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전체주의, 독재 국가, 제국, 제2차 세계 대전, 나치즘, 홀로코스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4:30:27
나치 독일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여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독일을 통치한 전체주의 독재 국가입니다. * 대공황 시기 막대한 군사 지출과 사회 기반 시설 개발로 경제적 안정과 인기를 얻었습니다. * 극심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바탕으로 유대인 슬라브족 등을 대량 학살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습니다. * 공격적인 외교 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켜 유럽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 전쟁 후반 연합군의 반격에 직면 결국 12년 만에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 히틀러, 독일 총리 되다: 권력 장악의 시작
-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발생과 시민권 박탈
- 전권 위임법 통과: 히틀러 독재의 법적 기반 마련
- 장검의 밤: 돌격대 숙청과 히틀러 권력 강화
- 힌덴부르크 사망 후 히틀러, '퓌러'로 등극
- 독일의 군비 증강 시작: 공군 창설 및 재무장 선언
- 뉘른베르크법 제정: 유대인 박해의 법적 토대 마련
- 독일, 라인란트 재무장: 베르사유 조약 위반
- 오스트리아 병합 (안슐루스) 단행: 대독일국 실현의 첫걸음
- 뮌헨 협정 체결: 주데텐란트 합병과 '우리 시대의 평화'
- 독일, 폴란드에 영토 요구: 2차 세계 대전 전운 고조
-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 유럽의 운명을 가르다
- 독일의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폴란드 지식인 대량 학살: '타넨베르크 작전'
- 독일,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베저위붕 작전' 개시
- 독일, 프랑스 및 저지대 국가 침공
- 프랑스 항복: 콩피에뉴 휴전 협정 체결
- 영국 본토 항공전 실패와 '바다사자 작전' 연기
- 독일,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침공
- 독일, 소련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 독일, 미국에 선전포고: 세계대전 확전
- 스탈린그라드 반격 시작: 동부 전선의 전환점
-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독일군 역사상 최악의 재앙
- 쿠르스크 전투 패배: 동부 전선 주도권 완전 상실
- 노르망디 상륙 작전 (D-Day) 개시: 서부 전선 형성
- 히틀러 암살 시도 실패: 7.20 음모
- 아르덴 대공세 실패: 독일의 마지막 저항 무산
- 소련군 독일 본토 진입
- 베를린 전투 발발: 나치 독일의 최후
- 아돌프 히틀러 자살: 나치 독일 지도자의 최후
- 나치 독일 무조건 항복: 유럽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1933
[히틀러, 독일 총리 되다: 권력 장악의 시작]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나치당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고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마흐테르그라이풍(권력 장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발생과 시민권 박탈]
국가의회 의사당 건물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나치당은 네덜란드 공산주의자를 주범으로 지목하며 이를 공산주의 봉기의 시작으로 선전했습니다.
다음 날 통과된 '국가의회 화재에 관한 법률'은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경찰이 사람들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나치당의 독재 체제 구축을 가속화했습니다.
[전권 위임법 통과: 히틀러 독재의 법적 기반 마련]
바이마르 헌법을 개정하는 '전권 위임법'이 국가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이 법은 히틀러와 그의 정부가 대통령이나 의회의 동의 없이도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하여, 나치당 독재 정권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나치당은 협박과 의회 화재법을 이용해 공산당 의원들의 출입을 막고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독일, 일당제 국가로 전환: 모든 정당 해체]
독일 정부가 사회민주당의 자산을 압류하고 6월 22일 당을 불법 정당으로 선언했습니다.
이어서 7월 14일에는 '정당 결성에 대한 법률'이 통과되어 독일은 나치당만이 유일한 합법 정당인 일당제 국가가 되었으며, 모든 시민 단체의 지도부가 나치 동조자로 교체되거나 해체되는 '글라이히샬퉁' 과정이 진행되었습니다.
1934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 체결]
독일은 폴란드와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는 향후 폴란드 침공 전까지 양국 간의 표면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외교적 조치였습니다.
[장검의 밤: 돌격대 숙청과 히틀러 권력 강화]
돌격대의 지도부가 더 큰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요구하자, 히틀러는 슈츠슈타펠과 게슈타포를 동원해 돌격대 지도부와 정치적 반대파들을 숙청했습니다.
'장검의 밤'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200명에 달하는 돌격대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총살당하며 히틀러의 권력이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힌덴부르크 사망 후 히틀러, '퓌러'로 등극]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이전에 제정된 법률에 따라 총리직과 대통령직이 통합되어 히틀러는 '지도자 겸 국가수상(퓌러)'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독일은 히틀러를 최고 지도자로 한 전체주의 독재 국가가 되었으며, 그는 독일군의 최고사령관도 겸하게 되었습니다.
8월 19일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0%가 이 통합에 찬성했습니다.
1935
[자를란트, 주민투표로 독일에 복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연맹의 감독을 받았던 자를란트가 주민투표를 통해 독일의 일부가 되기로 결정하며 독일에 복귀했습니다.
