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
제국, 왕조,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9:03
약 330년간 인도 대부분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 몽골-튀르크계 무슬림 제국이다. 시조 바부르가 1526년 로디 왕조를 멸망시키고 건국했다. 악바르 대제 시기 최대 영토를 확보하고 종교적 관용 정책 행정·경제 기반을 확립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샤 자한 시대에는 세계 최고 경제력을 자랑하며 문화 황금기를 맞이했으나 타지마할 건설 등으로 국력 낭비가 심화되었다. 아우랑제브 시대 종교적 억압 정책과 무리한 정복 사업으로 재정난 및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 18세기 이후 마라타 시크 등 반란 세력 발흥과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쇠퇴가 가속화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침략과 플라시 전투 패배 후 실권을 상실했고 1857년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공식 멸망했다. 광대한 제국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며 힌두-이슬람 융합 문화를 꽃피웠다.
1483
[무굴 제국의 씨앗, 바부르 탄생]
무굴 제국의 시조이자 티무르 제국의 5대 후손인 바부르가 중앙아시아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당시 티무르 제국은 우즈베크족의 위협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바부르는 태어날 무렵부터 혼란스러운 중앙아시아 정세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조상인 티무르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사마르칸트 점령을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본거지마저 잃게 된다. 이는 훗날 그가 인도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504
[중앙아시아를 떠나 카불로]
중앙아시아에서 쫓겨난 바부르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점령하고 이곳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그는 인도로 눈을 돌려 광대한 제국 건설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바부르는 이스마일 1세의 도움으로 잠시 중앙아시아 일부를 수복했으나, 우즈베크족의 반격에 다시 잃은 후로는 중앙아시아 정복의 꿈을 완전히 접었다. 대신 1513년부터 부유한 남쪽의 인도 아대륙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1526
[새로운 제국의 탄생, 파니파트 전투]
바부르가 로디 왕조의 이브라힘 로디 술탄을 파니파트 전투에서 격파하고 무굴 제국을 건국했다.
이 승리로 바부르는 델리에서 아그라로 진군하여 '인도의 파디샤'를 선언하며 새로운 대제국의 막을 올렸다.
이 전투는 인도 역사상 가장 결정적이고 역사적인 전투 중 하나로, 이후 2세기 동안 북인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바부르는 수도를 카불에서 아그라로 옮기고, 이어진 칸와 전투에서 라지푸트인들에게 대승을 거두며 북인도에서의 지배력을 확고히 다졌다.
1530
[후마윤의 불안한 즉위]
바부르의 장남 후마윤이 제2대 황제로 즉위했으나, 아직 미숙했던 그는 이복형제들의 반란과 아프간계 세력의 저항으로 제국 내부가 혼란스러웠다.
구자라트의 바하두르 술탄과 비하르의 세르 샤 수리가 무굴 제국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북인도에서의 무굴 패권이 흔들리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복형제들의 왕위 찬탈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1540
[제국의 일시적 멸망과 후마윤의 망명]
후마윤이 세르 샤 수리에게 패배하여 북인도를 떠나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으로 망명하면서 무굴 제국은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그 사이 북인도에는 세르 샤 수리가 수르 제국을 건국했다.
후마윤은 타르 사막을 건너 사파비 왕조 치하의 헤라트에 도착하여 동부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그곳의 페르시아 문화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의 망명은 사파비 제국과 무굴 제국 간의 외교 관계를 맺게 했고, 무굴 제국 내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555
[제국의 재건, 후마윤의 극적인 귀환]
후마윤이 사파비 왕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크게 약화된 수르 왕조를 공격, 시르힌드에서 수르 군대를 대파하고 델리를 탈환하며 무굴 제국을 재건했다.
칸다하르 지방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사파비 왕조의 지원을 받은 후마윤은, 세르 샤 수리 사후 왕위 계승 분쟁으로 약화된 수르 왕조를 성공적으로 무찌르고 무굴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다.
1556
[악바르 대제 즉위, 무굴 제국의 황금기 서막]
후마윤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악바르가 3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치세는 무굴 제국의 가장 위대한 전성기로 기록되며, 제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악바르는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북인도 세력을 확고히 하고, 라자스탄, 구자라트(1573), 벵골(1576)을 점령했다. 특히 1590년대에는 남으로는 고다비리 강 유역에서 북으로는 카슈미르 일대까지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며 마우리아 제국 이후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루었다. 그는 종교적 관용 정책(인두세 폐지 등), 농업 세금 제도 개혁 등으로 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다.
