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볼리바르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국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8:26
- 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 지배를 끝낸 위대한 해방자. -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페루 볼리비아의 독립을 이끌다. - 자신이 세운 통일 국가 그란콜롬비아의 와해와 동료의 죽음 속에 쓸쓸히 생을 마감하다. - 권력과 부를 멀리한 청렴한 이상주의자 볼리바르의 이름은 볼리비아의 국명이자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도시와 기관에 남아있다.
- 라틴 아메리카 해방자의 서막, 시몬 볼리바르 탄생
- 자유주의 사상에 눈을 뜨다
- 미국 방문, 합중국 구상에 영감을 받다
-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서막을 열다
- 베네수엘라, 최초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좌절
- '해방자'의 영광과 다시 찾아온 시련
- 피스바산 횡단, 콜롬비아를 해방시키다
- '미국 모델'의 통합 국가, 그란콜롬비아 탄생
- 남미 통합을 위한 '과야킬 회동'
- 아야쿠쵸 전투 승리와 페루 독립
- 마지막 해방, 알토 페루의 독립
- 독립 영웅의 이름이 '나라'가 되다! 볼리비아 국명 제정
- 남미 통합의 꿈, 파나마 연맹회의에서 좌절되다
- 모든 권력과 명예를 내려놓다
- 라틴 아메리카 '해방자'의 쓸쓸한 마지막
1783
[라틴 아메리카 해방자의 서막, 시몬 볼리바르 탄생]
스페인령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유복한 명문가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지만, 흑인 여종의 보살핌 속에서 노예 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키웠다.
1792
[어머니의 죽음과 불안한 성장기]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고, 넉넉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친척들의 보살핌 속에 엄격한 외삼촌과의 갈등을 겪으며 반항적인 성격으로 성장했다.
1795
[자유주의 사상에 눈을 뜨다]
12살 무렵 외삼촌 집을 나와 결혼한 큰 누나와 살면서 진보적 가치를 신봉하는 시몬 로드리게스에게 장 자크 루소와 몽테스키외의 사상을 배우며 자유주의에 심취했다.
이는 그가 스페인 식민 통치에 맞서 독립 투쟁에 나서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798
1799
[유럽 여행과 지식인의 성장]
1799년부터 1802년까지 멕시코와 유럽(스페인, 프랑스)을 여행하며 독립 열망과 함께 교양과 자유주의 사상을 깊이 있게 흡수했다.
특히 스페인의 지식인 우스타리스 후작과의 만남은 그를 풍부한 학식을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시켰다.
1802
[사랑과 짧은 행복, 마리아 테레사와의 결혼]
마드리드에서 살던 외삼촌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여 잠시 고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803
[황열병으로 인한 아내의 죽음과 유럽 재방문]
아내가 황열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 시기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보며 절대 권력에 대한 멸시를 갖게 되었고, 망명 중이던 스승 로드리게스의 영향으로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가담을 결심하게 된다.
1807
[미국 방문, 합중국 구상에 영감을 받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짧은 미국 방문을 통해, 남아메리카가 독립할 경우 미국과 같은 강력한 합중국을 건설해야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품게 되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비전의 핵심이 된다.
1809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서막을 열다]
안드레스 베요,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등과 함께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을 이끌기 시작하며 그의 인생의 핵심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1811
[베네수엘라, 최초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좌절]
독립운동을 통해 베네수엘라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베네수엘라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독립에 반대하는 왕당파의 반란으로 인해 독립은 좌절되고 그는 검거를 피해 네덜란드령 퀴라소로 망명길에 올랐다.
1813
[카르타헤나 선언, 재도전을 외치다]
콜롬비아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로 피신하여 '카르타헤나 선언'을 통해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군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 독립 전쟁을 다시 지휘하기 시작했다.
1814
['해방자'의 영광과 다시 찾아온 시련]
스페인의 학정에 반감을 가진 청년들과 함께 독립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며 카라카스에 입성했다.
베네수엘라 공화국으로부터 '해방자'라는 큰 영광과 존경을 받았으나, 스페인군의 재침공으로 다시 패배하며 아이티로 망명해야 했다.
1816
[아이티 지원과 게릴라 전술로의 전환]
아이티 대통령 알렉산드르 페숑의 지원(흑인 노예 해방 조건)을 받았으나, 훈련 부족으로 1816년과 1817년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이후 대평원 지대 군벌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 전술로 전환하며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1818
[게릴라전의 성공과 전략적 후퇴]
게릴라 전술로 스페인군에 승리했으나, 스페인군의 재공격으로 그해 3월 26일 베네수엘라에서의 전쟁을 당분간 포기해야 했다.
