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 시대
일본 역사, 내란 시대, 사회 변동, 정치 변동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8:40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일본을 뒤흔든 격동의 시대 센고쿠 시대입니다. 오닌의 난으로 시작된 대내란은 무로마치 막부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다이묘들이 하극상을 통해 권력을 다투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삼영걸의 활약으로 천하 통일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이는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지며 비로소 끝을 맺었습니다. 경제적 발전과 독특한 문화 그리고 전쟁의 참상이 공존했던 시기입니다.
- 오닌의 난 발발
- 메이오 정변 발생
- 호조 소운, 이즈국 탈취
- '전국시대' 용어 사용 기록
- 다케다 신겐의 권력 장악
- 가와고에 성 전투: 고호조의 대승
- 가와나카지마 전투 시작
- 이쓰쿠시마 전투: 모리의 기사회생
- 오케하자마 전투: 노부나가의 기적
- 가와나카지마 전투 종료
- 에이로쿠의 변: 쇼군 암살
- 갓산토다성 함락: 모리의 주고쿠 통일
- 오다 노부나가 상락
- 이시야마 전투 발발: 혼간지의 저항
- 미카타가하라 전투: 신겐의 맹위
- 무로마치 막부 멸망
- 나가시노 전투: 화승총의 위력
- 미미가와 전투: 오토모의 쇠락, 시마즈의 부상
- 우에스기 겐신 사망
- 이시야마 전투 종료: 혼간지의 몰락
- 혼노지의 변: 노부나가 비명횡사
- 야마자키 전투: 히데요시의 쾌속 승리
- 다케다 가문 멸망
- 덴쇼진고의 난: 가이·시나노 쟁탈전
- 시즈가타케 전투: 히데요시의 패권 장악
- 오키타나와테 전투: 류조지 가문의 몰락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 오다와라 정벌: 천하 통일의 완성
- 임진왜란 발발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 세키가하라 전투: 천하의 분수령
- 오사카 전투 종료: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 에도 막부 종말 및 메이지 유신
1467
[오닌의 난 발발]
일본 센고쿠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오닌의 난'이 발발했습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동군과 야마나 소젠의 서군이 교토에서 11년간 격렬하게 대치하며 전국적인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이 전쟁은 쇼군 계승 논란과 경제적 문제가 겹쳐 일어났으며, 교토 근방에서 시작되어 곧 다른 구니들로 확산되며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고 다이묘들의 반기를 부추겼습니다. 결과적으로 중앙 정부는 무력화되고 지역 영주들이 권력 공백을 메우는 '하극상'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1477
[오닌의 난 종료]
11년간 일본을 뒤흔들었던 '오닌의 난'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혼란의 씨앗을 뿌려 센고쿠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국 각지에서는 쇼군을 무시하는 다이묘들이 대두하고 신흥 세력과 기존 세력 간의 충돌이 더욱 빈번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하극상 풍조를 심화시켰습니다.
1487
[조쿄의 난 발발 (간토)]
간토 지방에서 '조쿄의 난'이 시작되어 고가 구보와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가문 간의 패권 다툼이 벌어집니다.
이는 중앙의 오닌의 난 이전부터 간토 지역에 지속된 대규모 혼란의 연장선이었습니다.
교토의 오닌의 난이 일어나기 전부터 간토 지방에서는 교토쿠의 난, 조쿄의 난, 에이쇼의 난 등 큰 대란이 연이어 발생하여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조쿄의 난은 간토의 복잡한 정치 지형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1493
[메이오 정변 발생]
역사학자들이 센고쿠 시대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하는 '메이오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는 무로마치 막부의 실질적인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쇼군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지방의 다이묘들은 더욱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호조 소운, 이즈국 탈취]
하극상 시대의 서막을 알린 '호조 소운'이 이즈국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능력 있는 신하가 봉건 영주로부터 권력을 찬탈하는 새로운 풍조의 상징이 됩니다.
