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로마 가톨릭, 수도회, 종교 단체, 교육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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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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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수도회, 종교 단체, 교육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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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과 사도적 열정으로 유명한 로마 가톨릭의 대표적인 수도회. - 1539년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창립 이듬해 교황청의 공식 승인을 받음. - 전 세계 112개국에서 교육 선교 연구 사회 정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 - 특히 고등 교육 기관 운영에 강점을 보여 전 세계 수많은 대학을 설립. - 2013년에는 역사상 최초로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탄생함. - 하느님의 더 위대한 영광을 위하여라는 모토 아래 봉사하는 것을 핵심 가치로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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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

[예수회 창립의 초석 마련]

바스크 출신 성직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파리 대학교 출신 6명의 학생들이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에 모여 청빈과 순결을 맹세하며 '예수의 동반자'를 자칭했습니다.

이 모임은 훗날 예수회 창립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병원과 선교 사업을 펼치겠다는 서약을 포함하여, 교황의 지시라면 어디든 파견될 준비를 했습니다. 스스로를 '예수의 동반자'(Compañía de Jesús)라 칭했는데, 이는 예수의 제자이자 전우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1537

[로욜라와 동료들 사제 서품]

이탈리아로 떠난 로욜라와 동료들이 베네치아에서 교황 바오로 3세의 허가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는 수도회 승인을 위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설교와 자선 사업에 종사했습니다.

1539

[예수회 공식 창립]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회인 예수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교황청의 공식 승인을 통해 정식 수도회로 자리 잡게 되는 시작점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로욜라와 동료들은 교황에게 자신들의 활동 계획을 제출하며 수도회의 기본 방향을 구체화했습니다.

1540

[교황청의 공식 승인으로 예수회 탄생]

교황 바오로 3세가 'Regimini militantis ecclesiae'(神戰교회의 통치) 칙서를 통해 예수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식 수도회로 인가했습니다.

이는 예수회가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로욜라와 동료들이 제출한 활동 계획을 검토한 추기경들의 긍정적인 보고에 따라 승인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1543년에는 인원 제한도 해제되면서 수도회의 확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54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인도 선교 시작]

초기 예수회의 대표적인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인도 서부 고아주에 도착하여 대규모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비에르는 이후 중국에서 선교 활동 중 사망했으며, 예수회의 아시아 선교 확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543

[예수회 인원 제한 해제 및 초대 총장 취임]

교황 바오로 3세가 'injunctum nobis' 교서를 통해 수도회 설립 당시 60명으로 제한했던 인원 제한을 풀었습니다.

이와 함께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초대 수도회 총장으로 취임하며 예수회 확장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로욜라는 이를 통해 유럽 전역에 학교, 대학, 신학교를 설립하고 동료들을 선교사로 파견하며 예수회의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1554

[예수회 회헌 정식 채택]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직접 집필한 '예수회 회헌'이 정식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이 회헌은 교황과 수도사들에게 절대적 헌신과 복종을 강조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회헌의 주요 원칙은 'Ad Maiorem Dei Gloriam'(하느님의 더 위대한 영광을 위하여)이라는 예수회의 표어와 함께 새로운 수도회의 본성과 영성, 공동생활 및 사도적 삶의 방식을 규정했습니다.

1556

[창립자 로욜라 사망 당시, 세계 곳곳에 74개 대학 운영]

예수회 창립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사망했을 때, 예수회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74개 이상의 대학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회가 선교와 더불어 교육 사업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지 보여주는 놀라운 기록입니다.

예수회는 후기 르네상스기에 선교 수도원이자 대학 교육기관 운영을 최우선 사역으로 삼은 최초의 수도회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자유교양 교육의 선도자로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가톨릭 스콜라주의를 통합한 교과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1580

[일본 나가사키 영토, 예수회에 승인]

일본에서 나가사키의 봉건 영토가 예수회에 승인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내 예수회 선교의 확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러나 이어진 예수회의 영향력 성장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1587년에 이 승인이 철회되었습니다.

1587

[일본, 예수회에 대한 영토 승인 철회]

일본에서 예수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이전에 승인되었던 나가사키 영토가 다시 철회되었습니다.

이후 칙령에 따라 예수회 선교사들은 시암(오늘날 태국)으로 재배치되기도 했습니다.

1597

[일본에서 기독교인 순교 발생]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26명의 기독교인(그중 3명이 예수회 성직자)이 일본에서 순교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의 기독교 박해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이후 일본에서 예수회를 포함한 기독교 선교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598

[예수회 연학규정 발간]

예수회의 교육 체계를 담은 '연학규정'(Ratio Studiorum)이 발간되었습니다.

이는 과학, 공학은 물론 라틴어, 그리스어, 고전 문학, 시, 철학 연구의 표준을 제시하며 예수회 교육기관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예수회 교육기관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가톨릭 스콜라주의를 통합한 교과과정을 통해 법률가와 공직자 양성의 거점이 되었으며, 개신교 세력 확산을 저지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603

[일본어-포르투갈어 사전 저서]

예수회 학자들이 편찬한 일본어-포르투갈어 사전이 저서되었습니다.

이는 예수회의 언어학적 재능과 선교지의 문화 연구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업적입니다.

예수회 학자들은 외국어를 번역하고 라틴화된 문법과 사전을 만드는 데 노력하며 세계 각지의 문화 교류에 기여했습니다.

1661

[예수회 선교사, 티벳 라사 도달]

두 명의 예수회 선교사, 요한 그루버와 알베르 도르빌이 티벳의 라사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예수회의 선교 영역이 아시아 깊숙한 내륙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세계 곳곳의 오지로 향하며 복음 전파에 헌신했습니다.

