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대공세

군사 작전, 베트남 전쟁, 대규모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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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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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작전, 베트남 전쟁, 대규모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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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베트남 설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 동시다발적인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베트남 전쟁의 판도를 뒤흔들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 공세는 미국 대중에게 전쟁의 실상을 알리고 반전 여론을 폭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군사적 패배가 정치적 승리로 이어진 역설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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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구정 대공세의 서막: 기습 야간 공격]

북베트남군은 구정 연휴를 틈타 남베트남 제1군단 및 제2군단 지역에 기습적인 야간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는 이후 전면적인 구정 대공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초기 공격은 전반적으로 확산되는 방어 수단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남베트남 전역으로 공세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역을 뒤흔든 대규모 공세 시작]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설날 '뗏'을 기해 남베트남 전역 100개 이상의 도시와 마을, 수도 사이공까지 동시다발적인 대규모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1968년 당시 양측이 수행한 군사 작전 중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이 작전은 남베트남의 군 사령부와 민간 통제 시설을 노린 기습 공격으로, 북베트남 공산당 수뇌부의 주도로 베트콩이 주요 습격 부대로 활약했습니다. 북베트남군은 베트콩을 보호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초기에는 인구 밀집이 적은 곳을 주요 타격 지역으로 잡았으나, 작전 실행 중 한계에 직면하며 주요 시설이 밀집한 대도시를 공습지로 삼았습니다. 이 공세의 공식 명칭은 '무신년 원단절 총공세 및 봉기'입니다.

[미군 패닉에 빠뜨린 사이공 미 대사관 습격]

구정 대공세 초기, 결사의 각오로 임한 베트콩 부대가 주사이공 미국 대사관을 습격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했습니다.

이는 미군 본부와 남베트남군 본부로 적이 침투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던 미국 대중과 미군 사기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와 함께 베트남 인민군은 남베트남 대통령궁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남베트남 국군의 성공적인 방어로 실패했습니다. 초기에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기습 공격으로 일시적인 혼란을 겪으며 몇몇 도시 통제권을 상실하기도 했습니다.

[후에 전투와 민간인 학살의 비극]

구정 대공세 중 응우옌 왕조의 옛 수도 후에에서는 한 달간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군이 도시의 80%를 폐허로 만들 정도의 포격을 퍼부으며 도시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점령 기간 동안 북베트남군은 수천 명의 민간인을 처형하는 후에 대학살이 발생했습니다.

후에 대학살에서 희생된 민간인 수는 약 5천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전쟁 후 북베트남은 민간인 살해를 인정했습니다. 한편, 미국 전투 기지 케산에서도 두 달간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연합군의 반격과 북베트남군의 막대한 피해]

초기 기습 공격으로 고전하던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신속히 전열을 가다듬고 막강한 화력으로 반격에 나섰습니다.

이 반격으로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특히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도시들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세 기간 동안 북베트남 정부는 연합군의 전략 기동성을 과소평가하여, 연합군이 위협받는 지역에 신속하게 전개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베트남군은 병력이 단편적으로 패배하고 대량의 군 투입 공격이 연합군의 화력에 밀리는 등 잘못된 가정에 기반한 작전의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쩐반짜 장군은 후에 "우리는 우리와 적 사이의 병력 간 구체적인 균형에 대해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남베트남의 계엄령 선포 및 대규모 병력 증강]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는 구정 대공세의 혼란 속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후 6월 15일 의회 동의를 얻어 연말까지 20만 명의 징집자를 군대에 입대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로써 남베트남군의 병력은 90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티에우 정부는 국가회복위원회를 설립하여 피난민 구호 및 재정착을 관리하는 등 새로운 정책에 착수했습니다. 또한 구정 공세에 대한 도시 거주민들의 분노는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지지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티에우는 이 기회를 통해 부통령 응우옌까오끼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등 개인적 권력을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내 반전 여론 폭발과 존슨 대통령의 정책 전환]

구정 대공세는 그 동안 승리를 낙관했던 미국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의 낙관론이 허풍으로 드러나자 미국 언론은 전쟁 개입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했고, 결국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재선 포기 선언과 함께 북베트남 폭격 축소를 발표하며 종전을 위한 협상 추구 의사를 밝혔습니다.

미군 정보 당국의 전력 과소평가가 드러나면서 "마을을 탈환하려면 파괴할 필요가 있다"는 익명의 장교 발언이 폭로되는 등 미국 내에서 전쟁에 대한 회의론이 심화되었습니다. 존슨의 폭격 축소 발표는 남베트남 티에우 대통령에게 "지속적인 평화에 대한 공포"로 받아들여져 미국이 남베트남을 공산주의자에게 넘길 것이라는 의심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구정 대공세 이후 '미니-뗏' 공세 발생]

1968년 1월부터 2월까지의 구정 대공세 이후에도, 같은 해 5월부터 8월까지 "미니-뗏"이라 불리는 후속 공세가 이어지며 전쟁의 양상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구정 대공세가 완전히 종결되지 않고 국지적인 충돌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미니-뗏 공세는 1월의 대규모 공세만큼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이어지고 있음을 상징했습니다.

1969

[북베트남의 군사 전략 대전환 선언]

구정 대공세의 막대한 손실을 경험한 북베트남은 "다시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전군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포고 55호를 발표하며 군사 전략의 변화를 공식화했습니다.

이는 장기간 소규모 작전과 재래식 전투의 통합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전환을 의미했습니다.

이 전략 변화는 레두안파의 "신속한 승리" 전략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보응우옌잡과 쯔엉찐이 선호하는 장기적인 재래식 전쟁으로의 회귀를 나타냈습니다. 구정 대공세로 인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징집 기반이 거의 사라지고 북베트남 정규군이 70% 가까이 대체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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