호조 소운은 미천한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즈국의 호리고에 구보를 멸망시키며 간토로 진출, '고호조 가문'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는 능력만 있다면 신분과 상관없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하극상' 풍조가 센고쿠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 흐름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1505
[조쿄의 난 종료 (간토)]
간토 지방에서 시작된 '조쿄의 난'이 오랜 대립 끝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간토는 여전히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조쿄의 난은 간토의 고가 구보, 간토 간레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 그리고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 간의 삼파전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 난이 끝난 뒤에도 간토는 새로운 세력의 대두를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1508
['전국시대' 용어 사용 기록]
당대 구게(공경)인 고노에 히사미치의 일기에서 '전국시대처럼(戦国の世の時の如し)'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살던 시대를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에 비유하며 난세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이치조 가네요시 등 구게들이 혼란한 세상을 고대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에 비유하며 '전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센고쿠 시대 어원의 시작이 됩니다. 이는 당시 무가(武家)들도 자신들이 살던 시대를 '전국'이라 자각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1511
[후나오카야마 전투]
긴키 지방에서 '후나오카야마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쇼군 아시카가 가문과 간레이 호소카와 가문 사이의 항쟁의 일부로, 지방 세력이 중앙 정치에 개입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전투는 긴키 지방의 복잡한 권력 다툼 속에서 아시카가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서로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오우치 요시오키와 같은 지방 다이묘들이 이 혼란을 이용하여 중앙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1522
[다테 다네무네의 하극상]
도호쿠 지방의 다테 다네무네가 오슈 단다이인 오사키 가문을 축출하고 무쓰 슈고직에 오르며 하극상의 기미를 보였습니다.
이는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새로운 다이묘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도호쿠 지방은 중앙의 전란에 크게 휘말리지 않았지만, 다이묘들 간의 영지 다툼과 같은 소규모 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다테 다네무네의 권력 장악은 도호쿠 지방에서도 능력 위주의 하극상 흐름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526
[이마가와 가문의 분국법 제정]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 당주 이마가와 우지치카가 독자적인 영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분국법'을 제정했습니다.
이는 센고쿠 다이묘들이 각자의 영지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마가와 우지치카는 시바 가문으로부터 도토미를 빼앗는 등 세력을 확장하며 영지 지배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분국법은 영지 내의 법률과 질서를 확립하여 다이묘의 권위를 높이고 영지를 안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530
[다테나와테 전투]
규슈 지방에서 '다테나와테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쇼니, 오토모, 시마즈 가문 등 규슈의 주요 세력이 자립하려는 호족들과 권익을 지키기 위해 다투는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규슈는 센고쿠 시대 초기부터 쇼니, 오토모, 시마즈 가문이라는 세 명문 가문이 지토(地頭)들과 대립하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 전투는 이러한 대립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1535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피살]
미카와 마쓰다이라 가문의 당주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가신에게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마쓰다이라 가문은 세력을 잃고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는 당주 부임 시 최대 판도를 구축하며 미카와 지역의 실력자로 떠올랐으나, 가신에게 피살되면서 마쓰다이라 가문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이는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장의 배경이 됩니다.
1538
[고노다이 전투 (1차) 발발]
간토 지방에서 '고노다이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호조 가문과 우에스기 진영이 간토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충돌했습니다.
이 전투는 간토의 호족들을 양분하여 호조 우지야스와 사토미 요시타카 간의 대결로 전개되었습니다. 간토 지역에서 고호조 가문의 세력 확장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1540
[요시다 고리야마 전투 발발]
아키국의 호족 모리 모토나리가 주군 아마고 가문을 배신하고 오우치 가문에 협력하자, 아마고 하루히사가 '요시다 고리야마 성'을 공격하며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주고쿠 지방의 패권을 다투던 오우치 가문과 아마고 가문의 대립 속에 모리 모토나리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참여한 중요한 전장이었습니다. 모리-오우치 연합군은 아마고 군을 격파하며 모리 가문의 성장을 알렸습니다.
