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봉환
일본 역사, 정치 사건, 메이지 유신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8:36
* 1867년 에도 막부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한 정치적 사건입니다. * 무려 260년간 이어져 온 막부의 실질적인 통치를 끝내고 일본 역사에 거대한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 내전을 피하고 천황 아래 새로운 공의 정권 체제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 결과적으로 왕정복고 대호령과 메이지 유신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 평화적 정권 이양을 꿈꿨으나 결국 무력 충돌의 단초를 제공한 복합적인 사건입니다.
1858
[천황의 '무오의 밀칙' 하달로 막부 권위 흔들]
막부를 통하지 않고 미토번에 천황의 비밀 지시인 '무오의 밀칙'이 직접 내려왔습니다.
이는 조정이 막부의 정치 개혁과 외국 세력 배척을 요구하며, 오랫동안 이어진 막부의 권위에 노골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무오의 밀칙은 에도 막부가 '공무합체(公武合体)', 즉 조정과 막부의 협력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려던 시기에 조정의 자율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 밀칙으로 인해 조정의 자립적인 정치 세력화가 가속화되었고, 막부의 통치 정통성은 더욱 위협받게 됩니다. 이는 이후 대정봉환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정치적 갈등의 시작점이었습니다.
1863
[막부, '대정위임론' 재확인 시작]
에도 막부 말기, 조정이 급부상하며 대외 문제에서 막부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자, 막부는 천황이 쇼군에게 통치를 위임한다는 '대정위임론'을 재확인하고 제도화하려 합니다.
이는 막부 권력을 재강화하고 나라의 통일을 꾀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 시기 막부는 '정령일도(政令一途)', 즉 막부의 명령이 곧 조정의 명령이 되는 체제를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대정위임론의 재확인은 그 과정의 일환으로, 1864년 4월까지 논의와 보류를 거쳐 실질화되고 제도화됩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공무합체의 일환이었으나, 궁극적으로는 막부 중심의 통일 국가를 만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1864
[대정위임론 실질화 및 제도화 완료]
1863년 3월부터 시작된 막부와 조정 간의 논의 끝에, '대정위임론'이 공식적으로 재확인되고 실질적인 제도적 틀을 갖추게 됩니다.
이는 막부 권력 재강화 및 국가 통일을 위한 시도로, 당시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려는 막부의 노력이었습니다.
대정위임론의 제도화는 당시까지 관례에 불과했던 개념이 공식적인 문서와 절차를 통해 확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결국 조정과 막부 사이의 근본적인 권력 다툼을 해소하지 못했고, 오히려 조정의 자립성을 더욱 강화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는 이후 대정봉환 논의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1867
[사쓰마-토사 '삿토 토막의 밀약' 체결]
토사번의 이누이 다이스케와 다니 다테키가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만나 '삿토 토막의 밀약'을 맺습니다.
이 밀약은 막부와의 대립이 깊어지던 상황에서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려는 사쓰마번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밀약은 1864년의 참예회의 붕괴 이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의 대립이 심화되던 사쓰마번이 조슈번과 함께 무력 토막 노선을 강화한 결과였습니다.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던 토사번의 일부 세력도 이에 합류하며, 막부 타도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시작됩니다. 이 밀약은 대정봉환의 움직임에 맞서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토막파의 핵심 전략이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의 '선중8책' 제시 (논란)]
토사번의 사카모토 료마가 대정봉환을 포함한 새로운 정치 강령인 '선중8책'을 고토 쇼지로에게 제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내전을 피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막부 체제를 변혁하려는 구상이 담긴 중요한 제안이었습니다.
《선중8책》은 막부가 대정(정권)을 천황에게 봉환하고,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며, 새롭게 의사당을 설치하여 국시를 결정하는 등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후세의 창작이라는 논란도 있지만, 당시 개화적인 막부 신료들과 토사번의 고토 쇼지로가 대정봉환론을 적극적으로 주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고토 쇼지로, 대정봉환론 주장 시작]
토사번의 참정 고토 쇼지로가 교토에 머물던 토사번 간부들에게 대정봉환론의 채용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막부 체제를 개혁하고, 새로운 공의 정권 체제를 수립하려는 토사번의 핵심 전략이었습니다.
고토 쇼지로의 주장은 사쓰마번의 고마쓰 다케와키 등도 동의하면서 곧 '삿토 맹약'으로 이어집니다. 이 시기 토사번은 무력 토막보다는 대정봉환을 통한 평화적 정권 이양을 선호했으며, 이는 이후 요시노부의 대정봉환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고토는 일본 근대화를 위한 평화적이고 개혁적인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했습니다.
[토사-사쓰마 '삿토 맹약' 체결]
토사번과 사쓰마번이 막부가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고, 새로이 조정에 의사당을 설치해 국시를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삿토 맹약'을 체결합니다.
