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전쟁
국가 테러, 군부 독재, 인권 침해, 정치 탄압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8:32
• 20세기 후반 특히 1970년대 중남미와 스페인에서 발발한 국가 주도 폭력 사태. • 일반 전쟁과 달리 민간인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아 광범위한 탄압 자행. • 아르헨티나 멕시코 칠레 등에서 대규모 고문 강제 실종 살해 등 조직적 인권 유린 발생. • 국가 안보를 명목으로 민간인 사회를 해체하려 했던 비인도적 충돌.
1960
[멕시코 '더러운 전쟁' 개시]
멕시코에서 반정부 무장 반대 운동을 해산시키기 위한 일련의 군사 및 정치적 탄압 조치가 시작됩니다.
멕시코의 더러운 전쟁은 언론 탄압 등으로 인해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강도와 잔혹함은 결코 낮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이어진 멕시코의 더러운 전쟁은 반정부적 무장 반대 운동을 해산시키기 위해 자행된 일련의 군사 및 정치적 탄압 조치를 말합니다. 이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일어난 것과 달리 본질적으로 분리적 성격이며, 군대와 공모한 언론에 의해 자행되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강도가 낮은 전쟁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론 탄압 등으로 인해 그 실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수많은 사망자와 실종자를 남겼습니다.
1962
[루벤 하라미요와 가족 암살 사건]
멕시코에서 사파치스타 지도자 루벤 하라미요가 '소치칼코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군과 고위 관료들의 공모로 암살당합니다.
그의 집은 군인들에게 포위되었고, 임신 중이던 아내와 아이들까지 납치되어 살해당하는 잔혹한 국가 범죄가 자행되었습니다.
루벤의 몸에는 9개의 총탄 자국이 발견될 정도로 무자비했습니다.
1962년 5월 23일 오후 2시, 마누엘 후스토 디아즈 상사, 카를로스 살루에 서장, 구스타보 오르테가 대위, 로베르토 라모스 카스타네이라 등 당시 고위급 관료들의 지원을 받은 '소치칼코 작전'이 시행되었습니다. 이 작전의 목적은 사파치스타 지도자 루벤 자라밀로를 암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카테펙 군부대장 호세 마르티네스의 주도 하에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55명의 군사로 조직된 5개의 소대와, 두 대의 장갑차와 지프차 몇 대가 루벤 자라밀로의 집을 둘러쌌고, 당시 함께 있던 임신 중이던 아내와 아이들 모두가 납치되어 살해당했습니다. 루벤의 몸에는 머리에 박힌 2개를 포함해 9개의 총탄 자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1973
[피노체트 칠레 군부 쿠데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칠레에서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고 군사 독재를 수립했습니다.
이는 칠레의 '더러운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반정부 세력에 대한 조직적이고 은밀한 국가적 테러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가 전복되고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피노체트 정권은 이후 반정부 세력을 근절하고 공포정치를 통해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적이고 은밀한 국가적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칠레 국가 정보국(DINA) 창설]
칠레 피노체트 정권이 국가 정보국(DINA)을 창설하며 반체제 인사 박해를 위한 구금, 심문, 고문 관행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칠레는 대규모 실종 사건을 야기하며 독재의 공포를 극대화했습니다.
1973년 말, 칠레 피노체트 군사 독재 정권은 국가 테러리즘의 목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국가 정보국(DINA)을 창설했습니다. DINA는 정치적 적에 대한 박해를 목표로 구금, 심문 및 고문 관행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칠레 독재 정부는 정치 교도소 운영, 납치와 살인 외에도 시신을 숨기거나 버리면서 독재 기간 내내 대규모 실종 사건들을 일으켰습니다. DINA는 1977년 실권할 때까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게 직접적으로 의존하며 '국가 안보와 국가의 발전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 수립에 필요한 정보 수집과 '반체제적'이라고 여겨지는 개개인을 식별하고 제거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74
[칠레 콘도르 작전 언론 조작]
칠레 독재정권은 '콘도르 작전'의 일환으로 언론 매체를 동원해 허위 정보를 유포하고 정보를 조작했습니다.
이는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119명의 실종을 숨기려 했던 조직적인 선전 활동이었으며, 언론이 국가 테러 행위를 은폐하는 데 협조한 비극적인 사례로 기록됩니다.
1974년과 1975년 사이, 콘도르 작전의 틀 내에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정보 기관이 연계되었습니다. 이 작전의 목표는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좌파 극단주의자들의 활동 관련 뉴스 보도 발행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엘 머큐리오(El Mercurio)와 라 세군다(La Segunda)를 비롯한 칠레 언론은 좌익 단체 간의 대립과 학살에 대한 뉴스를 1면에 게재하며 칠레의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119명의 실종을 숨기려 했습니다. 보고서에 명시된 대로 해당 작업은 '선전, 허위 정보 및 정보 조작의 국제적 행동'을 구성했습니다.