1541
[다케다 신겐의 권력 장악]
가이국의 '다케다 노부토라'가 중신들의 쿠데타로 스루가로 추방되고 그의 적자 '다케다 신겐'이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센고쿠 시대의 전설적인 영웅, 다케다 신겐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노부토라의 추방은 다케다 가문이 호족 연합체제에서 중앙집중체제로 변화하려는 시도와 관련이 깊습니다. 다케다 신겐은 이후 시나노 공략을 진행하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게 됩니다.
1542
[덴분의 난 발발]
도호쿠 지방의 다테 가문에서 '덴분의 난'이라 불리는 부자간의 대규모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다테 가문은 결속력이 약화되고 주변 세력들이 세력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테 다네무네와 하루무네 부자 사이의 다툼은 무쓰와 데와 주변의 다이묘들까지 휘말린 대란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내분으로 인해 모가미 가문 등 타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됩니다.
[아즈키자카 전투 발발]
주부 지방에서 '아즈키자카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가문이 대립하던 시기에 벌어진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도카이 지방에서 오다 가문과 마쓰다이라 가문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여러 충돌 중 하나입니다. 각 가문은 영토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대립했습니다.
[갓산토다성 전투 (1차) 발발]
주고쿠 지방의 난공불락의 요새, '갓산토다 성'을 둘러싼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모리 가문이 주고쿠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갓산토다 성은 이즈모국의 아마고 가문의 거성으로, 주변 세력의 침공에 대한 강력한 방어 요새였습니다. 이 전투는 모리 가문과 아마고 가문 간의 치열한 대결의 서막이었습니다.
1546
[가와고에 성 전투: 고호조의 대승]
간토 지방에서 '가와고에 성 전투'가 벌어져 고호조 가문이 야마노우치·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고호조 가문은 간토의 패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고호조 가문은 이 전투를 통해 두 우에스기 가문을 쇠퇴시키고 간토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호조 소운의 이즈 탈취 이후 지속적으로 세력을 키워온 고호조 가문의 성공적인 권력 장악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전투입니다.
1548
[덴분의 난 종료]
도호쿠 지방을 혼란에 빠뜨렸던 다테 가문의 '덴분의 난'이 마침내 종결되었습니다.
이 내전은 다테 가문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주변 다이묘들의 성장을 부추겼습니다.
부자간의 대규모 다툼이었던 덴분의 난은 다테 가문뿐만 아니라 무쓰와 데와 주변의 여러 다이묘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혼란을 틈타 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 등 새로운 센고쿠 다이묘들이 일대 세력을 구축하게 됩니다.
[시오지리토게 및 우에다하라 전투]
주부 지방에서 '시오지리토게 전투'와 '우에다하라 전투'가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이는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겪은 치열한 저항을 보여줍니다.
다케다 신겐은 시나노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스와, 오가사와라, 무라카미 가문 등 유력 호족들을 차례로 물리쳤습니다. 이 전투들은 그 과정에서 벌어진 주요 충돌로, 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통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1549
[에구치 전투]
긴키 지방에서 '에구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호소카와 가문 슬하의 미요시 가문이 실질적인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요시 가문은 아와 국을 비롯하여 사누키, 아와지 등 광대한 지역을 손에 넣으며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에구치 전투는 미요시 가문의 세력 확대를 상징하는 전투였습니다.
1552
[고호조 가문의 고가 구보 장악]
간토의 고호조 가문이 고가 어소를 제압하여 고가 구보를 장악했습니다.
이는 고호조 가문이 간토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했음을 보여줍니다.
고호조 가문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을 고즈케로 쫓아내고 간토의 패권을 놓고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와 다투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이는 간토 지역의 새로운 권력 구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53
[가와나카지마 전투 시작]
전설적인 두 영웅,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사이에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10여 년간 시나노 북부를 두고 다섯 차례에 걸쳐 치열한 혈전을 벌였습니다.
이 전투는 센고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장들의 대결로 기록됩니다. 북 시나노의 호족들을 비호하던 우에스기 겐신과 시나노 전역 장악을 목표로 하는 다케다 신겐의 야망이 충돌하며 일본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연출했습니다.