1687

[공자의 업적, 유럽에 라틴어로 소개]

예수회 신부 프로스페로 인토르체타가 공자의 일생과 업적을 라틴어로 출판했습니다.

이는 중국의 지식과 문화를 유럽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 서양의 과학과 천문학을 소개하는 한편, 중국의 학문적 성취를 유럽에 알리는 데도 활발히 기여했습니다. 공자의 사상은 당시 유럽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740

[서양에서 산스크리트어 연구 개척]

장 프랑수아 퐁이 서양에서 산스크리트어 연구를 개척했습니다.

이는 예수회 학자들의 깊이 있는 언어 연구와 학문적 기여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연구는 동양 언어에 대한 서구 세계의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습니다.

1759

[포르투갈, 예수회 퇴거 조치 시행]

포르투갈의 국무장관 폼발 후작이 포르투갈 본국과 해외 식민지에서 예수회를 퇴거시켰습니다.

이는 예수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스페인 등 다른 가톨릭 국가에서도 예수회 추방이 이어졌습니다.

1764

[프랑스에서 예수회 추방]

프랑스에서도 예수회가 추방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던 예수회 탄압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예수회는 당시 교회 내에서 위험하고 권력지향적으로 보였고, 정치적 분쟁에 휘말리며 여러 국가에서 탄압을 받았습니다.

1767

[스페인 및 나폴리에서 예수회 추방]

스페인과 나폴리에서도 예수회가 추방되었습니다.

가톨릭 국가 내에서조차 예수회에 대한 압력이 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추방 조치들은 18세기 말 예수회 해산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됩니다.

1773

[교황청의 예수회 해산 명령]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세속 권력의 압력을 받아 법령에 서명함으로써 예수회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이는 예수회의 역사에서 가장 큰 위기이자 중단기였습니다.

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에서는 예카테리나 대제의 거부로 예수회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 내 폴란드 서부 지역의 수백만 가톨릭 신자들 덕분에 예수회는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1782

[러시아에서 예수회 명맥 유지]

예수회 해산 명령을 거부했던 러시아에서 스타니스와프 체르니에비치가 수도회 수도원장이 되면서 예수회의 명맥을 합법적으로 유지했습니다.

이후 교황 비오 6세는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예수회의 지속적인 존재를 공식적으로 허가했습니다.

1805

[러시아 예수회, 보편관할권 획득]

러시아의 수도원장 타데우스 브조조프스키가 교황으로부터 보편관할권을 획득하며 예수회 유지의 기반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는 해산 시기에도 예수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교황청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프로이센 지역에서는 예수회가 계속 존재하며 활동했습니다.

1814

[교황청, 예수회 복원 공식 선언]

나폴레옹 유폐에서 로마로 돌아온 교황 비오 7세가 'Solicitudo omnium ecclesiarum'(모든 교회에 대한 관심) 교서를 통해 예수회 복원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는 예수회가 41년간의 해산기를 마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예수회 복원 이후 19세기에는 엄청난 성장을 보였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예수회 소속 28개 대학 중 22개가 이 시기에 설립되거나 인수되었습니다.

1848

[스위스에서 예수회 추방]

스위스에서 교황 지상권론의 패배에 이어 헌법이 수정되면서 예수회가 추방되었습니다.

이는 예수회가 유럽 각국에서 여전히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금지는 1973년에 국민 투표를 통해 해제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1950

[예수회 회원 수, 1950년대에 절정]

20세기 중반인 1950년대에 예수회 회원 수가 절정에 달했으나, 이후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이는 가톨릭 성직자 감소 추세와 궤를 같이합니다.

회원 수는 줄었지만, 예수회 기관의 수는 도심 지역에 예수회 학교들이 설립되면서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1960

[대한민국 서강대학교 설립]

대한민국 서울에 예수회가 서강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서강대학교는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 대학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진성만, 아르트 데트펠프스 등 여러 예수회 성직자들이 설립에 참여했으며, 예수회의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설립되었습니다.

1973

[스위스, 예수회 추방 금지 해제]

스위스에서 국민 투표를 통해 1848년부터 이어져 오던 예수회 추방 금지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습니다.

이는 예수회가 스위스에서 다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투표인들의 54.9%가 헌법 수정을 받아들이면서 오랜 금지가 풀렸습니다.

1989

[예수회, 사회 정의에 집중하며 성장]

제29대 총장 페드로 아루페와 콜벤바하의 지도 아래 예수회는 사회 정의와 '빈민들을 위한 우대 선택'을 중요한 사역 주제로 삼으며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에 예수회는 2만 5천여 명의 신도와 83개의 관구를 보유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사회 정의와 인권 문제가 예수회 활동의 지배적인 주제로 부상했습니다.

[엘살바도르 예수회 성직자 살해 사건 발생]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중앙아메리카 대학교 캠퍼스에서 정부에 의해 '파괴자'로 분류된 6명의 예수회 성직자(이그나시오 엘라쿠리아 등)와 그들의 가정부, 딸이 엘살바도르 군대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암살 사건은 사회의 평화와 정의 운동에 대한 예수회의 헌신을 다시금 부각시키며 전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2007

[홀로코스트 희생 예수회 성직자 기념 각판 세계 최초 설치]

미국 캔자스시티의 예수회 대학인 록허스트 대학교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홀로코스트 시기 유대인들을 구하는 데 생명을 바친 예수회 성직자 152명을 기념하는 각판이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세계 최초로 홀로코스트 기간 예수회 성직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물이었습니다.

이 각판은 예수회가 당시 유대인들을 구하거나 피난처를 제공한 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2013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 탄생]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예수회 출신으로는 역사상 최초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며, 이는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큰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탄생은 예수회가 가톨릭 교회 내에서 가진 학문적, 사도적 영향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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