1819
[피스바산 횡단, 콜롬비아를 해방시키다]
2,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5일간의 험준한 피스바산 산행을 감행하여 콜롬비아로 건너갔다.
현지 주민들의 환영과 5,000여 명의 영국 및 아일랜드군의 병력 지원을 받아 콜롬비아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미국 모델'의 통합 국가, 그란콜롬비아 탄생]
콜롬비아 해방 후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군사 지도자 및 의원 회의에서 미국을 모델로 삼은 연방 공화국 '그란콜롬비아'의 수립이 공식 승인되었다.
이는 볼리바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거대한 중남미 통합 국가의 서막이었다.
1821
[카라보보 대승과 베네수엘라 재탈환]
군인들을 훈련시켜 자신의 부대를 정예화한 후 카라보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그해 11월 21일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와 함께 카라카스에 재입성하며 베네수엘라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1822
[호세 데 산 마르틴과의 협력, 에콰도르 해방]
아르헨티나의 독립운동 지도자 호세 데 산 마르틴의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해방 소식에 자극받아 에콰도르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남미 통합을 위한 '과야킬 회동']
산 마르틴과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만나 남미지역 독립 문제에 대해 비밀 회담을 가졌다.
볼리바르는 강력한 중앙정부 중심의 연방 통합을 주장했으나, 산 마르틴은 입헌 군주제를 피력하며 의견 차이를 보였다.
회담 내용은 현재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
1824
[아야쿠쵸 전투 승리와 페루 독립]
산 마르틴이 일선에서 물러난 후, 볼리바르는 해방군을 파병하여 페루의 왕당파를 공격했다.
수크레가 이끄는 해방군이 아야쿠쵸 전투에서 스페인 부왕의 군대에 승리하며 페루가 최종적으로 독립했다.
1825
[마지막 해방, 알토 페루의 독립]
볼리바르와 협력한 수크레 원수가 안드레스 데 산타크루스와 함께 알토 페루(현 볼리비아) 지역을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 지역 지배층은 페루 및 아르헨티나와의 연합을 원치 않아 추키사카에서 알토 페루의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영웅의 이름이 '나라'가 되다! 볼리비아 국명 제정]
알토 페루가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된 후,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가명을 '볼리비아'로 제정했다.
이는 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국가명을 지은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상징적인 사건이다.
1826
[남미 통합의 꿈, 파나마 연맹회의에서 좌절되다]
파나마에서 개최된 연맹회의에서 남미 대륙의 통일 국가 건설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는 분열이 미국 등 외부 세력에 의한 경제적·정치적 종속을 초래할 것이라 경고했으나, 지역 간 소통 문제, 정치적 이해관계 충돌, 지역 군벌들의 욕심, 미국과 영국의 분열 정책 등으로 그의 원대한 구상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1828
[위기의 순간, 암살 미수 사건을 겪다]
오랜 독립 투쟁에 지쳐 건강이 나빠져가던 중, 정적들과 볼리바르의 흑인 노예 해방 정책에 반감을 가진 지주들의 소행으로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주모자를 국외 추방하고 관련자를 석방하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1829
[그란콜롬비아의 와해 시작, 베네수엘라 분리 독립]
그가 심혈을 기울여 세운 통합 국가 '그란콜롬비아'가 내부 갈등과 지역 군벌들의 욕심으로 인해 베네수엘라가 분리 독립하며 와해의 조짐을 보였다.
1830
[에콰도르 분리 독립, 그란콜롬비아의 최종 와해]
베네수엘라에 이어 에콰도르마저 그란콜롬비아로부터 분리 독립하며, 볼리바르의 평생 염원이었던 거대한 통합 국가는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모든 권력과 명예를 내려놓다]
자신이 건설한 '그란콜롬비아'가 와해되자, 종신 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의회에 반납했다.
심지어 거액의 연금 제안마저 거절하며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인파의 조롱 속에 보고타를 떠나다]
그란콜롬비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의미로 수도 보고타를 떠날 때, 시민들은 발코니에서 그에게 오물을 쏟아부으며 조롱했다.
위대한 해방자에게는 너무나도 쓸쓸한 마지막 길이었다.
[동료 수크레의 암살 소식에 건강 악화]
지병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중, 믿었던 동료이자 볼리비아 초대 대통령이었던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상심에 빠져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해방자'의 쓸쓸한 마지막]
요양 중이던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의 병자성사를 받은 뒤, 47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가 떠난 지 2년 후, 그란콜롬비아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