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트 칙령

역사적 사건, 종교 정책, 프랑스 역사, 종교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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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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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트 칙령은 16세기 프랑스를 휩쓴 위그노 전쟁을 끝낸 역사적인 종교 관용 정책입니다.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서 개신교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세계 최초의 기념비적인 선언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17세기 루이 14세에 의해 폐지되며 수십만 명의 위그노가 해외로 이주 프랑스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약 100년 후 루이 16세의 관용 칙령으로 마침내 종교 자유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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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

[상제르맹 칙령 선포와 위그노 전쟁 발발]

프랑스 왕실이 위그노의 권리를 일부 인정하는 '상제르맹 칙령'을 발표했지만, 가톨릭 측의 불만은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가톨릭 세력이 예배 중이던 위그노를 습격하면서 참혹한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죠.

이 전쟁은 무려 30년간 프랑스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상제르맹 칙령이 선포되었으나, 양측의 불만이 가라앉지 않았고 가톨릭 측이 위그노를 살해하기 시작하면서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위그노 전쟁은 이후 30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1570

[정략결혼 합의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위그노 전쟁 중인 1570년, 잠시 평화의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위그노 지도자 앙리와 가톨릭 공주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을 통해 양측은 휴전과 화합을 약속했죠.

하지만 이 결혼식은 최악의 비극으로 변했습니다.

신부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결혼식에 모인 위그노들을 한꺼번에 없애려 잔혹한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신랑 앙리마저 간신히 살아남아 억류되었고, 프랑스는 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휩싸였습니다.

1570년 양측은 휴전을 맺고 위그노인 나바르 국왕 앙리와 가톨릭 진영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식을 화평의 증거로 치르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신부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결혼식에 모여든 위그노들을 없애기로 결심하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일으켰습니다. 신랑 앙리는 간신히 살아남았고 양측은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1589

[앙리 3세 암살과 왕위 계승 전쟁 발발]

종교 전쟁의 혼란 속, 프랑스 국왕 앙리 3세가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위그노 전쟁은 단순한 종교 갈등을 넘어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국제적인 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잉글랜드는 위그노를, 스페인은 가톨릭을 지지하며 개입했고, 프랑스는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당하자 위그노 전쟁은 왕위 계승전으로 비화되었고 국제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당시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과 결별한 잉글랜드는 위그노 측을 지지했고, 스페인은 가톨릭을 지지했습니다.

1598

[교황의 낭트 칙령 맹비난]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은 종교 화합의 빛이었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것'으로 비난받았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 개신교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에 대해 극심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죠.

이는 당시 유럽 사회에 종교적 긴장이 얼마나 팽배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낭트 칙령이 선포되자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개신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이 칙령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것'이라며 즉각 비난했습니다.

[낭트 칙령 선포]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기나긴 종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발표한 칙령.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서 칼뱅주의 개신교인 위그노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역사적인 선언입니다.

이로써 잔혹했던 위그노 전쟁의 막을 내리고 종교 화합의 길을 열었죠.

개인의 종교적 믿음을 인정한 '사상의 자유'의 첫 사례로 손꼽히는 세계 최초의 기록적인 사건입니다!.

앙리 4세는 1598년 4월 13일 낭트에서 개신교의 '특정한' 권리를 인정하는 칙령을 선포했습니다. 이 칙령은 두 개의 공증된 문서로 작성되었으며, 파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개신교도가 모여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위그노 보호를 위해 병력 주둔 및 요새 건설 비용을 국왕이 지불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이로써 위그노 전쟁은 종결되고 개신교 탄압 법률이 폐지되며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1685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 폐지]

앙리 4세가 어렵게 이뤄낸 종교 화합의 상징, 낭트 칙령이 루이 14세에 의해 갑작스럽게 폐지됩니다.

가톨릭만을 국교로 인정하려던 루이 14세의 결정으로, 위그노들은 다시금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해외로 대거 이주하게 됩니다.

무려 20만~30만 명의 위그노가 조국을 떠났고, 이는 프랑스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유럽 곳곳으로 흩어진 위그노들은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 심지어 북아메리카까지 정착하며 새로운 문화를 꽃피웠죠.

저명한 수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같은 인재들도 프랑스를 떠나야 했습니다.

루이 14세는 가톨릭만을 국교로 인정함으로써 절대 왕정에 대한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자, 1685년 10월 18일 퐁텐블로 칙령을 내려 낭트 칙령을 폐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20만명에서 30만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신변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해외로 이주했으며,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던 위그노들의 이탈은 프랑스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주한 위그노들은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을 비롯해 북아메리카까지 퍼져나갔고,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와 같은 과학자들도 프랑스 아카데미를 떠났습니다.

1787

[루이 16세의 관용 칙령 선포]

낭트 칙령 폐지 이후 한 세기 가까이 종교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프랑스.

마침내 루이 16세가 '관용 칙령'을 발표하며 개신교도들에게 다시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직전, 종교적 긴장을 완화하고 사회 통합을 시도하려는 중요한 움직임이었습니다.

루이 16세가 관용 칙령을 선포한 1787년 이후에야 프랑스에서는 개신교가 다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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