축출하겠다고 선언하며, 이 내용을 황제 레오 3세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서한으로 발송하여 강력한 경고를 보냈습니다.
성상 파괴주의에 대한 교황의 강력한 반대는 동로마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로마 교회가 스스로 교리 문제에 대한 최종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천명한 사건이었습니다.
732
[레오 3세, 교황에 대한 보복으로 교회 재산 몰수]
레오 3세 황제는 성상 금지령을 거역한 교황과 반항하는 이탈리아인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기 위해 함대를 이탈리아에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이 함대가 아드리아해에서 난파되어 큰 손실을 입자, 황제는 보복 조치로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일리리쿰에 있는 교회의 세습 재산을 몰수하고 이 지역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관할로 이전하며 교황의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이 사건은 두 그레고리오 교황(그레고리오 2세, 그레고리오 3세)이 성상 파괴 문제를 계기로 서방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교황은 로마 교회가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자 우두머리임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며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차별화했고, 서방 교회에서 동로마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종교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교황의 새로운 후원자로 등장하며 동서 교회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됩니다.
787
[이레네 여제, 제2차 니케아 공의회로 성상 공경 재확인]
동로마 여제 이레네가 주재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 공경의 정통성이 재확인되었습니다.
이는 한동안 지속되었던 성상 파괴 운동에 종지부를 찍고, 성상 숭배가 기독교 신앙의 일부임을 재천명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공의회는 첫 번째 성상 파괴령이 끝났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나, 이후 815년에 다시 제2차 성상 금지령이 발해지는 등 성상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812
[레오 5세, 제2차 성상 파괴령 발동]
동로마 황제 레오 5세는 812년 다시 한번 성상 파괴를 명령했습니다.
814년 6월, 황제는 성상 숭배가 근거 없음을 밝히는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고, 성상을 옹호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케포로스를 해임한 후 성상 파괴령을 발동했습니다.
이 조치는 제국의 폭동 위기를 넘기기 위한 현실적 이유에서 비롯되었으며, 황제의 종교적 신념보다는 정치적 안정에 목적을 두었기에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레오 5세의 성상 파괴령은 제1차와 달리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었습니다. 제국에 평화가 찾아오자 불만을 품은 전직 군인들과 군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들이 대부분 성상 파괴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폭동 위기를 넘기기 위해 성상 파괴를 재개했습니다.
843
[성상 파괴 운동의 종식과 동서 교회의 분열]
제2차 성상 파괴령은 843년에 종식되었으며, 성상 공경이라는 신앙 전통이 완전히 부활했습니다.
성상 공경과 파괴를 둘러싼 길고 치열했던 논쟁은 결국 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분리되어 두 조각이 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분열 중 하나이자, 세계 최초의 대규모 교회 분열로 기록됩니다.
성상 파괴 운동은 동로마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로마 교황에게 강력한 명분을 제공했으며, 여기에 정치적, 문화적 요인이 겹쳐 동서 교회의 분열을 가속화했습니다. 이는 기독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서방 교회(로마 가톨릭)가 독자적인 종교적,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