이는 히틀러의 영토 확장의 첫 단계를 의미합니다.
[독일의 군비 증강 시작: 공군 창설 및 재무장 선언]
히틀러는 공군 창설을 발표하고 국가방위군을 55만 명까지 증강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을 노골적으로 위반하는 행위였으며, 독일의 본격적인 재무장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영국-독일 해군 협정 체결: 독일 해군력 증강 승인]
영국이 독일의 함선 건조를 동의하는 영국-독일 해군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허용하는 조약으로, 히틀러의 재무장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하켄크로이츠 국기, 독일의 유일한 국기로 지정]
흑백적 삼색기 대신 하켄크로이츠 국기가 독일의 유일한 공식 국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나치당의 상징이 국가 전체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나치 이념의 강화와 통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변화였습니다.
[뉘른베르크법 제정: 유대인 박해의 법적 토대 마련]
유대인의 지위와 권리를 박탈하는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은 아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성관계 및 결혼을 금지하고, 유대인에게서 재산과 직업 선택권을 빼앗는 등 유대인 박해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조치였습니다.
이후 롬인, 흑인 등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1936
[독일, 라인란트 재무장: 베르사유 조약 위반]
히틀러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을 명분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비무장지대였던 라인란트에 3천여 명의 병력을 진주시켰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전쟁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이를 용인하여 히틀러의 자신감을 더욱 키워주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개입: 프랑코 지원 및 콘도르 군단 파견]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해 군수품과 물적 자원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콘도르 군단'은 다양한 항공기와 전차 부대를 파견하여 국민파의 승리에 기여하며 나치 독일의 비공식 동맹국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8
[오스트리아 병합 (안슐루스) 단행: 대독일국 실현의 첫걸음]
히틀러의 협박에 이어 독일군이 오스트리아에 입성하며 '안슐루스(병합)'를 단행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이 병합은 히틀러의 '대게르만국' 건설이라는 장기적 목표의 중요한 첫 단계였습니다.
[뮌헨 협정 체결: 주데텐란트 합병과 '우리 시대의 평화']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중재로 뮌헨 협정이 체결되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해야만 했습니다.
체임벌린은 이 협정이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언했지만, 이는 히틀러의 다음 침공을 막지 못했습니다.
[제국 수정의 밤]
'제국 수정의 밤(Reichskristallnacht)' 또는 '깨진 유리의 밤'은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까지 독일 전역(당시 합병했던 오스트리아 포함)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사건입니다.
성격: 나치 당원, 돌격대(SA), 히틀러 청소년단 등이 주도한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동(포그롬)입니다.
배경: 파리에서 독일 외교관 에른스트 폼 라트(Ernst vom Rath)가 유대인 청년 헤르셸 그린슈판(Herschel Grynszpan)에게 암살당한 사건을 빌미로 삼았습니다.
결과: 수백 개의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이 불타고, 수천 개의 유대인 소유 상점과 주택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때 깨진 유리창이 거리를 뒤덮었다고 해서 '깨진 유리의 밤'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최소 91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으며, 약 3만 명의 유대인 남성이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1939
[독일, 리투아니아에 최후 통첩: 메멜 지역 합병]
독일은 리투아니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 메멜 지역을 얻어냈습니다.
이는 뮌헨 협정 이후에도 히틀러의 영토 확장 야욕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독일, 폴란드에 영토 요구: 2차 세계 대전 전운 고조]
히틀러가 단치히 자유시와 폴란드 회랑 지역을 독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영국은 폴란드가 공격받으면 지원하여 참전할 것이라고 발표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전운이 고조되었습니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 유럽의 운명을 가르다]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소련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는 폴란드와 발트 3국을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나누는 비밀 의정서가 포함되어,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위한 결정적인 포석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단치히 자유시를 점령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이는 히틀러의 영토 확장 야욕이 극단에 달한 결과였습니다.
조약 의무에 따라 이틀 뒤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9월 17일 소련이 동쪽에서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폴란드 지식인 대량 학살: '타넨베르크 작전']
나치당은 폴란드 국가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목표로 미리 준비된 명단을 바탕으로 약 6만 5천여 명의 폴란드 지식인, 귀족, 성직자, 교사들을 살해하는 '타넨베르크 작전'을 자행했습니다.
이는 폴란드 점령 후 자행된 잔혹한 인종 청소의 시작이었습니다.
1940
[독일,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베저위붕 작전' 개시]
스웨덴 철광석 선박 보호를 명분으로 히틀러는 '베저위붕 작전'을 통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습니다.
덴마크는 하루 만에 항복했고, 노르웨이도 한 달여 만에 점령당하며 독일의 유럽 장악 야욕을 보여주었습니다.
