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홀라 호메이니
정치 지도자, 종교 지도자, 혁명가, 이란의 최고 지도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9:02
이란 이슬람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샤 국왕을 몰아낸 이란의 정치·종교 지도자. 최고지도자로서 엄격한 이슬람 율법 통치를 확립하고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과 이란-이라크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이끌었다. 1979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만큼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권위적 통치와 인권 문제로 국제적 비판을 받았으나 이란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혁명의 씨앗, 루홀라 호메이니 탄생
- 종교적 권위의 시작, 아야톨라 칭호 획득
- '백색 혁명'에 맞선 종교 지도자, 투쟁의 시작
- 불굴의 의지, 망명의 서막
- 유럽으로 향하는 혁명의 불씨
- 세계적 영향력: 타임지 '올해의 인물' 선정
- 팔라비 왕조의 몰락, 혁명의 새벽이 밝다
- 15년 만의 귀환, 이슬람 혁명의 완성
-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
-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반미 감정의 폭발
- 미군의 참패, '독수리 발톱 작전'의 실패
- 이란 초대 대통령 선출과 갈등의 씨앗
- 8년간의 비극, 이란-이라크 전쟁의 발발
- 절대 권력의 정점, 군사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다
- 권력 다툼: 초대 대통령 탄핵과 자유주의자들의 이탈
- '악마의 시' 논란: 살만 루슈디 사형 선고
- 이란 혁명의 아버지, 영원히 잠들다
1902
[혁명의 씨앗, 루홀라 호메이니 탄생]
이란 호메인에서 '루홀라 무사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시아파 성지 순례 중 이란에 정착한 페르시아인 가문으로, 그는 훗날 이란의 운명을 바꿀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1950
[종교적 권위의 시작, 아야톨라 칭호 획득]
1950년대 후반 '아야톨라' 칭호를 획득하고, 1960년대 초에는 이란 내 시아파 종교 공동체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하며 종교적,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1963
['백색 혁명'에 맞선 종교 지도자, 투쟁의 시작]
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의 토지 개혁과 여성 해방 조치에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가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64
[불굴의 의지, 망명의 서막]
옥고 석방 후에도 미국을 비난하다 터키로 강제 추방되며 길고 긴 망명 생활의 서막을 열었다.
이는 그의 반제국주의적 성향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5
[이라크, 혁명의 거점을 마련하다]
터키에서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 나자프로 거처를 옮겨 1978년까지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이슬람 사회의 이상적인 국가 형태를 담은 '벨레야테 파키'를 저술하며 혁명의 이론적 기반을 다졌다.
1978
[유럽으로 향하는 혁명의 불씨]
이라크에서 압력을 받아 프랑스 파리 교외 노플르샤토로 이동했다.
프랑스는 샤에게 호메이니 암살을 제안했으나, 샤는 그를 순교자로 만들까 두려워 거절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저명한 혁명 철학자 알리 샤리아티 암살 후 샤 정권에 맞선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떠올랐다.
1979
[세계적 영향력: 타임지 '올해의 인물' 선정]
이란 이슬람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1979년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오르는 등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그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팔라비 왕조의 몰락, 혁명의 새벽이 밝다]
혁명으로 샤 팔레비 국왕이 퇴위하자, 호메이니는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선임되며 15년간의 망명 생활을 끝낼 준비를 한다.
[15년 만의 귀환, 이슬람 혁명의 완성]
15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이란으로 돌아오자, 서방 매체는 6백만~8백만 명의 인파가 그를 환영했다고 추산했다.
귀국 직후 사실상의 정부 수반 역할을 수행하며 이란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혁명 정부의 초석을 다지다]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자르간을 총리로 한 임시 정부를 수립하며 혁명 체제를 공고히 했다.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
임시 정부는 16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새 정부 형태로서 이슬람 공화국 수립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98% 이상이 찬성하며 왕정 시대의 종말과 이슬람 공화국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반미 감정의 폭발]
호메이니의 열렬한 추종 학생들이 테헤란 미국 대사관을 급습하여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이는 통치 기간 중의 부정부패 행위 재판을 위해 샤를 넘기라는 미국의 거절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이란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인질 중 13명은 2주 안에, 1명은 1980년 7월에 석방되었으나, 나머지 52명은 444일간 억류되었다. 대사관은 '스파이 소굴'로 불리며 찾아낸 비밀문서가 공개 출판되었다.