1554
[오와리 슈고 시바 가문 단절]
오와리 슈고였던 시바 가문의 시바 요시무네가 오다 가문의 권력 항쟁에 휘말려 할복하며, 오와리 슈고 시바 가문의 대가 끊겼습니다.
이는 오다 가문의 실권 장악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시바 가문은 에치젠과 도토미 영지를 잃고 오와리에서조차 슈고다이인 오다 가문에게 실권을 빼앗긴 허수아비 신세였습니다. 요시무네의 죽음은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 일국을 장악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1555
[이쓰쿠시마 전투: 모리의 기사회생]
모리 모토나리가 이쓰쿠시마섬에서 역신 스에 다카후사를 격파하는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로 모리 가문은 오우치 가문의 영지인 스오, 나가토를 장악하며 주고쿠의 주요 세력으로 급부상합니다.
모리 모토나리는 이 전투에서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습 전술로 대승을 거두며 '주고쿠의 지략가'라는 명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 승리는 모리 가문이 주고쿠 지방의 패자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560
[오케하자마 전투: 노부나가의 기적]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가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침공해 온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기습하여 총대장을 전사시키는 세계적인 기습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 통일의 야망을 드러내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의 혁신적인 전술과 대담성을 보여주며, 그를 일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부상시켰습니다. 이마가와 가문은 요시모토의 죽음으로 세력을 잃고, 오다 가문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오다와라 공성전 (1차) 발발]
우에스기 겐신이 간토 진출을 위해 호조 가문의 거성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는 대규모 공성전을 벌였습니다.
비록 함락에는 실패했으나, 겐신의 위세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공성전은 우에스기 겐신이 간토 간레이를 승계한 후 호조 가문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시도였습니다. 호조 가문의 견고한 방어와 겐신의 급한 회군으로 성은 함락되지 않았으나, 간토의 패권을 둘러싼 두 세력의 대립을 심화시켰습니다.
1562
[갓산토다성 전투 (2차) 발발]
주고쿠 지방의 패권을 다투는 '갓산토다 성 전투'가 재개되었습니다.
모리 가문이 아마고 가문의 난공불락의 요새를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리 가문은 아마고 하루히사 사망 후 약해진 아마고 가문의 틈을 노려 이즈모국으로 침공했습니다. 이는 모리 가문이 주고쿠의 명실상부한 패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1563
1538년에 이어 두 번째로 발생한 고노다이 전투는 간토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호조 가문과 사토미 가문 간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전투는 간토의 호족들을 더욱 양분시켰습니다.
1564
[가와나카지마 전투 종료]
10여 년간 이어진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간의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이 두 명장의 대결은 센고쿠 시대의 가장 극적인 라이벌전으로 기록됩니다.
다섯 차례에 걸쳐 벌어진 이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습니다. 비록 승패가 명확히 갈리지는 않았으나, 두 영웅의 위상과 전술적 능력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65
[에이로쿠의 변: 쇼군 암살]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미요시 가문에 의해 암살당하는 '에이로쿠의 변'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쇼군 권위의 급격한 실추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막부 권위 회복을 위해 활발히 활동했으나, 이에 위협을 느낀 미요시 가문의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 등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갓산토다성 함락: 모리의 주고쿠 통일]
모리 모토나리가 난공불락의 '갓산토다 성'에서 농성하던 아마고 가문을 결국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모리 가문은 명실상부한 주고쿠 지방의 패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장기간의 지구전으로 병량 부족에 시달린 아마고 가문은 결국 모리 가문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승리는 모리 모토나리의 뛰어난 전략과 끈기를 보여주며, 그가 주고쿠 9개국을 지배하는 대세력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568
[오다 노부나가 상락]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하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긴키 지방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 통일의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미노를 손에 넣은 후 이나바 산성을 본거지로 삼아 천하의 패권을 향한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상락은 미요시 세력을 제압하고 새로운 중앙 정권의 등장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569
[미마세 고개 전투]
간토 지방에서 '미마세 고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호조 가문의 세력 신장을 막기 위한 사타케 가문 등 주변 세력의 저항을 보여줍니다.
