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공영권

일본 제국주의 이념, 정치 블록, 세력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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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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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 이념, 정치 블록, 세력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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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이 서구 세력에 맞서 아시아의 번영을 주도한다는 명분으로 내세운 이념입니다. 겉으로는 아시아 통합을 표방했지만 실상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점령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허울 좋은 선전 도구였습니다. 결국 일본의 패전으로 막을 내렸으나 아시아 각국에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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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 동아신질서 제창]

일본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가 동북아시아에 한정된 '동아신질서'를 제창했습니다.

이는 대동아공영권의 전신 격 개념으로, 지리적으로는 더 좁은 범위였지만 이후 대동아공영권 기획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당 개념은 동아시아를 일본 주도의 새로운 질서로 재편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습니다.

1940

[아리타 하치로 외무대신, 대동아공영권 선언]

일본 제국의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가 라디오 연설 "국제 정세와 일본의 위치"를 통해 대동아공영권 개념을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렸습니다.

이는 서방 세력에 독립된 아시아 자급자족 블록을 만들겠다는 일본의 야망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순간이었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서방 세력으로부터 독립된 자급자족적인 아시아 각국의 군사적, 경제적 동맹 블록을 만들려는 욕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 대동아공영권 공식 천명]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가 기자회견을 통해 대동아공영권의 개념을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비록 그 개념 자체는 이전부터 여러 형태로 존재했지만, 이 발표로 대외적 명분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유럽 열강들이 중국 지원을 철회하자, 일본은 이를 "아시아인들의 아시아"라는 명분으로 아시아 내 지배력을 확장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1941

[일본 육군성, 대동아공영권 영토 분할 계획 수립]

일본 육군성 연구 기관에서 "대동아공영권에서의 토지처분안"이라는 기밀 문서를 준비했습니다.

이 문서는 일본이 점령할 광범위한 지역의 영토 분할과 통치 계획을 상세히 담고 있었으며, 총리 도조 히데키의 승인까지 받았습니다.

이 계획은 단순한 아시아를 넘어 태평양, 심지어 남아메리카 일부까지 포함하는 세계 최대의 야심 찬 지배 구상이었습니다.

문서에는 기존의 만주국, 몽강연합자치정부, 왕징웨이 정권의 기능 유지와 함께, 일본 직할 통치 지역과 만주국 모델의 친일 괴뢰국 지역으로 제국을 크게 둘로 나누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계획된 범위에는 한반도, 대만, 사할린, 관동주를 포함한 일본 본토를 시작으로 홍콩, 필리핀, 괌, 하와이, 호주, 알래스카, 심지어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일부까지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태평양 전쟁을 통해 유럽 열강의 식민지를 점령하고 필리핀을 잃은 미국과의 결전을 준비하려는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독일-이탈리아와 함께 아시아 분할선 제안]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한 직후, 일본은 독일과의 군사적 협상에서 아시아 대륙의 경계를 동경 70도선으로 정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는 서쪽의 독일 '레벤스라움'과 이탈리아 '스파치오 비탈레' 영역, 동쪽의 일본 '대동아공영권' 영역을 나눌 야심 찬 세계 분할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이 경계선은 북쪽 오비강에서 남쪽 인도양까지 이어지며, 지구 반대편의 서반구를 나눌 제2의 경계선에 대한 협상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 계획은 추축국의 전 세계적인 승리를 전제로 했습니다.

1943

[도쿄에서 대동아회의 개최]

도쿄에서 일본의 초청으로 대동아공영권 구성국들의 국가원수들이 모여 '도쿄 회의'로도 불리는 대동아회의가 열렸습니다.

회의는 일본의 범아시아주의 이상과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려는 일본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흥미롭게도 회의 동안 사용된 언어는 영어였습니다.

이 회의에는 도조 히데키 일본 총리를 비롯해 만주국 총리 장징후이, 난징 국민정부 국가 주석 왕징웨이, 버마국 총리 바 마우, 자유 인도 임시 정부 국가 주석 수바스 찬드라 보스, 필리핀 제2공화국 대통령 호세 라우렐, 태국 왕자 완 와이타야쿤 등이 참석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연합국에 대항한 정치적, 경제적 협력 관계를 선전하는 공동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개발이나 협력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거의 논의되지 않고, 주로 서구 제국주의 비판과 독자 노선 추구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1945

[일본의 항복으로 대동아공영권 붕괴]

일본의 항복과 함께 대동아공영권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일본은 아시아 일부에서 반서구 감정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실제 아시아 국가 간 통합은 전혀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모든 것을 '일본의 관점'에서만 바라봤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버마국 총리 바 마우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아시아인들의 아시아'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자국만을 위했고, 이는 일본이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진정한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주요 원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허울뿐인 개념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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