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

기독교 종파, 종교개혁,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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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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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종파, 종교개혁,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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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종교개혁 시기 기존 서방교회 전통을 거부하고 복음 중심의 급진적 교회 재건을 추구한 기독교 종파입니다. -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인의 재세례를 주장하여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 국가와 교회의 분리 비폭력주의 평등 실천 등을 핵심 교리로 삼았습니다. - 당시 국가 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신념을 지켰습니다. - 현대에는 아미시파 후터라이트 메노나이트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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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재세례파의 탄생과 박해의 시작]

16세기 종교개혁의 격동기, 재세례파는 기존 교회를 허물고 복음 위에서 급진적인 재건을 주장하며 등장했습니다.

이들의 독특한 신념은 초기부터 국가 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거센 반발을 불러, 혹독한 박해의 서막이 시작되었습니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인의 '재세례'만을 인정하는 파격적인 교리로 기존 기독교 교파들과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이름이 '다시 세례를 준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성경의 권위와 함께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했으며, 마태복음 산상수훈을 엄격히 따르며 비폭력, 병역 거부, 정부 불참 등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급진적 사상으로 인해 그들은 교황권은 물론 개신교 진영으로부터도 이단으로 지목되어 어떠한 특권도 누리지 못하고 심한 박해를 받게 됩니다.

1523

[네덜란드 재세례파의 대규모 희생 시작]

1523년부터 1566년에 이르기까지, 네덜란드에서는 재세례파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이어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무려 1만 3천 명이 넘는 재세례파 교인들이 잔인한 방식으로 희생되었으며, 이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치러야 했던 엄청난 대가를 보여줍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재세례파는 국가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존재로 여겨져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침례를 조롱하듯 산 채로 물에 빠뜨리거나 화형, 사지 절단 등 잔혹한 처형 방식이 만연했으며, 그 결과 1523년부터 40여 년간 1만 3천여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순교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재세례파 박해 역사상 손꼽히는 규모의 희생으로 기록됩니다.

1525

[스위스에서 재세례파에 대한 첫 공식 사형 집행]

1525년, 스위스의 천주교 지역에서 재세례파는 '이단'이자 '반역죄'로 규정되며 사형에 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재세례파 순교자들의 비극적인 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당시 서방교회는 세례를 죄의 용서와 구원의 중요한 의미로 보고 일생에 한 번만 받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는 물론 기존 교회에서 받은 세례까지 무효로 보며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기에, 이는 기존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로 인해 스위스 당국은 재세례파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이후 수천 명의 순교자가 발생하는 대규모 박해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1526

[개신교 지역 취리히에서도 재세례파 사형 집행]

스위스 천주교 지역에 이어, 1526년에는 개혁찬성파인 취리히 의회 정부마저 재세례파를 이단 및 반역죄로 몰아 사형에 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재세례파가 로마 가톨릭뿐만 아니라 당시 새로운 주류가 되던 개신교로부터도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재세례파에 대한 탄압은 종교개혁의 흐름 속에서도 '급진파'로 분류되며 기존 질서를 흔든다는 명분하에 천주교와 개신교 양측 모두로부터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재세례파가 그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성경과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지상대명령에 순종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광범위한 박해 속에서 재세례파는 극단적 종말론을 믿는 이들도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1534

[급진적 재세례파의 뮌스터 반란 발생]

재세례파 내부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땅 위에 건설하기 위해 폭력을 인정하는 '급진적 재세례파'가 나타났고, 이들에 의해 극단적인 '뮌스터 반란'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재세례파의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더욱 가혹한 탄압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뮌스터 반란은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대다수 재세례파와 달리, 폭력 동원마저 불사했던 일부 급진파의 극단적인 시도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재세례파 전체에 대한 오해가 깊어졌고, 이는 그들이 더욱 심한 박해를 받게 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의 로마 가톨릭 신부였던 메노 시몬스는 이 급진적 호프만파의 폭력성을 목도하며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자가 영적인 무기는 내려두고 세속적인 것을 취하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이 부합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평화주의 오비파에 가입, 이후 메노나이트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1930

[후터라이트 공동체의 나치 탄압 피난]

1930년, 재세례파의 일파인 후터라이트 공동체 '부르더호프'는 나치 독일의 잔혹한 탄압을 피해 고향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는 재세례파가 20세기에 들어서도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역사적 아픔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나치 정권은 비폭력주의와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적 태도를 보였던 재세례파 공동체에도 압력을 가했습니다. 신앙적 자유와 공동체 유지를 위해, 결국 부르더호프 공동체는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재세례파는 수세기 동안 다양한 형태의 박해를 겪으면서도 그들의 신념과 공동체를 지켜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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