호조 가문은 간토의 패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주변 세력들을 압박했습니다. 이 전투는 히타치의 사타케 가문 등이 호조 가문의 공세에 대항해보려 했던 시도였습니다.
1570
[가네가사키 및 아네가와 전투]
긴키 지방에서 '가네가사키 전투'와 '아네가와 전투'가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아사쿠라 가문과 아자이 가문을 상대로 벌인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가문과 아자이 가문의 배신으로 큰 위기를 맞았으나, 이 전투들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통일 사업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특히 아네가와 전투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 간의 대결로 펼쳐졌습니다.
[이시야마 전투 발발: 혼간지의 저항]
정토진종 혼간지 세력이 오다 가문에 대항하여 대규모 '이시야마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가가 국에서 100여 년간 독립을 유지하며 '백성들의 왕국'을 건설했던 혼간지 교단의 저항이었습니다.
혼간지 교단은 무수한 농민 봉기(잇코 잇키)를 이끌었으며, 가가국에서 다이묘를 제거하고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100년간의 자치권을 행사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습니다. 이 전투는 중앙 권력에 대항하는 종교 세력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1572
[기자키바루 전투]
규슈 지방에서 '기자키바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시마즈 가문이 이토 가문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규슈에서의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센고쿠 시대 초기 규슈의 시마즈 가문은 내부 권력 다툼과 이토 가문의 공격으로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사의 지휘 아래 이토 가문을 물리치며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 신겐의 맹위]
다케다 신겐이 대규모 상락 작전을 감행하여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격파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당시 다케다 가문의 강력한 위세를 보여주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은 이 전투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을 상대로 뛰어난 전술을 선보이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오다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에게 큰 위협이었으나, 신겐의 급사로 다케다 가문의 기세는 꺾이게 됩니다.
1573
[아사쿠라 가문 멸망]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멸망했습니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였습니다.
아사쿠라 가문은 한때 귀족들을 맞이하여 문화를 꽃피울 정도로 번영을 누렸으나, 후계자 요시카게가 노부나가에게 대패하면서 몰락했습니다. 이로써 오다 노부나가는 긴키 주변 세력을 하나씩 제압해 나갔습니다.
[무로마치 막부 멸망]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교토에서 추방되며, 200여 년간 이어진 무로마치 막부가 공식적으로 멸망했습니다.
이는 센고쿠 시대의 한 전환점이자 통일 과정의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멸망은 일본이 더 이상 명목상의 쇼군 체제가 아닌, 강력한 다이묘들의 실력 지배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를 중심으로 한 천하 통일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됩니다.
1575
[시만토가와 전투]
도사국에서 '시만토가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도사 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치조 가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시치슈고와 구게 가문인 이치조 가문을 추방하고 도사를 통일했습니다. 시만토가와 전투는 모토치카가 도사국 내의 마지막 주요 저항 세력을 제압하는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나가시노 전투: 화승총의 위력]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군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는 화승총의 위력을 입증하며 다케다 가문의 쇠퇴를 가속화했습니다.
이 전투는 다케다 신겐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후계자인 다케다 가쓰요리가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의 화승총 전술에 대패한 사건입니다. 다케다 가문의 강력했던 기마대는 이 패전으로 치명타를 입고, 영지에 동요를 불러와 결국 멸망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1576
[노토, 우에스기 가문에 복속]
호쿠리쿠 지방의 노토 국이 우에스기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슈고 하타케야마 가문이 내분으로 약해진 틈을 타 우에스기 겐신이 세력을 확장한 결과입니다.