1605
[자한기르 즉위와 예술의 발전]
악바르의 아들 자한기르가 4대 황제로 즉위하여 아버지의 개혁과 정복 활동을 계승했다.
그의 치세는 점진적인 팽창과 더불어 예술적, 문화적인 성취가 두드러졌다.
자한기르는 종교적 관용 정책을 완전히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이슬람교 외의 종교에 대한 불이익이나 차별은 없었다. 다만 시크교 지도자 아르준 데브를 처형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시기에 영국 동인도 회사를 포함한 유럽 국가들이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627
[문화와 부의 정점, 샤 자한의 시대 개막]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이 즉위했다.
그는 선조들의 관용 정책을 유지하며 영토 확장을 계속했고, 특히 데칸 술탄국들을 제국의 영향권 아래 두는 등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샤 자한은 내치에 뛰어나 제국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영했다. 당대 무굴 제국은 중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 대국'이었다. 그의 치세는 문화적으로도 절정에 달해 수많은 건축물과 예술품이 탄생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타지마할을 건설하는 등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국고를 심각하게 소진하여 민심을 잃었다.
1658
[아우랑제브의 쿠데타와 강경 통치 시작]
타지마할 축조 등으로 민심을 잃은 샤 자한이 와병 중일 때, 그의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6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강경한 이슬람주의자이자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샤 자한이 총애하던 장남 다라 시코는 계승 분쟁에서 패배하여 목숨을 잃었다. 아우랑제브는 즉위 직후부터 정복 사업을 전개했으며, 비자푸르(1685), 골콘다(1685) 등 데칸 술탄국들을 함락하며 마우리아 제국의 아소카 이래로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정복하여 통일시킨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인두세 부활, 이슬람교 개종 강요 등의 종교적 억압책을 실시하여 제국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1674
[제국 쇠퇴의 시작, 마라타 왕국 발흥]
아우랑제브의 강경책과 무리한 정복 사업으로 국가 재정이 피폐해지고 농민과 소영주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서부 데칸 지방에서 힌두교도들이 마라타 왕국을 세우는 등 반란이 터져 나왔다.
아우랑제브의 치세 말기에는 인두세 부활과 라지푸트족에 대한 엄격한 정책으로 인해 소영주, 농민, 심지어 궁정 귀족들까지도 정부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마라타 왕국은 남인도에서 강력한 적대 세력으로 부상하며 제국의 힘을 약화시켰다.
1707
[아우랑제브 사망과 제국의 급격한 쇠퇴]
데칸 일대를 원정하던 아우랑제브가 사망했다.
강력한 후계자 부재와 귀족들의 부패, 호족들의 반란, 제위 계승 분쟁 등으로 무굴 제국은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우랑제브 사후 중앙 권력은 약화되고, 마라타 동맹, 시크교도 세력, 라지푸트 소국 등 많은 수의 독립 또는 준독립 제후 세력들이 등장하여 무굴의 재정 수입과 영토를 감소시켰다. 이는 18세기 중후반 인도가 여러 국가들로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
1739
[나디르 샤의 침공, 제국의 치명타]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델리를 침공하여 약탈했다.
이 사건으로 무굴 제국은 크게 약화되어 사실상 패망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으며, 이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 정복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 침략은 무굴 제국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이미 내부적으로 쇠퇴하던 제국은 외부의 치명적인 공격까지 받으며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동시에 유럽 열강, 특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 진출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1757
[영국 식민 지배의 서막, 플라시 전투]
영국 동인도 회사가 플라시 전투에서 무굴-프랑스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는 영국이 벵골과 오디샤, 비하르를 지배하게 함으로써 인도 지배의 기초를 다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8세기 초 인도 각 지방에 무굴 제국에 대항하는 여러 정권들이 등장하며 분열하자,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 틈을 타 인도 지배를 확대했다. 특히 프랑스와의 벵골 지배권 다툼에서 승리하며 인도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은 인도인 용병인 세포이를 양성하며 인도 각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1857
[인도 독립전쟁의 불씨, 그리고 무굴 제국의 최후]
영국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용병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세포이들과 각지에서 봉기한 인도인들은 델리에 집결하여 마지막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며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 항쟁을 계기로 무굴 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이 봉기는 수공업자, 농민, 상인 등 폭넓은 민중들이 참여한 대규모 반영 운동으로 인도 북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2년에 걸친 항쟁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영국은 이를 계기로 동인도 회사를 폐지하고 인도에 대한 직접 통치를 선언했다. 명목상 남아있던 마지막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는 폐위되어 미얀마로 유배됨으로써, 약 330년 역사의 무굴 제국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