1980
[미군의 참패, '독수리 발톱 작전'의 실패]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인질 구출을 위한 '독수리 발톱 작전'을 강행했지만, 정보 부족과 어설픈 준비, 기상 악화로 헬리콥터가 격추, 추락하면서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란인들은 이를 기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카터 대통령의 재선 실패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미군은 특수전 부대에 대대적인 구조개편을 실시하였다.
[이란 초대 대통령 선출과 갈등의 씨앗]
호메이니의 측근이자 경제학자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여성의 지지를 받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그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싫어했고, 보수적 성향의 의회와 갈등이 예견되었다.
[이슬람 공화국, 정식 대통령을 맞이하다]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이란의 초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하며, 호메이니는 '혁명 지도자'로서 종신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인질 사태, 의회의 손으로 넘어가다]
호메이니는 이란 의회(마즐리스)가 미대사관 인질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한편, 재판을 위해 샤를 이란 측에 넘기라고 미국에게 재차 요구했다.
[8년간의 비극, 이란-이라크 전쟁의 발발]
이슬람 혁명으로 이란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미국과 서방의 지원을 받은 사담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가 영토 확장과 유전 점령을 목적으로 이란을 침공하며 길고 참혹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란은 미국과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였기에 미국은 이라크를 지원했다. 전쟁은 쌍방에 큰 피해만 남긴 채 승패 없이 끝났다.
1981
[절대 권력의 정점, 군사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 국민투표를 통해 호메이니는 '군사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어 군사 지휘권까지 부여받았다.
이 시기 그의 인기와 권력은 비할 데 없이 높아졌다.
[권력 다툼: 초대 대통령 탄핵과 자유주의자들의 이탈]
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려던 초대 대통령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호메이니와 보수적 의회의 견제를 받다 탄핵당하고 이란을 비밀리에 탈출했다.
이로써 이슬람 원리주의가 더욱 강화되었다.
1978년부터 1981년 사이에 이란 내의 일부 사회주의자 성향의 지식인들과 그밖에 자유주의자들도 이란을 대부분 떠나기 시작하였다.
1989
['악마의 시' 논란: 살만 루슈디 사형 선고]
이슬람 교리를 풍자한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의 소설 '악마의 시'에 격분하여 궐석 재판을 열고 루슈디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파트와'를 내렸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와 종교적 권위 충돌의 상징이 되었다.
범 아랍권 인물들 및 일부 이슬람인들은 살만 루슈디에게 자객을 보내거나 자발적으로 찾아가 처형하려 하여 논란이 되었고, 영국과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첩보원을 동원해 그의 신변을 보호하였다.
[이란 혁명의 아버지, 영원히 잠들다]
노년의 호메이니는 투병 중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다음 날 새벽 라디오를 통해 알려졌고, 이틀 뒤 테헤란 공동묘지로 옮겨진 시신에는 엄청난 숫자의 추모객들이 몰려들어 그의 지대한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 이란 정부는 그를 위한 별도의 묘역 건설 계획에 착수하여, 높이 90미터의 4개 첨탑과 황금빛 돔이 씌워진 웅장한 이슬람 사원 형태의 '루홀라 호메이니 묘'가 건설되었다.
1991
['호메이니식 통치'의 그림자: 개인 숭배와 인권 문제]
호메이니식 통치는 엄격한 샤리아 율법 강제, 언론·출판 자유 제한, 그리고 심각한 개인 숭배로 이어지며 국제 인권 단체의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1991년 독립한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종교적 규칙에 반대하는 자는 이맘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무조건 가혹한 징벌에 처해졌고, 비판자들에 대해 강력한 고문과 사형마저 실시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