우에스기 겐신은 에치고의 슈고다이에서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호쿠리쿠 지방의 대부분을 제압했습니다. 노토 국의 복속은 겐신의 영향력이 호쿠리쿠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기즈가와구치 전투 발발]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를 둘러싼 대규모 전투인 '기즈가와구치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오다 가문이 혼간지에 대한 해상 봉쇄를 시도하며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혼간지의 저항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혼간지는 모리 가문 등의 지원을 받아 오다 가문의 봉쇄를 뚫으려 했으며, 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 통일을 이루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였습니다.
1577
[데토리가와 전투]
호쿠리쿠 지방에서 '데토리가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오다 가문이 호쿠리쿠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와 관련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통일 사업을 일본 전역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호쿠리쿠 지역의 중요한 세력과 충돌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 오다 가문은 혼간지를 비롯한 여러 저항 세력을 차례로 제압해 나갑니다.
[기슈 정벌 시작]
오다 노부나가가 긴키 남부의 기이(紀伊) 지방에 대한 대규모 '기슈 정벌'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혼간지와 연계된 종교 세력들을 제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기이 지방에는 하타케야마 가문 등 슈고 다이묘들이 정토진종 혼간지 세력의 봉기로 실권을 빼앗기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이러한 종교 세력의 저항을 뿌리 뽑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하시바 히데요시의 주고쿠 정벌 시작]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고쿠 지방에 대한 대규모 '주고쿠 정벌'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모리 가문을 압박하며 천하 통일의 기세를 이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미키 성, 돗토리 성, 다카마쓰 성 등 모리 가문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공략하며 모리 가문에 대한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 정벌은 오다 노부나가 통일 사업의 중요한 축이었습니다.
1578
[미미가와 전투: 오토모의 쇠락, 시마즈의 부상]
규슈 지방에서 시마즈 가문이 오토모 가문을 격파하는 '미미가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패배로 오토모 가문의 세력은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휴가의 이토 가문이 시마즈 가문에 쫓겨 오토모 가문에 의탁해오자, 오토모 요시시게는 이를 기회로 휴가로 침공했으나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대패했습니다. 이 승리로 시마즈 가문은 규슈 전역을 거의 제패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기즈가와구치 전투 (2차) 승리]
오사카 만 입구에서 '기즈가와구치 전투'가 다시 벌어졌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군이 모리 가문의 수군을 격파하며 이시야마 혼간지에 대한 해상 봉쇄를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이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가 혼간지의 최후 저항을 꺾기 위한 중요한 승리였습니다. 혼간지의 해상 보급이 끊기면서 그들의 항전은 더욱 어려워졌고, 이는 2년 뒤 혼간지 궤멸로 이어졌습니다.
[미키 전투 발발]
오다 노부나가가 긴키 지방의 '미키 성'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노부나가가 주변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통일을 이루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미키 성은 오다 가문에 저항하는 세력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포위 전술을 통해 성을 함락시키려 했으며, 이 공성전은 장기간 이어졌습니다.
1579
[우에스기 겐신 사망]
전설적인 영웅이자 '전국의 군신'이라 불리던 우에스기 겐신이 급사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간토와 호쿠리쿠 지역의 세력 판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겐신은 다케다 신겐과의 대결과 간토 진출 등 활발한 군사 활동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의 사망 후 우에스기 가문은 잠시 혼란에 빠졌고, 호조 가문 등 주변 세력은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1580
[이시야마 전투 종료: 혼간지의 몰락]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여 10여 년간 항전했던 정토진종 혼간지 교단이 '이시야마 전투'에서 결국 패배하여 궤멸되었습니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 통일 사업의 큰 걸림돌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혼간지 교단은 가가국에서 100년간 자치권을 행사했던 세계적인 사례를 남겼으나, 오다 노부나가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서는 버틸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오다 노부나가는 종교 세력의 저항을 성공적으로 제압했습니다.
[미키 전투 종료]
긴키 지방의 '미키 성'에 대한 오다 노부나가의 공성전이 장기간의 포위 끝에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이는 오다 가문이 긴키 지역의 마지막 저항 세력까지 제압했음을 보여줍니다.
