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국민회의
정당, 인도의 정당, 사회자유주의 정당, 포괄정당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9:00
인도 국민회의는 1885년 설립된 인도의 유서 깊은 정당입니다. 영국 식민 통치에 맞서 독립 운동을 주도하며 인도의 독립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독립 후 장기간 집권하며 인도 정치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현재는 인도 인민당과 함께 인도의 주요 양당 중 하나입니다. 사회자유주의와 시민국민주의를 기반으로 중도 노선을 표방합니다.
1885
[인도 국민회의 창립]
1885년, 영국 통치에 협력하며 인도와 영국 관계를 긴밀히 하고자 봄베이에서 인도 국민회의가 설립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지식인, 지주, 상인, 고리대금업자 등으로 구성된 친영 성향의 단체였지만, 점차 불공정한 부분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며 인도 민족 운동의 구심점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설립 초기에는 영국과 인도 간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고 영국의 인도 통치에 협력하기 위한 조직으로 출발하였으며, 영국에 대해 우호적이면서도 불공정하고 유해한 부분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도의 반영국 운동을 무마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1905
[벵골 분할령 철회를 이끈 반영 운동 전개]
20세기에 접어들며 인도 국민회의는 친영에서 반영 운동의 선봉으로 탈바꿈합니다.
특히 영국이 반영 여론을 잠재우려 벵골을 동서로 분할하는 벵골 분할령을 내리자, 이에 맞서 영국 상품 불매, 완전 자치 '스와라지', 국산품 애용 '스와데시' 운동 등을 강력히 주도했습니다.
이들의 맹활약 덕분에 영국은 결국 1911년 벵골 분할령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벵골 분할령은 영국이 반영 기운이 높은 벵골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로 분단시켜 민족적 통합을 분열시키고자 한 정책이었습니다. 인도 국민회의는 이에 대한 반발로 영국 상품 배척, 완전 자치 '스와라지' 운동, 국산품 애용 '스와데시' 운동 등을 주도했으며, 국민·민족 교육을 주장하며 민족의 일체감을 높이고 국내 산업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47
[인도 독립 후 장기 집권 시작]
1947년 인도가 독립하자, 인도 국민회의는 자와할랄 네루의 독자적인 정치철학과 비동맹주의에 입각한 정책들을 시행하며 명실상부한 집권 정당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후 1977년까지 인도의 유일한 집권 정당으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인도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한때 일당 우위 체제를 형성하기도 했으나, 오늘날은 민주적 정당으로 발전했습니다.
인도 국민회의는 1947년 인도 자치령 시행 이후부터 공식적으로 세속주의를 지지했으며, 1950년부터 인도 공화국 성립 후 자와할랄 네루의 독자적인 정치철학과 비동맹주의에 입각한 정책들을 시행했습니다. 독립 이후 1977년 총선 때까지는 인도의 유일한 집권정당으로 군림했습니다.
1977
[인디라 간디 총리에 대한 반발로 야당 전락]
정부의 저조한 경제 성과, 무리한 산아 제한 정책, 그리고 언론과 정적 탄압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인디라 간디 총리가 이끌던 인도 국민회의는 국민적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1977년 총선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패배하며 야당으로 밀려나야만 했습니다.
정부의 3차 경제 계획이 예상 외의 저조한 성과를 거두고 무리하게 진행된 산아 제한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으며, 언론과 정적을 탄압하는 인디라 간디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며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야당으로 밀려나야만 했습니다.
1980
[자중지란에 빠진 야당 연합 틈타 여당 복귀]
1977년 인디라 간디를 축출하고 집권했던 야당 연합은 좌우 세력의 결합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중지란에 빠졌고,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 틈을 타 인도 국민회의는 1980년 총선에서 다시 압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여당으로 복귀했습니다.
당시 인디라 간디의 국민회의를 몰아내고 집권했던 여당 세력이 인디라 간디를 축출하기 위해 좌에서 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력이 연합한 세력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여당 내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며 신임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후 국민회의는 1980년 총선에서 다시 압승하며 여당으로 복귀했습니다.
1984
[인디라 간디 암살로 인한 추모 열기 속 압승]
1984년 인디라 간디 총리가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까지 인도 전역에 그녀를 향한 엄청난 추모 열기가 일어났습니다.
이 영향으로 인도 국민회의는 총선에서 또다시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1984년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하자 이듬해까지 이어진 추모 열기로 인하여 국민회의가 또다시 압승을 거두게 됩니다.
1991
[라지브 간디 사망 추모 열기로 정권 재창출]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자 국민회의의 핵심 인물이었던 라지브 간디가 테러로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시금 추모 열기가 일면서 P.V.
나라심하 라오 총리의 지휘 아래 인도 국민회의는 정권을 재창출하는 데 성공하며 난관을 극복했습니다.
1989년에 다시 정권을 상실했지만, 인디라 간디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테러로 죽으며 또다시 추모 열기가 일며 P. V. 나라심하 라오 총리의 지휘 아래 다시 정권을 재창출하였습니다.
2004
[만모한 싱 총리 집권, 인도의 고도 성장 이끌다]
2004년 총선에서 만모한 싱 총리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가 다시 집권에 성공했습니다.
싱 총리는 금융업 개편, 공기업 민영화 등 과감한 경제 개혁을 추진하며 인도의 눈부신 고도 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정책은 인도가 2008년 금융위기 여파를 직접적으로 피하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2004년에 만모한 싱 총리 체제 아래 집권하며 인도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이후 재집권을 노렸습니다.
2014
[성장 정체와 부패 의혹으로 총선 참패]
2010년 이후 인도의 경제 성장이 정체되고 정부 고위직 인사들의 부패 의혹이 연이어 불거지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결국 2014년 총선에서 인도 국민회의는 참패를 면치 못하고 야당으로 밀려나며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2010년 들어 성장이 정체되고 정부 고위직 인사들의 부패로 인해 2014년에 참패, 야당으로 밀려났습니다.
2019
[라훌 간디 리더십 부재와 세습 구도로 총선 또다시 참패]
라훌 간디 당수의 리더십 부족, 지나치게 과거 향수에만 집착한 선거 전략, 그리고 고질적인 권력 세습 구도와 같은 약점들이 부각되며 인도 국민회의는 2019년 총선에서 543석 중 겨우 52석을 얻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이 참패 이후 라훌 간디는 당수직에서 사퇴했고, 소냐 간디가 당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인민당이 극우, 힌두 근본주의 등으로 얼룩지며 국민회의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강해지는가 싶었으나, 당수인 라훌 간디의 리더십 부족, 지나치게 과거의 향수에만 집착한 선거 마케팅, 권력 세습 구도와 같은 타고난 약점들로 인하여 2019년 총선에서 543석 중 52석을 겨우 확보하며 참패하였습니다. 이후 라훌 간디는 당수직에서 사퇴하였으며, 소냐 간디가 현재 당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2022
[24년 만에 비(非) 간디 가문 출신 당 대표 선출]
2022년 10월 19일 열린 신규 대표 선거에서 말리카르준 카르게 전 의원이 9천여 명의 대의원 중 7천 명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새로운 대표로 선출되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무려 24년 만에 네루-간디 가문 이외의 인사가 당 대표가 된 인도 국민회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2022년 10월 19일에 열린 신규 대표 선거에서 말리카르준 카르게 전 의원이 대표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9천여 명의 대의원 중 7천 명의 지지를 얻어 경쟁자인 시 타루르 의원에 압승을 거뒀습니다. 인도 국민회의에서 네루-간디 가문 이외의 인사가 대표에 선출된 것은 24년 만에 처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