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국제 군사 재판, 전쟁 범죄, 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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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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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군사 재판, 전쟁 범죄, 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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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이 나치 독일의 주요 지도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뉘른베르크에서 개최한 국제군사재판입니다. 이 재판은 홀로코스트와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고 국제형사법의 기틀을 마련하며 역사상 전례 없는 인도적 정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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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나치 '도살자' 하이드리히 암살, 재판 명단 제외]

일명 '유인원 작전'으로 나치 고위 인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 저항세력에 암살당하며 뉘른베르크 재판 피고 명단에서 제외됩니다.

그의 잔혹성은 재판 전부터 이미 심판받은 셈입니다.

1945

[나치 최고위 인사 보어만, 재판 전 사망 추정]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개시 전, 나치당 당관방지휘자 마르틴 보어만이 베를린 탈출 도중 음독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1972년 그의 시신이 베를린에서 발견되며 1945년 5월 2일 사망했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로베르트 라이, 재판을 피하고자 극단적 선택]

독일노동전선 총수 로베르트 라이가 뉘른베르크 재판 시작 직전 구치소에서 목을 매 자살합니다.

이 외에도 히틀러, 힘러, 괴벨스 등 나치 고위 인사 다수가 체포 직전 또는 직후 자살하며 법적 심판을 피했습니다.

[독일 최고 재벌 총수, 건강 악화로 재판 불능 판정]

독일의 거대 군수 기업 '크루프 주식회사'의 최고경영자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보흘렌 운트 할바흐는 심각한 신병을 이유로 재판이 연기됩니다.

사실 그는 이미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실제 경영은 아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본래 아들 알프레트 크루프를 기소했어야 했으나 착오로 구스타프가 기소되었으며, 검사단이 뒤늦게 알프레트 대리 기소를 시도했으나 판사들이 기각했습니다. 그는 결국 재판을 받지 못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세계 최초!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역사적 개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독일 뉘른베르크 정의궁에서 국제군사재판이 대망의 막을 올립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전쟁범죄 심판의 시작이었습니다.

총 24명의 나치 독일 정치·군사 지도자가 피소되었으며, 연합국 검사단은 나치당 등 7개 조직을 범죄조직으로 규정하려 했습니다.

1946

[1년 대장정 끝! 나치 전범들 최후의 심판 직면]

약 1년여간 진행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종결되고, 24명의 주요 나치 전범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내려집니다.

이 판결은 국제법 역사에 한 획을 그으며 전쟁범죄 처벌의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재판에서 규정되고 심판된 범죄들은 이후 유엔에서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침략범죄에 관한 법학을 발달시키는 기초가 되었으며,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나치 서열 2위 괴링, 교수형 전날 독극물로 자살]

사형 선고를 받은 나치당 내 2인자이자 공군 총수 헤르만 괴링이 교수형 집행 직전, 연합국의 감시를 뚫고 독약을 삼켜 자살합니다.

그는 총살형을 요구했지만 기각되자 최후의 저항을 택했습니다.

괴링은 재판 내내 당당한 태도를 보였으며, 총살형을 통해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려 했으나 소련 판사의 강력한 반대로 교수형이 결정되자 이에 반발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나치 수뇌부, 교수형으로 종말을 고하다]

사형을 선고받은 나치 독일의 핵심 인사 10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됩니다.

소련 측의 강력한 요구로 잔인한 질식사 방식으로 진행되어 더욱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스 프랑크, 빌헬름 프리크, 알프레트 요들,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빌헬름 카이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프리츠 자우켈,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처형되었습니다. 군인 신분이었던 요들, 카이텔 등은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소련 판사의 반대로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소련은 자국민 2천만 명 이상의 희생에 대한 복수심으로 고통스러운 질식사를 요구했으며, 이들의 훈장과 서훈은 모두 제거된 채 집행되었습니다.

1950

[라디오 해설가 한스 프리체, 무혐의로 석방]

라디오 해설가 한스 프리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무혐의로 석방됩니다.

그는 괴벨스와 목소리가 비슷해 나치 선전에 활용되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면했습니다.

[크루프 재벌 총수, 재판 없이 미결수로 사망]

재판 연기 후 미결수 상태로 남아있던 크루프 재벌 총수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보흘렌 운트 할바흐가 사망합니다.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끝내 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국제군사재판을 피한 그의 아들 알프레트는 이후 미군 군사재판인 '크루프 재판'에 기소되어 처벌받습니다.

1953

[알프레트 요들 복권 시도, 최종적으로 좌절]

사형이 집행되었던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은 사후 재심으로 복권되었다가 다시 번복되어 복권이 취소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의 전쟁범죄 혐의는 최종적으로 유효하게 남았습니다.

1954

[전 외무장관 노이라트, 건강 문제로 조기 석방]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전 외무국가장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남작이 심장마비를 일으켜 신병을 이유로 석방됩니다.

그는 히틀러와의 불화로 일찍 사임한 바 있습니다.

1955

[전 해군 총수 레더 대제독, 건강상 이유로 석방]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전 전쟁해군 총수 에리히 레더 대제독이 신병을 이유로 석방됩니다.

그는 잠수함 작전 개시로 유죄가 확정된 카를 되니츠의 전임자였습니다.

1956

[전 외무장관 노이라트 남작 사망]

1954년 건강상의 이유로 조기 석방되었던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남작이 심장마비 후유증으로 사망합니다.

[히틀러 후임 독일 대통령 되니츠, 형기 마치고 석방]

10년형을 선고받았던 히틀러 사후 독일 대통령 카를 되니츠 해군원수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됩니다.

그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미국의 유사 행위가 참작되어 감형되었습니다.

1957

[전 경제장관 풍크, 건강상 이유로 석방]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경제국가장관 발터 풍크가 신병을 이유로 석방됩니다.

그는 국가은행 총재를 지내며 나치 경제 정책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1960

[전 경제장관 발터 풍크 사망]

1957년 석방되었던 발터 풍크 전 경제국가장관이 사망합니다.

[전 해군 총수 에리히 레더 대제독 사망]

1955년 석방되었던 전 전쟁해군 총수 에리히 레더 대제독이 사망합니다.

1972

[궐석 사형수 보어만, 27년 만에 시신 발견]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궐석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나치당 당관방지휘자 마르틴 보어만의 시체가 베를린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1945년 5월 2일 그의 사망 사실을 확정 짓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재판 당시 궐석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던 보어만은 베를린 최후의 날 도시를 빠져나가던 와중 음독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80

[카를 되니츠 해군원수 사망]

뉘른베르크 재판 피고 중 마지막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카를 되니츠 해군원수가 사망합니다.

이로써 재판의 주요 피고인 대부분이 생을 마감했습니다.

1987

[나치 최고위 생존자 헤스,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자살]

종신형을 선고받고 슈판다우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지도자대리 루돌프 헤스가 자살합니다.

그는 1941년 영국과 강화회담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줄곧 포로 신세였습니다.

헤스는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슈판다우 교도소의 마지막 수감자로 남아 있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뉘른베르크 재판 관련 모든 피고의 실질적인 역사는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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