미키 성은 2년여에 걸친 포위 끝에 함락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천하 통일 사업을 굳건히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희생을 감수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582
[혼노지의 변: 노부나가 비명횡사]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부장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혼노지의 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이는 일본 역사에 큰 충격을 던진 예측 불허의 사건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이름 없는 영주에서 일본 중부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며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국 시대의 판도를 다시 한번 뒤흔들며 새로운 권력 투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야마자키 전투: 히데요시의 쾌속 승리]
혼노지의 변 직후,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 인근 야마자키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하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며 천하 패권에 한 발짝 다가섰습니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기회 삼아 히데요시는 신속하게 회군하여 배신자를 처단했습니다. 이 승리는 그가 오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빗추 다카마쓰성 전투 종료]
주고쿠 정벌의 일환으로 벌어진 '빗추 다카마쓰성 전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 전투를 통해 모리 가문을 압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수공(水攻)이라는 기발한 전술을 사용하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혼노지의 변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재빨리 화친하고 교토로 회군하여 야마자키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다케다 가문 멸망]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진격에 제대로 대항해보지 못하고 '다케다 가문'이 결국 멸망했습니다.
이는 한때 천하를 위협했던 명문 무가 가문의 비극적인 종말이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의 대패 이후 다케다 가문의 영지에 동요가 심화되었고,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공세에 끝내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가이와 시나노는 오다 가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나카토미가와 전투]
시코쿠 지방에서 '나카토미가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시코쿠 통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모토치카는 도사국 통일 이후 시코쿠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카토미가와 전투는 그가 아와 국 등을 장악하며 시코쿠의 패자로 부상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덴쇼진고의 난: 가이·시나노 쟁탈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가이·시나노를 둘러싸고 도쿠가와 가문과 간토의 호조 가문 사이에 '덴쇼진고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 난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측이 가이·시나노를 차지하게 됩니다.
오다 가신들이 급히 철수하며 공동화된 가이와 시나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호조 우지야스가 충돌했습니다. 이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부 지역에서 세력을 더욱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83
[시즈가타케 전투: 히데요시의 패권 장악]
오다 노부나가 사후, 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가 격돌한 '시즈가타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가 승리하며 오다 가문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혼노지의 변 직후 야마자키 전투로 아케치 미쓰히데를 물리친 히데요시는 이 전투를 통해 오다 가문의 가장 강력한 가신이었던 시바타 가쓰이에마저 제압했습니다. 이는 그가 천하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는 결정적인 발판이었습니다.
1584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하시바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간의 대결인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비록 히데요시가 군사적으로 완승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정치적 협상을 통해 이에야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전투는 히데요시가 천하 통일 과정에서 이에야스와 맞붙은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복종하는 형태를 취하며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오키타나와테 전투: 류조지 가문의 몰락]
규슈 지방에서 '오키타나와테 전투'가 벌어져 류조지 가문의 당주 류조지 다카노부가 사망했습니다.
이는 한때 규슈의 강자로 떠올랐던 류조지 가문의 급격한 쇠퇴를 초래했습니다.
류조지 다카노부는 오토모와 시마즈 가문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세력을 떨쳤으나, 이 전투에서 시마즈 가문에 패배하며 당주를 잃었습니다. 이후 류조지 가문은 중신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158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시코쿠 통일에 대한 응징으로 대규모 '시코쿠 정벌'을 감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소카베 가문은 도사 일국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도사 평정 후 10년 뒤 시코쿠 전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인 시코쿠 통일을 용납하지 않았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모토치카를 굴복시켰습니다. 시코쿠는 히데요시 휘하 중신들에게 분배되었습니다.
[히토토리바시 전투]
도호쿠 지방에서 '히토토리바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다테 마사무네가 도호쿠의 다른 다이묘들과 벌인 중요한 대결 중 하나였습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도호쿠 지방에 일대 세력을 구축하며 '오슈의 독안룡'이라 불렸습니다. 이 전투는 그가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하는 과정에서 치러진 격렬한 싸움 중 하나였습니다.
