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데모크라시
민주화 운동, 사회 운동, 자유주의, 일본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8:43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일본에서 폭발했던 민주주의·자유주의 운동의 총칭입니다.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시민의 자유와 권리 쟁취 차별 철폐 침략 전쟁 중단을 외치며 일본 역사상 최대의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받습니다. 호헌 운동으로 번벌 정치에 저항하고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을 탄생시키는 등 큰 진전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과 치안유지법 제정 군국주의 세력의 발호 속에 아쉽게 막을 내리며 민주주의 암흑기를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훗날 일본 근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형성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1905
[자유 민주주의 운동 본격화]
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 내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도쿄에서는 중국동맹회가 결성되고, 자본주의 발전으로 시민 계급이 급성장하며 정치적·시민적 자유를 자각하는 등 다양한 자주적 운동들이 물꼬를 트기 시작했습니다.
1911
[신해혁명 발발과 청나라 멸망]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터지며 2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지는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은 일본에도 전해져 '군주제도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1912
[제1차 호헌 운동, 가쓰라 내각 53일 만에 총사퇴]
사쓰마-조슈 번벌이 지배하던 군부 세력의 핵심인 가쓰라 타로의 3차 내각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벌족타도, 헌정옹호"를 외치는 대규모 호헌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며, 가쓰라 내각은 고작 53일 만에 총사퇴하는 일본 역사상 전례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군부의 권력 남용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는 재정난을 이유로 조선 2개 사단 증설을 거부한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을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해 붕괴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슈 출신의 가쓰라 타로의 3차 내각이 조직되자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고, 오자키 유키오, 이누카이 츠요시 등 중의원 의원들의 비판 속에 제1차 호헌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913
[진보적 언론 잡지 <다이산테이고쿠> 창간]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향한 열망 속에서, 이시다 토모지 등 지식인들이 진보적 언론 잡지 <다이산테이고쿠>(제3제국)를 창간했습니다.
이는 활발한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지식인들이 언론을 통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91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및 일본 참전]
사라예보 사건을 기화로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습니다.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명분 삼아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참전했고, 전쟁 기간 동안 해운업과 상업이 활발해지며 '벼락부자'(나리킨)들이 대거 등장하는 등 사회 경제 전반에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제2차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은 영일 동맹에 근거하여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의 국제 협력 분위기가 높아졌고, 민주주의·자유주의 운동도 차츰 격화되었습니다. 특히 러시아 혁명과 독일 11월 혁명은 이러한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16
[요시노 사쿠조, 민본주의 주창]
지식인 사회에서는 도쿄 제국대학의 요시노 사쿠조가 '민본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이념을 주장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당시 뜨겁게 달아오르던 보통선거법 운동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여 민주화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요시노 사쿠조는 민본주의 주장을 통해 정당내각제를 지지했으며, 미노베 다쓰키치 역시 천황기관설을 주장하며 국가가 통치권의 주체임을 강조하고 의회정치 실현의 헌법해석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당시 활발하던 보통선거법 운동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1917
[러시아 혁명 발발과 공산주의 정권 수립]
멀리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터져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고, 일본 정부는 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하며 시베리아 출병을 결정하는 한편, 민주화 운동에도 더욱 박차를 가하는 복합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1918
[시베리아 출병 결정]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7월 12일 시베리아 출병을 전격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수요 증가를 노린 상인들의 쌀 매점매석을 부추겨 쌀 가격이 폭등하는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일본 전역을 뒤흔든 쌀 소동 발생]
쌀값 폭등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도야마현에서 시작된 쌀 도매상과 주민 간의 소요 사태는 마치 불길처럼 순식간에 일본 전국으로 번져 '쌀 소동'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진 대규모 소요 사태로 쌀 도매상들이 파괴되고 불타는 등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습니다.
쌀 소동은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정부의 부정확한 보도 및 언론 탄압에 대한 불만이 겹치며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데라우치 내각의 총사퇴로 이어질 만큼 엄청난 파급력을 가졌습니다.
[쌀 소동 여파로 데라우치 내각 총사퇴]
쌀 소동의 거센 파도 앞에서 정부는 무기력했습니다.
사건 보도를 방해하는 등 언론 탄압 논란까지 불거지자 국민들의 비난은 하늘을 찔렀고, 결국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9월 21일 총사퇴하며 사태에 대한 책임을 졌습니다.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 출범 (하라 다카시 내각)]
대중의 기대 속에 '평민 재상'으로 불리던 하라 다카시가 새 내각을 조직했습니다.
1918년 9월 27일, 이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다수 의석을 가진 정당(입헌정우회)이 주도하는 본격적인 '정당 내각'이 탄생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으로 평가됩니다.
1923
[도라노몬 사건 발생과 야마모토 내각 총사퇴]
12월 27일, 난바 다이스케의 섭정 히로히토 천황 암살 음모 사건인 '도라노몬 사건'이 터지며 일본 사회는 또다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제2차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총사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5
[보통선거법 제정과 치안유지법 동시 제정]
국민적 요구에 힘입어 '제2차 호헌 운동'의 결과로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이 내각은 만 25세 이상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법을 제정하여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사상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하며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드리웠습니다.
이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도라노몬 사건 이후 출범한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이 관료 중심의 내각이었기 때문에, 다시 헌정옹호를 요구하는 제2차 호헌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결과 입헌정우회, 헌정회, 혁신구락푸의 호헌 3파가 연합하여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내각은 보통선거법을 통해 선거권이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어 사상의 자유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민주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29
[대공황의 영향과 민주주의 열망 퇴조]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충격파가 멀리 일본까지 덮쳤습니다.
경제가 급속도로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자연스레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은 급속도로 식어갔습니다.
이는 일본 사회가 민주주의 암흑기로 접어드는 서글픈 전환점이 됩니다.
1931
[만주사변 발발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종말]
경제 대공황 속에서, 더 많은 식민지를 갈망하던 일본 군부는 류타오거우 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를 불법 점령하며 괴뢰 정부인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이와 함께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 암살 등 군국주의 세력과 극우 세력이 발호하며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득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내팽개쳐지고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아쉽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블록 경제로 공황을 넘기는 것을 본 일본 군부는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만주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류타오거우 사건 조작으로 만주 군벌 장쭤린을 폭살하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불법 점령한 뒤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만주 침략에 반대했던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 암살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사회 전반이 군국주의·파시즘화로 치달으며 1931년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종말점으로 간주됩니다.
1936
[2.26 쿠데타 발생]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 군부 내 혁신 극우 세력과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2.26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군부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졌고, 일본 제국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본격적인 침략 전쟁의 발판을 내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