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

정치 스캔들, 인권 유린, 반유대주의, 사법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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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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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스캔들, 인권 유린, 반유대주의, 사법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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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프랑스를 뒤흔든 희대의 정치 스캔들. 포병 대위 드레퓌스가 반유대주의와 애국심에 희생되어 간첩으로 조작된 인권유린 사건. 프랑스 사회를 둘로 나누며 내전 직전까지 격렬한 대립을 초래.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진실이 밝혀지고 사법 정의의 상징이 됨. 이 사건은 프랑스 정교분리 원칙 라이시테 확립과 시오니즘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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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프랑스군 내부 간첩의 존재 확인]

프랑스 정보국 요원이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빼낸 문서를 통해 프랑스군 내부에 군사 기밀을 유출하는 간첩 행위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문서는 독일에 넘겨준 프랑스군 비밀 문서 목록이 담긴 편지 형식이었다.

[드레퓌스 대위, 반역죄로 종신형 선고]

육군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와 유대인이라는 편견으로 간첩으로 지목되어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과 치욕적인 군적 박탈식을 선고받았다.

그는 무죄를 외쳤으나 군중의 비난에 묻히고 말았다.

1895

[드레퓌스, 치욕적인 군적 박탈식 거행]

프랑스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공개적으로 군적 박탈식을 당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유태인을 죽여라"는 군중의 외침에 묻히고 말았다.

이 장면은 당대 언론에도 보도되며 사건의 시작을 알렸다.

[드레퓌스, 악마섬으로 유배되다]

반역죄로 불명예 전역당한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외딴 섬인 악마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1896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 적발]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다른 간첩 사건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드레퓌스가 무죄이며, 진범이 에스테라지 소령임을 알아냈다.

그는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1897

[진범 구속 후 군부의 은폐 및 조작]

드레퓌스 가족과 일부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897년 진범이 구속되었으나, 군부는 신뢰 추락을 우려해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은폐하고 증거를 조작하여 진범을 풀어주었다.

이로 인해 사건의 진실 규명은 더욱 어려워졌다.

[시오니즘 운동 본격화 및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 개최]

드레퓌스 사건을 목격한 유대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반유대주의의 심각성을 깨닫고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국하겠다는 시오니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의 주도로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가 열려 시오니스트 기구와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이스라엘 건국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된다.

1898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의 무죄 석방]

드레퓌스의 진범으로 지목된 에스테라지 소령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나, 그는 1898년 1월 10일 무죄로 풀려났다.

군부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에스테라지를 묵인하며 사건을 계속해서 은폐하려 했다.

[에밀 졸라, 세상을 뒤흔든 격문 '나는 고발한다' 발표]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신문 '로로르'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형식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를 게재했다.

그는 군부의 부도덕성과 사법 조작을 대중에게 고발하며 진실을 촉구했다.

이 글은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프랑스 사회를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양분시키고 내전 수준의 격렬한 투쟁을 불러왔다.

[문서 조작 가담 앙리 중령, 감방에서 자살]

진범 에스테라지와 함께 문서를 조작한 앙리 중령이 감방에서 자살했다.

이 사건은 군부가 증거를 위조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건을 조작했음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고, 드레퓌스 재심 요구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로로르'지는 앙리 중령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예수회 회원들이 그에게 불명예 퇴역 대신 자살을 강요하여 미망인에게 연금을 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는 기사를 실으며 자살 배후 의혹을 제기했다.

1899

[고등법원, 드레퓌스 사건 재심 결정]

에밀 졸라를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과 전 세계 언론의 압력으로 프랑스 정부는 외교적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고등법원이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드레퓌스, 악마섬 유배지 떠나다]

고등법원의 재심 결정에 따라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99년 6월 10일, 억울한 유배 생활을 끝내고 악마섬을 떠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누명을 벗을 수 있는 희망의 신호탄이 되었다.

[드레퓌스, 재심에서 10년형 선고받다]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유죄 판결을 받아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그의 무죄를 주장했던 지지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드레퓌스,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다]

재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은 지 10일 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대통령의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 사면은 복권까지는 이어지지 않아 그의 명예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1904

[드레퓌스, 다시 재심 청구]

대통령의 사면으로 석방되었으나 명예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던 드레퓌스는 1904년 다시 재심을 청구하며 완전한 무죄와 복권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시오니즘의 아버지 테오도르 헤르츨 사망]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시오니즘 운동을 시작하고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를 개최했던 테오도르 헤르츨이 1904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시오니즘 운동은 계속되었다.

1905

[프랑스,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정교분리법 통과]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정적 역할이 부각되면서, 프랑스에서는 마침내 국가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하는 '라이시테' 원칙을 확립하는 정교분리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프랑스 공화국이 어떠한 종교도 국교로 인정하지 않고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며, 종교가 정치적 권한을 행사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이 법은 당시 수상인 콩브의 이름을 따서 "콩브법"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법 통과 후 교황 비오 10세는 강력히 비난하며 프랑스와 가톨릭교회 관계가 수년간 악화되었다. 또한 1901년 '결사에 관한 법'을 시작으로 1902년 약 3천 개의 가톨릭학교 폐쇄, 1903년 남성 및 여성 수도단체 해산, 1904년 새로운 수도단체 결성 금지 등 일련의 법률들이 제정되었다.

1906

[드레퓌스,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선고 및 복권]

1904년에 재심이 청구되었던 드레퓌스 사건은 1906년 대법원에서 마침내 무죄가 선고되며 모든 혐의를 벗었다.

그는 육군에 복직되어 소령으로 승진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으며 명예를 완전히 회복했다.

이로써 12년에 걸친 드레퓌스 사건은 최종적으로 종결되었다.

1935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망]

모든 혐의를 벗고 복권되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으며, 1935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삶은 사건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으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지키려 했다.

1998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발표 100주년 기념]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항의하여 명문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 프랑스에서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졸라의 집에 현판식을 갖고 기념비를 헌정했다.

국립도서관은 졸라의 원본과 관련 문서를 전시했으며, 판테옹에서는 당시 공권력 수장이 참석해 국가 권력 남용 방지를 다짐하며 졸라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는 인권 유린과 진실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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