이는 막부 중심의 통치를 끝내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상하려는 중요한 합의였습니다.
삿토 맹약은 대정봉환론을 평화적으로 추진하려던 토사번과,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거부할 경우 이를 토막의 구실로 삼으려던 사쓰마번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체결되었습니다. 맹약에는 공경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정의로운 자'를 선거하여 의원으로 삼는다는 혁신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맹약이 결국 파기되지만, 이는 대정봉환 논의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삿토 맹약' 결국 파기]
토사번과 사쓰마번 사이의 '삿토 맹약'이 결국 파기됩니다.
사쓰마번은 조슈번과 함께 무력 토막 노선을 계속 추진한 반면, 토사번은 상경 출병에 반대하며 쇼군직 폐지 조항을 삭제하려 하는 등 양측의 입장 차이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토사번은 평화적인 대정봉환을 통해 막부 중심의 체제를 개혁하려 했으나, 사쓰마번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무력 동원을 준비했습니다. 결국 각 번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노선 차이로 인해 삿토 맹약은 결렬되었고, 토막파는 무력 행동을 통해 막부를 타도하려는 방향으로 더욱 굳어지게 됩니다. 이는 이후 왕정복고로 이어지는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야마우치 요도, '대정봉환 건백서' 제출]
토사번의 야마우치 요도가 노중 이타쿠라 가쓰키요를 통해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대정봉환 건백서'를 제출합니다.
이는 도막파의 무력 시위를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려는 요시노부의 움직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야마우치 요도의 건백서는 막부의 독재를 시정하고 도쿠가와 종가를 필두로 하는 제후들에 의한 '공의 정권 체제'를 수립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건백서 제출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공식적으로 추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일본의 정치 지형을 뒤흔드는 중대한 발걸음이었습니다.
[다이묘 중신들에게 니조성 출두 요청]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국가 대사를 위해 의견을 묻고자 한다'는 취지로 교토에 머물던 10만 석 이상의 다이묘 중신들에게 니조성으로 출두하라는 글을 전달합니다.
이는 대정봉환을 위한 막부의 공식적인 절차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요시노부는 다이묘 중신들을 소집하여 대정봉환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지지를 얻으려 했습니다. 이 소집은 단순히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막부의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주요 번들의 동의를 구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이는 260년간 이어져 온 막부 통치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보의 시작이었습니다.
[대정봉환 의도 담긴 밀서 전달 및 상표문 초안 작성]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 의도가 담긴 밀서가 이타쿠라 가쓰키요의 고문 야마다 호코쿠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즉시 대정봉환 상표문의 초안을 작성하여 교토로 보냅니다.
동시에 막부의 관료들과 유력 번의 다이묘들에게도 대정봉환 방침이 전달되며 준비가 급물살을 탑니다.
이날의 움직임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공식화하기 위한 실무적인 준비를 완료했음을 보여줍니다. 밀서와 초안 작업은 대정봉환의 핵심 문건을 마련하는 과정이었으며, 유력 다이묘들에게 방침을 알린 것은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는 막부의 마지막 총력을 다한 정권 이양 준비 과정의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니조성, 중신 회동서 대정봉환 의사 공식 표명]
니조성 니노마루 대광장에 40개 번의 중신 약 50명이 모여 막부의 대정봉환 의사가 담긴 서류를 받습니다.
토사번의 고토 쇼지로, 사쓰마번의 고마쓰 기요카도 등 6명이 직접 요시노부를 알현하며 최종적으로 의사를 확인하고, 막부의 대정봉환 의사가 공식적으로 표명됩니다.
이 회동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직접 대정봉환의 뜻을 알리는 공식적인 자리였습니다. 중신들에게 서류를 배포하고 직접 의견을 묻는 형식은 막부가 주도적으로 정권 반환을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중신들이 서류에 동의 의사를 적어 반환했으며, 이는 대정봉환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배경이 됩니다. 이 사건은 260여 년간 일본을 통치했던 에도 막부의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였습니다.
[에도 막부, 260년 통치권 천황에게 반납 선언!]
에도 막부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겠다는 '대정봉환 상표문'을 공식 제출합니다.
이는 막부의 독재를 시정하고 내전을 피하며 새로운 공의 정권 체제를 수립하려는 야심찬 시도였습니다.
이로써 무려 260년간 이어진 에도 막부의 실질적인 통치 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마련됩니다!.
1867년 11월 9일,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고케 다이묘인 오자와 모토히사를 사자로 삼아 조정에 대정봉환 상표문을 제출하고 수리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이 추진하는 토막 운동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형식적으로 정권을 반환하더라도 도쿠가와 가문이 천황 아래 새로운 정부에 참여하여 실질적으로 정권을 계속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상표문에는 정이대장군직 사임에 대한 언급이 없어 요시노부는 여전히 무가의 동량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은 일본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천황, 쇼군 요시노부의 정권 반납 공식 허가!]