1587
[헤쓰기가와 전투]
규슈 지방에서 '헤쓰기가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시마즈 가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군이 충돌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헤쓰기가와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며 시마즈 가문의 저항에 부딪힌 사건입니다. 이 전투 이후 시마즈 가문은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전역을 평정하기 위해 대규모 '규슈 정벌'을 단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규슈의 패자 시마즈 가문은 사쓰마, 오스미 2개국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시마즈 가문은 기자키바루, 미미가와,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규슈 전역을 거의 제패했습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이 거의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1589
[스리아게하라 전투]
도호쿠 지방에서 '스리아게하라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도호쿠 지역의 다이묘들이 새로운 중앙 정권의 지배를 받기 전 마지막으로 세력 판도를 결정짓는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전투 이후 도호쿠 지방의 주요 센고쿠 다이묘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그대로 영지를 추인받는 '오슈 시오키'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도호쿠 지역까지 중앙 권력의 영향력이 미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1590
[오다와라 정벌: 천하 통일의 완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조 가문의 거성 '오다와라 성'을 공격하여 결국 호조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는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 통일을 완성했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호조 우지마사는 히데요시의 다이묘 전투 금지 명령에 맞서 다테 마사무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대항했으나,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병력 공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로써 1세기에 달했던 일본의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은 종지부를 찍고 히데요시의 지배가 확고해졌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입성]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간토로 이봉되어 '에도 성'에 입성했습니다.
이는 이에야스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으며, 훗날 에도 막부 개창의 기반이 됩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오랫동안 다스리던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가이, 시나노 등을 떠나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던 간토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에도 성을 거점으로 삼아 간토를 개발하며 자신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1592
[임진왜란 발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웃 나라인 조선을 공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며 '임진왜란'이 발발했습니다.
부산진성 함락을 시작으로 조선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로 눈을 돌려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이는 조선에도 미리 알려져 통신사를 파견하여 염탐했으나,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로 전쟁을 막지 못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는 전쟁이 없었으나,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1598년 히데요시 사망 시까지 계속 싸웠습니다.
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천하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일본을 다시 정치적 혼란에 빠뜨리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다섯 장수(5대로)를 임명하여 아들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 삼았으나, 그의 죽음과 함께 일본은 다시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임진왜란도 그의 사망과 함께 종료되었습니다.
1599
[마에다 도시이에 사망]
5대로 중 한 명인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의 섭정 체제 내 상호 견제가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 간의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히데요시 사후 불안정하게 유지되던 평화는 마에다 도시이에의 죽음으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에야스의 불충을 탄핵하며 내란이 재개되었고, 이는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졌습니다.
1600
[세키가하라 전투: 천하의 분수령]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이 격돌한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이에야스는 일본의 패권을 확고히 하고 에도 막부를 개창했습니다.
이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을 다시 한번 양분한 결정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이 승리로 도요토미 가문의 지배를 끝내고 스스로 쇼군의 직위에 올라 일본의 마지막 막부인 에도 막부를 건설했습니다. 에도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260여년간 평화 시대를 열었습니다.
1614
[오사카 전투 발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의 마지막 잔당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오사카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에도 막부의 확고한 통치를 위한 최후의 전쟁이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존재는 이에야스에게 불안 요소였습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멸문시키기 위해 오사카 성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센고쿠 시대에서 이어진 모든 혼란을 종식시키는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1615
[오사카 전투 종료: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마지막 근거지인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며 '오사카 전투'가 종결되었습니다.
이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완전히 멸망하고, 일본은 260년간 이어진 평화로운 에도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오사카 전투의 승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전역에 걸친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에도 막부의 기반을 굳건히 했습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일본은 '전국'이라 불리던 내란의 시대를 완전히 마무리하고 전례 없는 평화기를 맞이했습니다.
1868
[에도 막부 종말 및 메이지 유신]
오랜 평화를 누리던 에도 막부가 '메이지 유신'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사무라이의 상징이던 촌마게 관습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단 한 차례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일본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영향과 내부 모순으로 인해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근대화를 지향하는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면서, 사무라이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