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탕이 조약
조약, 역사, 뉴질랜드, 식민지, 인권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9:21
뉴질랜드 건국 문서이자 역사적 이정표인 와이탕이 조약. 마오리족과 영국 왕실 간의 중요 협약입니다. 하지만 영어본과 마오리어본의 해석 차이로 오랜 논란과 갈등 그리고 마오리 전쟁이 발발했죠. 현재 뉴질랜드 정부는 마오리족 권리 회복을 위해 노력 중이며 이 조약은 과거를 넘어 현재와 미래를 잇는 뉴질랜드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1840
[운명을 가를 조약, 그 첫 초안이 쓰여지다]
뉴질랜드의 총독으로 부임한 영국 해군 장교 윌리엄 홉슨이 뉴질랜드의 영국 식민지화를 위한 조약 초안 작성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국인 대리인 제임스 버스비와 비서 제임스 프리먼의 도움을 받아 조약의 뼈대를 세웠습니다.
윌리엄 홉슨은 뉴질랜드 총독으로 파견되어, 영국인의 대리인으로 와이탕이에 거주하던 제임스 버스비의 집에서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한 협의를 진행했습니다. 1840년 2월 4일부터 5일까지, 그는 비서 제임스 프리먼과 제임스 버스비의 도움을 받아 와이탕이 조약의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뉴질랜드의 운명을 결정한 와이탕이 조약 첫 서명]
뉴질랜드 아일랜즈 만 와이탕이에서 영국 국왕 대리인과 북섬의 마오리 추장 46명이 모여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하며 뉴질랜드의 역사를 바꿀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이 조약은 뉴질랜드 역사와 헌법의 핵심이자 정부와 마오리족 관계의 중추가 되었습니다.
1840년 2월 6일, 뉴질랜드 북섬 와이탕이의 제임스 버스비의 집에 각지의 마오리 추장 46명이 모여 영국 국왕의 대리인과 함께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이로써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으며, 조약은 뉴질랜드를 제2의 민족 국가로 규정하는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뉴질랜드의 역사와 헌법의 중추가 되었으며, 뉴질랜드 정부와 마오리 주민 사이의 정치적 관계의 핵심을 형성하게 됩니다. 조약 체결의 즉각적인 결과 중 하나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정부는 뉴질랜드 내 토지 매수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인 선매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례 없는 참여! 뉴질랜드 전역으로 퍼진 조약 서명]
와이탕이에서 조약이 서명된 이후, 조약의 사본은 뉴질랜드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몇 달에 걸쳐 최소 13명의 여성을 포함한 530~540명의 마오리 추장들이 조약에 서명하며, 뉴질랜드 전역으로 조약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습니다.
여성 추장들의 서명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와이탕이에서 북방의 마오리 추장들이 먼저 서명한 이후, 몇 달에 걸쳐 뉴질랜드 전역으로 조약의 사본이 돌려지며 많은 추장들이 서명하도록 하였습니다. 몇몇 추장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13명의 여성을 포함해 530~540명의 마오리 추장이 이 조약에 서명했으며, 총 9부의 서명본이 존재합니다.
[영국, 뉴질랜드의 주권을 선언하다]
윌리엄 홉슨 총독이 영국의 뉴질랜드 주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는 와이탕이 조약 체결 이후, 영국이 뉴질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는 조치였습니다.
조약 체결 이후, 1840년 5월 윌리엄 홉슨 총독이 영국의 뉴질랜드 주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는 마오리인들이 그들의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느끼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영국이 뉴질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842
[총독 교체,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다]
윌리엄 홉슨 총독이 사망하고, 로버트 피츠로이가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피츠로이 총독은 마오리족의 관습을 인정하는 법률적인 조치를 취하며 전임자와는 다른 정책 방향을 예고했습니다.