전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제출한 대정봉환 상표문에 대해 메이지 천황이 이를 공식적으로 허가합니다.
조정은 충분한 논의 후 향후 결정을 내리겠다고 밝히며, 쇼군가의 영지에 대해서도 추후 결정할 것을 명시했습니다.
이는 막부의 시대가 끝나고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것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일본 제국 시대에는 천황에 대한 주요 기념일이 대정봉환 다음 날인 11월 10일에 집중될 정도로 상징성이 컸습니다!.
메이지 천황은 1867년 11월 10일, 요시노부를 포함한 조의에서 대정봉환 수리를 결정하고, 요시노부에게 명령문(沙汰書)을 전달했습니다. 당시 조정 상층부는 이에 당황했으나, 고마쓰 다테와키와 고토 쇼지로의 적극적인 중재로 허가가 이루어졌습니다. 같은 날, 조정은 10만 석 이상의 모든 다이묘들에게 교토 상락을 명했습니다. 대정봉환은 표면적으로는 정권 이양이었지만, 요시노부는 여전히 쇼군직을 유지하며 군권을 가지고 있었고, 막부는 조정의 정무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 했습니다.
[막부에 긴급 정무 처리 위임]
대정봉환 이후, 조정은 '제후 회의가 수습될 때까지'라는 조건을 달고 긴급 정무 처리를 막부에 계속 위임합니다.
이는 형식적인 정권 반납에도 불구하고 막부가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정이대장군직도 잠정적으로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되면서, 사실상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의한 정권 장악이 계속되었습니다. 조정은 아직 새로운 정부 체제를 제대로 구축할 능력이 없었기에, 실질적인 국정 운영을 막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대정봉환 이후에도 권력의 실제 이양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조정, 외교 사무 지속적 막부 위임 통지]
대정봉환 이후, 조정은 외교 문제에 대한 대처 능력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고, 외교 사무를 계속해서 막부가 중심이 되어 진행할 것을 공식 통지합니다.
이는 막부가 형식적으로 정권을 반환했음에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당시 조정은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나 외교 협상 능력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막부가 외교 업무를 계속 담당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11월 19일에는 에도와 니가타의 개항 연기를 통고하고, 11월 28일에는 러시아와의 개정세 약서를 체결하는 등 중요한 외교 활동도 막부가 직접 수행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천황 중심 정부가 아직 혼란기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정이대장군 사임 요청]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이대장군직 사임을 조정에 요청합니다.
대정봉환 상표문에는 쇼군직 사임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나, 사쓰마번의 고마쓰 다테와키 등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마침내 이루어진 조치입니다.
요시노부는 쇼군직 사임을 표명할 경우 가신들이 불만을 가질 것을 우려하여 처음에는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토막파의 압박과 정세 변화에 따라 결국 사임을 요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요청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요시노부의 퇴진 여부에 대해 주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상황은 계속되었고, 요시노부는 실질적인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듯 보였습니다.
[사쓰마 번주 시마즈 모치히사, 군대 이끌고 교토 상경]
사쓰마번 내 무력 도막파의 주도 아래 번주 시마즈 모치히사가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합니다.
이는 대정봉환 이후에도 요시노부가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하자, 막부 타도를 위한 무력 행동을 본격화하려는 사쓰마번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대정봉환으로 막부가 형식적으로 정권을 반납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여전히 쇼군직을 유지하며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막파의 불만은 커져갔습니다. 시마즈 모치히사의 군사적 움직임은 이러한 불만이 폭발 직전임을 암시하며, 이후 '왕정복고 대호령'과 같은 무력적 수단을 통해 막부 체제를 완전히 종식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습니다.
1868
[일본제국 수립 선언! 왕정복고 대호령 발표!]
사쓰마번과 이와쿠라 토모미를 중심으로 한 토막파가 쿠데타를 통해 '왕정복고 대호령'을 선포하며 일본제국의 수립을 알립니다.
이는 섭정, 관백 등 기존 관직을 폐지하고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부 체제를 수립하는 것으로, 대정봉환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습니다!.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선포되면서 막부가 폐지되고 천황이 일본의 유일한 통치자로 복귀했습니다. 이는 대정봉환으로 인해 명분상 막부의 시대가 끝났지만, 여전히 막부가 실권을 쥐고 있던 상황을 타개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확립하려는 토막파의 강경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메이지 유신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며, 이후 도바·후시미 전투와 보신 전쟁 같은 내전으로 이어져 막부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로써 새로운 근대 국가 일본의 기틀이 마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