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옛 나라, 괴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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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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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나라, 괴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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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일본 제국이 만주사변 후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워 통치했으나 실권은 일본 관동군에 있었다. 오족협화를 표방했음에도 철저히 일본에 종속된 식민지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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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러일전쟁 승리, 만주 지배권 확보의 시작]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반도와 만주 요동반도 및 동청철도 남부 조차권을 확보하며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만주국 건국의 발판이 됩니다.

일본은 종래 만주 개방을 주장하던 입장과 달리 러시아와 함께 만주 이익 확보에 나섰고, 이는 미국과 프랑스의 반발을 불렀습니다.

1931

[관동군, 만주사변 일으켜 만주 전역 점령]

일본 제국 육군의 주력부대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기 위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세계를 뒤흔든 사건의 서막이었습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1900년부터 시도되어 왔으며, 가장 큰 문제는 소련의 군대였습니다. 만주 사변은 이러한 배경에서 발생했습니다.

1932

[일본 제국, 괴뢰국 '만주국' 건국 선포 및 푸이 황제 옹립]

일본은 만주사변으로 점령한 지역에 '만주국' 수립을 선포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명목상의 황제(강덕제)로 옹립했습니다.

수도는 현재의 창춘인 신징으로 정했습니다.

이는 철저히 일본에 종속된 괴뢰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서둘러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연호는 대동이라 했습니다.

[일본, '일만 의정서'로 만주국 공식 승인]

일본은 '일만 의정서'를 조인하여 만주국을 공식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이에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은 만주국을 일본의 괴뢰 정권으로 규정하고 중화민국의 주권을 지지하며 일본을 강력히 비난했습니다.

이후 나치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등 8개국이 만주국을 정식 승인했습니다.

1933

[국제 연맹의 비난에 반발, 일본 제국 국제 연맹 탈퇴]

국제 연맹이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고 일본을 비난하자, 일본 제국은 이에 반발하여 국제 연맹에서 탈퇴했습니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고립을 심화시키는 결정이었습니다.

미국은 만주국이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을 선언했습니다.

1934

[엘살바도르 등 일부 국가, 만주국 첫 승인]

국제 연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엘살바도르(3월 3일)를 시작으로 도미니카 공화국, 코스타리카(9월 23일) 등 일부 국가들이 만주국을 승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외교적 노력이 일부 결실을 맺었음을 보여줍니다.

바티칸 시국이 만주국을 승인했다는 오해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선교를 위한 임시 대표 임명에 불과했습니다.

[만주국, 제정 수립 및 연호 '강덕'으로 변경]

만주국은 공화국 체제에서 '제정(帝政)' 체제로 전환하며 연호를 '대동'에서 '강덕'으로 변경했습니다.

이는 푸이를 명실상부한 황제로 격상시키려는 시도였지만, 실제 통치는 여전히 일본 관동군이 주도했습니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 경제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맡았습니다.

1935

[소련, 사실상 만주국 승인 시작]

소비에트 연방은 사실상 만주국을 승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이후 1941년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통해 공식적인 승인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외교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소련은 1936-37년에 5개의 영사관을 형식적으로 세웠지만, 하얼빈과 만저우리에 있는 2곳으로 줄었습니다.

1936

[일본 정부, 세계 최대 규모 500만 명 만주 이주 계획 수립]

일본 정부는 1936년부터 1956년 사이에 무려 500만 명의 일본인을 만주국으로 이주시킬 대규모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는 만주를 일본의 주요 식량 공급원이자 인구 분산지로 삼으려는 야심 찬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이 제공권을 잃자 중지되었습니다.

1938년부터 1942년 사이에 20만 명의 청년 농민을, 1936년에는 2만 명의 가족 이민자를 각각 보냈습니다. 종전 후 소련이 만주를 침공했을 때, 85만 명의 일본인 이주자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1937

[만주영화협회 설립, 일본의 선전 영화 제작 시작]

일본의 국책 영화 회사인 만주영화협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협회는 영화 제작, 배급, 영사 업무를 총괄하며 만주국 체제 선전과 일본 문화 이식을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남만주 철도가 1928년부터 홍보용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만주영화협회는 각지에서 영화관 설립 및 순회 영사 등도 행했습니다.

[만주국, 황제 계승법 제정]

푸이 황제의 남계 자손이 제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제위계승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동군이 황제 지명권을 확보하는 등 일본의 통제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주국 주차 일본 제국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과의 회담에서, 남계 자손이 없을 때에는 일본 천황에 의해 제위 계승자를 정하는 칙지를 황제의 선언으로 하는 등의 각서에 서명했습니다.

1938

[유대인 난민 이주 계획 '복어 계획' 추진]

일본 정부는 박해받는 유대인 난민들을 만주국으로 이주시켜 자치구를 건설하려는 '복어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고 유대인의 자본을 유치하려는 복합적인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육군대좌 야스에 노리히로, 해군대좌 이누즈카 고레시게 등이 실무를 주도했지만, 나치 독일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1940

[일본 프로 야구, 만주에서 첫 해외 공식 경기 개최]

일본 프로 야구의 첫 해외 공식 경기가 만주국에서 열렸습니다.

이는 일본이 만주를 자국의 연장선으로 여기며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 중 하나였습니다.

만주국은 1940년 취소된 하계 올림픽의 대체 종목으로 일본 제국이 주관한 1940년 도쿄 동아시아 경기에 출전할 선수들을 파견했습니다.

1941

[소련, 일본과의 불가침조약 체결하며 만주국 공식 승인]

소비에트 연방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만주국을 법률상으로 공식 승인했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던 시기, 양국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소련은 1935년 3월 23일부터 사실상 만주국을 승인하기 시작했습니다.

1945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만주 전략공세작전 개시]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직후,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규모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이는 만주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공격이었습니다.

소련군이 만주 전역을 점령했습니다.

[만주국 멸망, 마지막 황제 푸이 퇴위]

소련군의 맹공과 일본의 패망이 임박하면서, 만주국은 결국 멸망했습니다.

꼭두각시 황제 푸이도 퇴위하며 13년간의 만주국 역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일본 제국의 패전과 함께 만주국은 소련에 점령되었습니다.

1946

[소련, 만주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

소련군은 점령했던 만주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잠시였고, 이후 중국의 국공내전 상황에 따라 다시 주인이 바뀌게 됩니다.

1949

[중화인민공화국, 만주 지역 통치권 확보]

중국의 국공내전 종결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만주 지역을 최종적으로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만주 지역은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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