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롱드의 난

귀족 반란, 내전, 절대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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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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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반란, 내전, 절대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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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대항한 귀족 세력의 최후 내란. 당시 파리 어린이들이 사용하던 투석기를 뜻하는 프롱드에서 유래. 왕권 견제를 목표로 고등법원과 귀족들이 두 차례에 걸쳐 일으켰으나 반란 진압으로 오히려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확립의 길을 열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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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8

[고등법원의 조세 저항과 헌법 개혁 요구]

파리 고등법원이 사법관들에게 부과된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헌법 개혁 계획의 수용을 요구하며 왕실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는 프롱드의 난의 시작을 알리는 고등법원 프롱드의 서막이었습니다.

[마자랭의 반란 지도자 체포와 파리 시민의 봉기]

콘데 공작의 랑스 승전 소식이 전해진 후, 마자랭 추기경은 반란 지도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거리마다 장애물을 설치하며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이 사건은 제1차 프롱드의 난이 본격적으로 군사적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실, 파리를 떠나다]

파리 시민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왕실은 포로들을 석방하고 개혁을 약속한 뒤, 늦은 밤 파리를 탈출했습니다.

이는 왕권이 시민들의 반발에 의해 일시적으로 후퇴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30년 전쟁의 종결, 베스트팔렌 조약]

30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베스트팔렌 조약(뮌스터 조약)이 서명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 군대가 국경에서 돌아와 국내 반란 진압에 투입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습니다.

1649

[콘데 공작, 파리를 포위하다]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로 국경에서 복귀한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콘데 공작이 파리를 포위하고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로써 고등법원 프롱드는 군사적 대치 국면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루일 조약으로 제1차 프롱드 막을 내리다]

파리를 포위한 왕당파와 반란군 사이에 루일 조약이 체결되어 제1차 고등법원 프롱드가 종식되었습니다.

이는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왔지만, 진정한 해결은 아니었습니다.

1650

[마자랭의 제후 체포, 제2차 프롱드의 불씨]

평화가 지속되던 중, 마자랭 추기경이 갑작스럽게 콩데, 콩티, 롱그빌 등 유력 제후들을 체포했습니다.

이에 튀렌 자작이 무장 반란을 이끌며 제2차 제후들의 프롱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권력 다툼으로 변질된 프롱드의 난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레텔 전투: 튀렌의 프롱드군 대패]

블랑샹(레텔 근처)에서 왕군과 튀렌이 이끄는 프롱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투는 한동안 승패를 알 수 없었으나, 결국 튀렌의 프롱드파가 무너져 군대로서의 모습을 잃었고, 튀렌은 국왕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1651

[제후 석방과 마자랭의 첫 망명]

감금되었던 콩데, 콩티, 롱그빌 등 주요 제후들이 석방되었습니다.

동시에 모든 제후들의 증오 대상이 된 마자랭 추기경은 프랑스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고, 이로 인해 한동안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마자랭의 귀환, 튀렌과 콩데의 대결 시작]

망명 중이던 마자랭 추기경이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점부터 이전에는 한편이었던 튀렌과 콩데가 서로에게 맞서는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1652

[블레노 전투: 콩데의 대담한 지휘]

루아르강 유역에서 콩데의 대담한 지휘 아래 프롱드군이 왕군 일부를 궤멸시키는 블레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콩데는 적군의 능숙한 배치를 보고 튀렌의 존재를 감지하여 전투를 중단했습니다.

콩데는 튀렌의 후위대 지휘관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조롱하며 "우리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 한 건달을 위해 서로의 목을 치고 있다니 안타깝군"이라고 말하여 봉건적 오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생탕투안 구역 전투: 파리 성문 앞 혈투]

왕군이 생탕투안 구역에서 프롱드파를 파리 성문 앞으로 몰아넣고 포위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콩데 공작의 용맹에도 불구하고 프롱드군이 큰 위기에 처했지만, 몽팡시에 공작부인이 파리 시민들을 설득해 성문을 열고 바스티유 대포를 발포하며 콩데군을 구원했습니다.

이 전투는 프롱드의 난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파리 시민의 개입이 전쟁의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반란 정부가 파리에 수립되었습니다.

[파리 시민의 결정: 국왕 파리로 귀환하다]

마자랭이 다시 망명길에 오르자, 제후들과 다투던 파리의 부르주아들은 왕실의 파리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이로써 루이 14세 국왕이 파리에 입성하며 수도의 통제권을 되찾았습니다.

1653

[마자랭의 최종 귀환과 프롱드의 난 종결]

두 번의 망명 끝에 마자랭 추기경이 아무런 저항 없이 파리로 귀환했습니다.

이는 길고 혼란스러웠던 프롱드의 난이 완전히 종식되었음을 의미했으며, 프랑스의 절대왕정 확립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 귀족 세력이 왕권에 대항하여 일으킨 최후의 대규모 내란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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