1976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 발발]
호르헤 비델라 대통령 집권 시절,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국가재편성'을 구실로 국가에 의한 테러를 시작합니다.
이는 조직적인 고문, 강제 실종, 정보 조작을 특징으로 하며, 콘도르 작전의 일부로 수만 명의 학생, 기자, 페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희생되거나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역사의 서막이었습니다.
최소 9,000명에서 최대 3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호르헤 비델라 대통령 집권 시절인 1976년 3월 24일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군사정권이 '국가재편성'을 구실삼아 국가에 의한 테러, 조직적인 고문, 강제 실종, 정보 조작을 자행한 시기를 일컫습니다. 학생·기자·페론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게릴라 및 동조자가 주피해자입니다. 약 1만 명 정도의 몬토네로스와 인민혁명군의 게릴라가 실종됐고, 최소 9,000명에서 최대 3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더러운 전쟁은 콘도르 작전의 일부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300여 곳에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운영했습니다.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에만 이런 수용소가 한때 수십 개에 이르렀습니다.
1977
[아르헨티나 주교회 군부 비판 성명]
아르헨티나 가톨릭 주교회가 군부의 통치 방식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군부 독재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부 성직자들이 납치와 고문에 직접 가담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주교회는 1977년 5월 군부의 통치방식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또 다른 한편에선 직접 납치와 고문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크리스티안 폰 베르니히 신부는 반체제 인사들의 납치와 고문, 살해에 직접 가담한 정황이 《눈카 마스》 보고서에 드러났습니다.
1979
[교황 프란치스코 '더러운 전쟁' 의혹]
1979년 당시 아르헨티나 예수회 총장이던 교황 프란치스코(당시 베르골리오 신부)가 군사정권의 예수회 소속 신부 2명에 대한 체포·고문을 방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부 문서가 폭로되었습니다.
문서에는 그가 할릭스 신부의 여권 발급을 거부하라고 권고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1979년 아르헨티나 항구 도시 바이아블랑카에서 납치된 앨리사 파트노이는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의 교회는 역할 분담이 되어 있는데 그중 군을 지원하는 분야가 있다. 프란치스코(당시 추기경)는 그 분야에 속해 있었다”고 언급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신문 <파히나 12>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1970년대 아르헨티나 예수회 총장 시절 군사정권의 예수회 소속 신부 2명에 대한 체포·고문을 방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부 문서를 폭로했습니다. 이 신문은 1979년 당시 예수회 총장이던 그가 군사정권한테 납치돼 고문당한 프란시스코 할릭스 신부의 여권 발급을 거부하라고 권고한 내용을 담은 아르헨티나 외교부의 문서를 공개했습니다. 문서에는 할릭스 신부가 교단의 명령에 불복종했고 게릴라와 접촉한 의혹이 있다며 “이 정보는 베르골리오(프란치스코 교황) 신부에 의해 제공됐으며, 그는 여권을 발급 해달라는 할릭스 신부의 요청을 거절하라는 특별 권고를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할릭스 신부와 오를란도 요리오 신부는 빈민가에서 일하다가 군사정권에 납치돼 6개월 동안 강제수용소에서 고문을 받다 풀려났습니다. 이 문서는 아르헨티나 언론인이자 더러운 전쟁 당시 실종자 가족들의 단체인 '5월 광장의 어머니회' 자문 변호사인 오라시오 베르비츠키가 군부독재 시절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비판한 저서 <침묵>에서 공개된 바 있습니다.
2007
[크리스티안 폰 베르니히 신부 종신형]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 당시 반체제 인사들의 납치, 고문, 살해에 직접 가담한 정황이 드러난 크리스티안 폰 베르니히 신부가 살인, 납치, 고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는 아르헨티나 과거사 청산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크리스티안 폰 베르니히(Christian Von Wernich) 신부는 반체제 인사들의 납치와 고문, 살해에 직접 가담한 정황이 《눈카 마스》 보고서에 드러나 결국 법정에 세워졌습니다. 베르니히 신부는 2007년 10월 10일 살인 7건, 납치 42건, 고문 31건에 개입한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에 처해졌습니다. 베르니히의 재판 기간 내내 침묵을 지켜왔던 아르헨티나 가톨릭 교단은 판결 뒤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가톨릭 사제가 ‘심각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게 돼 고통스럽게 여긴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군정 시절 인권보호에 실패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