1842년 9월 윌리엄 홉슨 총독이 사망한 후, 로버트 피츠로이가 새로운 총독으로 뉴질랜드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마오리족의 관습을 인정하는 법률적인 조치를 취하며, 마오리족과의 관계에서 보다 유화적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1843
[해석의 차이가 부른 비극: 마오리 전쟁 발발]
와이탕이 조약의 영어본과 마오리어본 간의 주권 및 토지 소유권 해석 차이로 인한 근본적인 견해 충돌이 결국 '마오리 반란'으로 비화하여 30년간의 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뉴질랜드 역사상 가장 큰 갈등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와이탕이 조약은 서문과 3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본인 영어와 마오리어의 두 개 국어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어본과 마오리어본은 의미가 크게 다른 부분이 있었고, 특히 주권의 소유와 양도에 관한 부분이 쟁점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본의 '주권(sovereignty)'이 마오리어본에서는 '통치권(kawanatanga)'으로 번역되어, 마오리족은 '모든 토지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백인 측은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라고 파악했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1843년 30년간에 걸친 마오리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1877
[조약 무시의 시대: 법원의 충격적 판결]
마오리 전쟁 진압 후, 뉴질랜드 정부는 와이탕이 조약을 거의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1877년 법원 판결은 조약을 '단순한 무효'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러, 조약의 권위가 크게 훼손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오리 반란이 진압된 이후 뉴질랜드 정부는 이후 100년 동안 조약과 관련된 문제를 방치하고 거의 무시했습니다. 일례로 1877년의 법원 판결에 따르면 조약은 '단순한 무효'이며, 19세기 후반 내내 마오리족은 불공정한 거래나 전쟁 기간 중의 몰수로 인해 토지 소유권을 대거 상실했습니다.
1900
[혼돈의 뉴질랜드, 영국의 개입을 호소하다]
19세기 초, 뉴질랜드는 유럽 이주민과 원주민 마오리족 간의 무력 충돌과 무분별한 토지 매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마오리족은 프랑스의 침략 위협에 대한 영국의 보호를, 영국 이주민들은 법과 질서를 요구하며 양측 모두 영국의 개입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19세기 초 뉴질랜드에서는 무역업자, 포경선, 물개잡이 등의 활동으로 마오리족 원주민들이 불안해했으며, 머스킷의 보급과 머스킷 전쟁은 마오리 인구를 급감시켰습니다. 백인들은 마오리 사람들을 속여 물건을 약탈하고 죽이는 등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무질서한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드 와케필드가 1837년 영국에 뉴질랜드협회를 세우고, 이듬해 뉴질랜드 토지회사를 설립하며 토지를 마음대로 팔아 이주민을 유치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일부 마오리 추장들은 프랑스에 의해 정복될까 우려하여 영국의 보호를 요청했고, 1831년에는 북쪽 추장 13명이 영국 윌리엄 4세에게 프랑스 침공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공식 청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오리족과 유럽 이주민 모두 법과 질서, 그리고 영국의 보호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1950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서: 마오리족의 대반격 시작]
1950년대 초반부터 마오리족은 와이탕이 조약을 근거로 주권 회복과 빼앗긴 토지 반환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뉴질랜드 정부도 마오리-뉴질랜드 관계에서 조약의 중요성을 점차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초반부터 마오리족은 점점 더 와이탕이 조약을 기반으로 주권에 대한 추가적인 권리를 주장하고 빼앗긴 토지를 되찾으려 시도하였습니다. 정부는 이에 부응하여 토지 소유권 및 뉴질랜드-마오리 관계를 해석하는 데 있어 조약에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1974
[와이탕이의 날, 뉴질랜드의 심장이 되다]
와이탕이 조약의 중요성을 기념하기 위해 '와이탕이의 날'이 뉴질랜드의 국경일로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조약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적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4년, 와이탕이 조약 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와이탕이의 날'이 뉴질랜드의 국경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조약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975
[정의를 위한 한 걸음: 와이탕이 재판소 설립]
뉴질랜드 정부는 '와이탕이 조약법'을 통과시켜, 조약의 해석을 영구적으로 담당하고 위반 사항을 조사하여 구제책을 제안하는 독립적인 기구인 '와이탕이 재판소'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마오리족의 권리를 회복하려는 중요한 노력의 시작이었습니다.
1975년에는 와이탕이 조약법이 통과되어 조약의 해석을 영구적으로 담당하는 와이탕이 재판소를 설치하고, 영국 국왕 또는 그 대리인에 의한 조약 위반을 조사하여 구제 수단을 제안하도록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재판소 권고는 구속력은 없었지만, 다양한 마오리인 집단에 총 10억 달러에 달하는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20세기 후반에 통과된 여러 법안이 조약을 언급하고 있지만, 와이탕이 조약 자체는 한 번도 뉴질랜드 국내법을 구성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뉴질랜드 헌법 수립 문서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