[독일, 프랑스 및 저지대 국가 침공]
히틀러는 프랑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독일군은 룩셈부르크, 네덜란드를 빠르게 점령하고 벨기에에서 연합군을 혼란시켜 됭케르크에서 영국과 프랑스군을 포위하는 등 압도적인 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프랑스 항복: 콩피에뉴 휴전 협정 체결]
독일군의 압도적인 공세 앞에 프랑스 정부가 항복하고 콩피에뉴 휴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독일은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며 히틀러의 인기는 급등했고 전쟁 열풍이 고조되었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 실패와 '바다사자 작전' 연기]
히틀러가 새로운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에게 보낸 평화 제의가 거부당하자, 영국 침공('바다사자 작전')을 위해 공중 우세 확보를 시도했으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을 격파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영국 침공을 무기한 연기해야 했습니다.
[헝가리, 추축국 가입]
헝가리가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하며 추축국의 4번째 가입국이 되었습니다.
이는 독일이 유럽 내 동맹국을 확보하고 자원을 확보하려는 외교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불가리아 및 루마니아, 추축국에 합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추축국에 가입했습니다.
독일은 특히 루마니아로부터 석유 등 필수 자원 공급을 확보하기 위해 동유럽 국가들과 무역 관계를 강화하고 동맹을 맺었습니다.
1941
[독일 아프리카 군단, 북아프리카 전선 투입]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이탈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도착하며 북아프리카 전선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침공]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역과 그리스 일부는 이후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불가리아에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독일, 소련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독일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위반하며 약 380만 명에 달하는 추축국 연합군이 소련을 공격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 침공인 이 대규모 공세는 '레벤스라움' 확보와 천연자원 탈취를 목적으로 했습니다.
[스몰렌스크 승리 후 모스크바 공세 중단]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군이 히틀러의 명령으로 모스크바 진격을 중단하고 레닌그라드와 키이우 포위 작전을 지원했습니다.
이 결정은 붉은 군대가 예비군을 동원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10월 재개된 모스크바 공세에서 12월까지 독일군의 비참한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독일, 미국에 선전포고: 세계대전 확전]
일본의 진주만 공격 나흘 후, 독일이 미국을 향해 선전포고했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명실상부한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2
['청색 작전' 개시: 코카서스 유전 확보 노림]
석유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독일이 코카서스 지역의 유전에 공세를 가하는 '청색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소련 침공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롬멜 아프리카 군단, 이집트에서 패배]
이집트에서 에르빈 롬멜 원수와 아프리카 군단이 버나드 몽고메리가 이끄는 영국군에 의해 격파되었습니다.
이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추축국의 전환점을 알리는 패배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 반격 시작: 동부 전선의 전환점]
붉은 군대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반격을 시작하여 11월 23일 스탈린그라드에 갇혀 있던 추축국 연합군을 포위했습니다.
이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이 주도권을 잃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43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독일군 역사상 최악의 재앙]
히틀러의 후퇴 거부로 인해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스탈린그라드에 갇혀있던 20만 명에 달하는 독일군과 루마니아군 병력이 사망하고 9만 1천 명이 항복했습니다.
항복한 병력 중 종전 후 독일로 돌아온 생존자는 6천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전투는 동부 전선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연합군 시칠리아 상륙 및 이탈리아 진격]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9월까지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했습니다.
이는 남유럽 전선에서 추축국의 패배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패배: 동부 전선 주도권 완전 상실]
붉은 군대가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후 서쪽으로 계속 진군했습니다.
이 패배로 1943년 말까지 독일군은 동부 점령지의 대부분을 잃으며 동부 전선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1944
[노르망디 상륙 작전 (D-Day) 개시: 서부 전선 형성]
미국, 영국, 캐나다군이 노르망디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인 'D-Day'를 개시하며 프랑스에 새로운 서부 전선을 형성했습니다.
이는 나치 독일을 양면에서 압박하는 결정적인 군사 작전이었습니다.
[히틀러 암살 시도 실패: 7.20 음모]
히틀러가 암살 시도를 받았으나 살아남았습니다.
'7.20 음모'로 불리는 이 사건에 분노한 그는 7천여 명을 체포하고 4,900명 이상을 처형하는 잔혹한 보복을 가했습니다.
[아르덴 대공세 실패: 독일의 마지막 저항 무산]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인 '아르덴 대공세'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패배로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도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했습니다.
1945
[소련군 독일 본토 진입]
소련군이 독일 본토로 진입하며 나치 독일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렸습니다.
히틀러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며 불필요한 인명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베를린 전투 발발: 나치 독일의 최후]
소련군이 베를린을 향해 진격하며 베를린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히틀러와 참모진들은 퓌러엄폐호에서 생활하며 전투를 지휘했으나, 결국 수도는 함락되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 자살: 나치 독일 지도자의 최후]
소련군이 총통 관저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까지 진군하자,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부인 에바 브라운이 자살했습니다.
이는 나치 독일의 최종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나치 독일 무조건 항복: 유럽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남아있던 대부분의 독일군이 무조건 항복했으며, '독일의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나치 정권이 종식되고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