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 조약
조약, 전쟁, 국제 관계, 근대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8:39
청일전쟁의 종결과 함께 동아시아 질서를 뒤흔든 조약입니다. 겉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을 공식화했습니다.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할양으로 청나라는 몰락의 길을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조선의 운명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 격동의 근대사를 예고했습니다.
1894
[동학농민전쟁과 청군 파병 요청]
조선 내부의 사회 모순이 극에 달해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 정부는 청군에게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이는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영준과 청국 원세개의 밀약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이듬해 4월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이 처형될 정도로 조선의 정세는 악화일로였습니다.
고종은 대신들의 반대로 외병 진압을 부결했으나, 농민군의 전주성 함락으로 상황이 급변하자 민영준은 원세개에게 거듭 청군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고종은 비밀리에 원세개와 협의하여 청군 파병을 결정했고, 이는 훗날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됩니다.
[일본군, 조선에 기습 출병]
청군의 조선 파병을 빌미로 일본은 자국 상인과 공관 보호를 명분 삼아 조선에 출병했습니다.
일본은 청군을 압도하기 위해 강력한 혼성여단을 급파하며 재빨리 한성으로 진입했고, 조선의 내정 개혁을 명분으로 간섭을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상정하면서도, '내정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모순된 논리를 펼치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조선 정부가 일본군 철병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조선 내 주둔 명분을 강화했습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폐기]
일본의 강압으로 조선은 청과의 오랜 외교 관계의 상징이었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폐기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청에 대한 속방(藩屬) 지위를 공식적으로 청산한 것을 의미했으나, 실상은 일본이 청일전쟁에 대한 국제법적 명분을 확보하고 조선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장정 폐기 후 일본은 8월 1일 메이지 천황 명의로 청일전쟁 개전 조칙을 내리며 전쟁을 공식화했습니다. 이어 8월 20일 '잠정합동조관'을 강요하고, 8월 26일에는 조선이 맺은 '최초의 동맹 조약'인 '조일동맹조약'을 체결시키며 조선의 내정 간섭과 종속화를 심화시켰습니다.
[청일전쟁 청군 패배와 강화 제의]
청일전쟁에서 청군은 평양전투 패배를 시작으로 연이은 참패를 겪었습니다.
특히 1895년 2월 17일 북양해군의 본거지인 위해위마저 일본군에 함락당하며 사실상 항복에 이르렀고, 청국은 일본에 강화 의사를 타진하기에 이릅니다.
청 조정은 내부 정치 갈등으로 전쟁 지휘에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군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청에게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할양을 요구하며 강화회담을 준비했습니다. 일본 국내에서는 최대 10억 냥이라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요구하는 강경론이 득세했습니다.
1895
[고종, 홍범 14조 반포로 자주독립 선언]
일본의 압력 속에서 고종은 종묘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고하고, '청국에 부의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한다'는 내용을 담은 홍범 14조를 반포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명분으로 내세운 조선의 독립을 조선 스스로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청일전쟁의 승기를 잡은 일본은 청국에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대만, 팽호열도, 요동반도 할양을 요구하며 강경한 협상 태도를 보였습니다. 청국은 외교적 압박과 군사적 패배 속에서 강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홍장 저격 사건 발생]
시모노세키에서 청일 강화회담이 진행되던 중, 청국 전권대신 이홍장이 일본인 장사 오야마 도요타로에게 저격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협상 국면을 뒤흔들었으며, 국제적인 비난을 우려한 일본은 큰 곤경에 처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는 즉각 이홍장을 위로하고, 일본 정부는 최고 의료진과 황실의 위로를 보내며 사태 수습에 나섰습니다. 일본은 이 사건이 열강의 간섭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휴전으로 급선회했습니다. 결국 3월 30일 봉천성, 산동성, 길림성에서 무조건적인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청일 강화회담 재개와 일본의 강경 요구]
휴전 이후 청일 양국은 시모노세키에서 본격적인 강화회담에 돌입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자주국' 인정, 요동반도·대만·팽호열도 할양, 막대한 배상금, 최혜국 대우, 개항장 추가 개방 등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홍장은 일본의 영토 욕심을 비판하며 열강의 중재를 요청하는 등 협상 전략을 펼쳤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일본은 청국이 제시한 수정안을 묵살하고 자신들의 재수정안을 최종안으로 통보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은 승자이고 청국은 패자'임을 강조하며 군함 20여 척을 시모노세키 항구에 정박시켜 청국을 위협했고, 결국 이홍장은 일본의 최종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일본의 집요한 압박 끝에 마침내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청의 조선에 대한 종속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대만과 팽호열도를 일본에 할양하며, 청국에게 막대한 배상금(고평은 2억 냥)을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조약은 '세계 최초'로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를 명시했으나, 이는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려는 명분일 뿐이었습니다.
조약 체결로 청일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고, 조선은 수 세기에 걸친 청의 번속 지위를 청산하고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위계질서가 다른 위계질서로 전복된 것에 불과했고, 오히려 조선의 주권은 더욱 위협받게 됩니다. 조약 내용은 청의 굴욕적인 패배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큰 변화를 알렸습니다.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 발발]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직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급격한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요동반도 할양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영국은 중립을 표명하며 일본을 돕지 않았고, 궁지에 몰린 일본은 결국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요동반도를 포기하는 대가로 3천만 냥의 추가 배상금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에 큰 굴욕감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었으며, 훗날 러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간섭으로 조선은 일본의 영향력에서 잠시 벗어나는 듯했으나, 또 다른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발생]
일본은 요동반도 반환 후 조선에 대한 간섭 정책을 강화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등은 조선 궁궐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자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의 큰 비난을 초래하며 일본 외교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후 일본은 친일 내각을 세우고 단발령을 강행하는 등 조선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선 내부에서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위정척사파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을미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미우라 공사를 소환하며 사태 수습을 시도했으나, 사건의 배후에 일본이 있었음이 명확했습니다.
1896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 '아관파천']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을미의병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단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친일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고 친러 정권이 들어서며 조선의 국제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은 일본의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나, 한동안 러시아의 간섭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러일 양국의 '공동 지배' 또는 '공동 보호령'과 같은 상태가 되었으며, 러일의 세력 균형을 위한 여러 협정(베베르-고무라 각서,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 로젠-니시 협상 등)이 체결되며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경쟁이 심화되었습니다.
1899
[대한제국과 청국의 '한청통상조약' 체결]
청일전쟁으로 와해된 조선(대한제국)과 청국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한청통상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청의 조선에 대한 '번속' 인식을 넘어, 상호 평등한 관계에서 국제법을 근거로 현안을 처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광무' 연호 반포와 환구단 축조를 통해 황제 즉위를 추진하며 자주 독립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청국은 처음에는 조선을 '번속'으로 대하며 조약 체결에 난색을 표했으나, 결국 광서제의 지시로 먼저 사절을 파견하며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간도 영토 문제에 대한 미묘한 논란의 씨앗을 남기며 훗날 분쟁의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1904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변계선후장정' 체결]
한청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간도 지역의 영유권 문제 해결을 위해 조선과 청국 간에 '변계선후장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한국의 독립 이후 두만강 국경에 관한 최초의 성문 협정이었습니다.
이범윤의 간도 파견 등으로 인한 분쟁과 월경민, 비적 문제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변경 지역의 상황을 진정시키고, 두만강 국경의 현상 유지를 합의했습니다. 이는 간도 문제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후에도 간도 영유권 문제는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